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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Oct 09. 2022

오겡끼 데쓰까?

"오겡끼 데쓰까?(잘 지내나요?)"


모임 단톡방에서 누군가 말했다.


일본어는 우리 세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영화 대사이다. 1999 우리나라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이와이 지 감독의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이 설원 에서 죽은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 치던 유명한 장면에서 나왔다.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당시 패러디도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으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 그 말 인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혼자 생뚱맞게 시시 웃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말과 함께 따라오는 그때 그 시절의 추억 때문이다.


대학교 때 나와 내 친구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곧장 가거나 공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서 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대패 삼겹살집, 감자탕집, 호프집 등을 전전했었다. 어디를 갈지는 오직 그날의 주머니 사정에 달려있었고 술 사 먹을 돈이 부족한 날은 맥주 몇 병만 사 가지고 친구의 자췻집을 털도 했.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아빠는 한밤중에 종종 술안주로 먹다 남긴 치킨과 닭똥집   오셔서 자고 있던 나와 동생들의 어깨를 흔들며 잠을 깨우셨다. 그럴 때마다 우린 눈도 제대로 못 뜬  아빠의 술 냄새 풀풀 풍기는 뽀뽀를 받으며 바삭함이 간신히 매달린 치킨과 쫄깃함을 넘어 고무보다 질긴 닭똥집을 맛있게 먹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들은 엉뚱하게도 나도 커서 술을 잘 마실 것이라는 믿음, 아니 착각을 주었고 마침내 스무 살이 되자 나는 내가 술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숱한 밤을 비틀거리며 친구들에게 끌려다다.


그날도 그랬다. 몹시 추운 겨울, 이미 며칠째 눈이 내려 세상은 온통 하게 변해 있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우리는 다 같이 호프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이 세상에 우리만 존재하는 듯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시끄럽게 웃고 떠들  보니 밤이 점점 깊어다. 느새 자정 넘어 우리는 흥건히 취한 상태로 호프집을 나왔다. 밖에는 다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복소복 내리는 눈과 은은하게 비치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걸을 때마다 들리는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기분 좋은 흥분을 일으켰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걷다가 득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아직 누구의 발자국도 지 않은 새하얗게 눈 덮인 공터가 보였다. 그 공터를 본 순간 나는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치 이와이 슌지의 페르소나가 된  갑자기 공터로 달려가 허공에 대고 소리를 쳤다.


"오겡끼 데쓰까!" 


뒤에서 친구들의 웃음이 터졌다. 친구들의 웃음소리에 나는  고취되어 릎을 꿇고 한 번 더 소리쳤다.


"시와 겡끼데쓰!(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친구들은  웃으며 하나내게 가왔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릴 적 엄마가 푹 꺼진 이불 솜틀기를 위해 이불 홑청과 안감뜯어내면 드러났던 새하얀 목화솜 같은 구름 산산이 찢어져 작은 솜 조각이 된  나풀거리며  얼굴떨어졌다. 작은 구름 조각들 부에 닿자마자 로 인한 열기 금세 녹아내렸다. 기분이 정말 좋았다. 갑자기 한 친구가 눈 뭉치를 만들어 다른 친구에게 던졌다. 우리는 그렇게 땀이 나도록 한참 동안 눈싸움했다.


웃고, 울고, 떠들고, 슬퍼하고, 통곡고, 그러다 다시 웃던 내 감정에 솔직했던 나오늘따라 참 아련하.


사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참 애매한 위치이다. 정신과 감은 여전히 철부지인데 갑자기 주변으로부터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전  몫을 하는 일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미성숙한 자아와 성숙한 의무가 서로 충돌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남들이 다 기하는 사춘기 시절보다 대학교 때 더 많은 방황을 했었다.


그러나  객기와 방황점철되었던 절을 다시 돌아보면  시간이 단지 쓸데없는 낭비만은 아니었다 생각이 든다. 아직 젊고 인생에 대해 르는 것 투성이였기 때문에 분히 고민하고 정처 없이 헤맬 시간이 필요했으며 그때는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고 생각했던 나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까지 살면서 몇 번이나 넘어지려고 할 때마다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힘들고 팍팍한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 방황의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언제든지 추억을 소환해 나눌 있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오겡끼 데쓰까. 와따시와 겡끼데쓰."


내 순수의 시절은 여전히 안녕하다.


한 줄 요약: 젊음은 객기를 부리고 방황하며 흘려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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