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희정 Oct 17. 2022

등산의 진짜 묘미

토요일 오후, 친한 언니와 수리산 수암봉으로 등산을 갔다. 얼마 전부터 등산에 취미를 붙인 그녀는 산이 주는 상쾌함이 좋다며 한번 같이 가자고 계속 말해왔었는데 이제야 같이 가게 된 것이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회 첫 직장에 산악회가 있었는데 산에 가면 좋다는 꼬임에 넘어가 뭣도 모르고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는 코스를 한 번 따라갔다가 너무 힘들어 나중에는 네발로 기어서 올라갔었다. 그때 하도 질려서 이후 산악회 사람만 보면 숨었고, 어쩌다 산악회 대장과 마주쳐 또 한 번 가자는 말을 들을 때면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거부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산=개고생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랬던 나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것일까. 1시간이면 올라갈 수 있는 짧은 코스이고 산 공기도 무척 좋다는 말에 혹해서 결국 같이 가기로 했다. 오후 1시, 퇴근 시간에 맞춰 언니가 차를 끌고 직장 근처로 와서 우리는 바로 수암동으로 출발했다. 30분가량을 달려 수암봉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 입구로 향했다. 산 입구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보였는데 언니는 왼쪽 코스는 높이가 가파르지만 거리가 짧고, 오른쪽 코스는 좀 완만한 대신 계단이 많아 힘들다며 왼쪽 코스로 갔다가 계단 코스로 내려가자고 했다.


이미 몇 번 와본 언니가 앞장서 걸어가고 나는 뒤 따라 걸어갔다. 언니는 물 만난 물고기, 아니 산에 사는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걸어갔다. 산이 익숙하지 않은 나는 점점 언니와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니는 한 번씩 나를 돌아보며 그리해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겠냐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연하게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오르기를 30~40분쯤 지났을까.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언니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그 자리에 멈추었다. 나는 거북이가 토끼를 지나치듯 언니를 지나쳐 터벅터벅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기에 왠지 이대로 멈추면 주저앉아 다시 일어날 엄두를 못 낼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겹게 느릿느릿 계속 산을 탔다.


한참을 더 올라가다 보니 나무 쉼터가 보였다. 나는 잠시 쉼터에 앉아 가지고 온 물을 꺼내 마시며 땀을 식혔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 언니와의 간격이 너무 벌어진 것 같아서 좀 기다리기로 했다. 언니가 계속 보이지 않자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언니에게 전화하려는 찰나,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나무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너무 숨차고 어지러워서 좀 쉬었다 왔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고 마침내 수암봉 정상에 도착했다. 저 멀리 아파트로 이루어진 도시와 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언니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정상을 찍은 내가 뿌듯했다. 나 같은 등반 초짜가 초반에 앞사람을 따라잡겠다고 걸음을 재촉했더라면 진작에 지쳤을 것이다. 천천히 가더라도 멈추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끝까지 갈 수 있다. 산도 인생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간다면 우리는 언젠가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곳에서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하고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계획대로 반대쪽 계단 코스로 갔다. 과연 언니의 말대로 경사는 아까보다 완만했지만, 계단이 무척이나 많았다. 나는 오래전 왼쪽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해서 올라갈 때도 그렇지만 내려갈 때도 험한 산길보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계단을 밟을 때가 훨씬 더 힘이 든다. 아마도 일정한 간격으로 이루어진 계단을 밟을 때마다 무릎이 구부려지며 받는 부담이 내가 보폭을 조절할 수 있는 단순 내리막길보다 더 크기 때문인 듯하다.


언니는 그새 기운을 차렸는지 날아갈 듯 가볍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불편한 무릎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걷는 나를 보고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유독 계단이 불편한 이유를 설명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올라왔던 그 길로 다시 내려갈 걸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너는 정말 등산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구나. 등산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같은 길로 내려가면 재미가 없잖아. “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이걸 설명하는 데 있어 등산보다 더 적절한 예가 또 있을까. 그제야 나는 등산의 진정한 묘미는 정상까지 올라가 승리감에 도취되어 경치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인 오르고 내려가는 길에서 눈에 담는 다양한 풍경이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하루 동안 하는 등산도 이렇게 재미를 위해 새로운 길을 시도하는데 하물며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매번 똑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멈추지 않고 끝까지 걸어서 정상에 도착하는 것처럼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새로운 길을 걸어가며 즐기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하며 그 과정을 누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기나긴 인생길에서 죽음이라는 종착지까지 가는 동안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까.


내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 줄 요약 : 인생은 과정을 즐겁게 만드는 사람의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버려진 우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