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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Oct 14. 2022

버려진 우산

내가 다니는 헬스장 입구 옆에는 크기가 꽤 큰 우산꽂이가 있다. 매일 보는 그 우산꽂이에는 비 오는 날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꽤 많은 우산이 꽂혀있다.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멀쩡한 우산도 있지만 얼핏 보기에도 오랫동안 방치해 둔 듯 우산 살이 그대로 노출된 것도 있다.


비가 오는 날 쓰겠다고 놓고 다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주인이 깜빡하고 두고 가버린, 즉 버려진 우산들이다. 그렇다고 주인이 언제 와서 찾아갈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가져갈 수도 없는 일이다. 헬스장 직원 중 누구 하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눈치라 우산들은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다.


문득 버려진 우산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하고 상상해 보았다. 분명 각양각색,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구매한 우산, 비 오는 날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우산,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은 우산, 직장에서 단체로 맞춘 우산, 사은품으로 제작된 우산 등등 모두 출발점은 다르지만 지금 여기 버려졌다는 공통점으로 똘똘 뭉쳐서 지내고 있다. 그동안 사력을 다해 일했었을 텐데 참으로 우산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따름이다.


우산이란 물건은 여타의 물건과는 다른 독특한 면이 있다. 흐린 날 가지고 나가면 설령 갑자기 비가 오더라도 옷이 젖지 않도록 보호해주기 때문에 든든한 마음마저 생긴다. 그래서 누군가 진심으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우산이 되어줄게.'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실생활에 유용한 물건이지만 대부분의 화창한 날에 우리는 우산의 존재를 잊고 살아간다. 하긴 이게 어디 우산에만 국한된 일인가. 세상에는 한때는 없어지면 안 될 것같이 소중하다가 나중에는 다양한 이유로 버려지는 물건이 너무나 많다.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어쩌면 인생은 타인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계속 잊히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는 잊힌다는 건 단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만이 아닌 상대에게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기억 한편에서 남을 수는 있어도 떠올려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 그런 것이 진정한 잊힘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내게도 곁에 없으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덤덤하게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그들에게 나도 그런 존재이리라. 그중에는 내가 떠났던 사람도 있고, 나를 떠나갔던 사람도 있다. 그때는 서로의 마음을 아프도록 저리게 했었지만, 이제는 관계라는 말이 무색한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나 사랑했고 내 전부 같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 희미해져 오래전 본 영화처럼 몇몇 장면으로만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 장면들은 평소에는 안 보이게 고이 접어져 있다가 어떤 장소나 물건으로 인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다. 때로는 특정 노래나 단어로 연되기도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문득 기억이 떠오를 때 추억에 젖어 가만히 감상하고는 한다. 지금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그들도 가끔은 나를 생각할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비록 나와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잘 지내기를 바란다.


헤어진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건 맹렬한 불꽃을 태우는 과정과 같다. 처음에는 슬픔이 활활 타올라 화마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마침내는 마지막 남은 불씨마저 꺼진다. 그 괴로운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냥 버티고 기다리는 밖에 없다. 마침내 불타고 남은 얼마 되지 않는 미련의 잿개비는 애잔하지만 그렇다고 미련 가루를 쓸어 담아 계속 품고 살아갈 수는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 그 속에서 살 수는 없고, 살아서도 안 된다. 그러니 어딘가에 두고 온 우산 같은 사람들에 대한 미련은 과감히 버리고 지금 내 옆에서 미소 짓는 사람들에게 충실해지자. 그들은 가끔 심술궂게 오는 비가 아닌 싱그러운 햇살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우산이 너무 늦지 않게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설령 우산의 주인이 끝까지 우산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속상함은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운 우산과 함께 비 오는 날을 굳세게 맞이했으면 좋겠다.


한 줄 요약 : 어딘가에 우산을 두고 왔다면 최대한 빨리 찾고 만약 잃어버렸다면 너무 속상해 말고 새 우산을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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