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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Oct 06. 2022

건망증

"아 왜, 우리가 예전에 갔던 그곳... 또 기억 안 나지? 당신은 대체 언제가 어릴 적 마지막 기억이야? 제일 오래된 기억을 하나라도 생각해봐."     

 

주말에 가족여행을 가는 차 안에서 갑자기 남편이 물었다. 이번 여행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예전에 우리가 신혼 때 갔던 여행지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는데 내가 그곳을 기억하지 못하자 남편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그렇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다녀왔던 지명은 물론이고 그곳에 갔던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남편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떻게 그걸 기억하지 못하냐고 신기해하더니,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심각하게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는 그냥 또 그러려니 하는 눈치이다.      


아무튼 남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억 창고를 열심히 뒤져 애써 옛 기억을 꺼내 보았다.


문득 떠오른 가장 오랜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등교하던 날 담임선생님이 출석 체크를 위해 우리 반 아이들 이름을 부르던 시간이었다. 그 당시 우리 반에는 나 말고도 희정이라는 이름이 2명이나 더 있어 내가 굉장히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후 일 년 내내 내 이름 앞에는 항상 ‘큰’이라는 단어가 붙어 다녔다(어릴 적 나는 늘 교실 맨 뒷자리에만 앉았을 정도로 키가 꽤 컸었다. 너무 빨리 자란 탓일까. 쑥쑥 자라던 키는 6학년 때 이후 멈춘 채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평생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떠오른 기억은 중학교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갔던 날이다. 나에게는 항상 붙어 다니던 3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날은 그중 한 명의 집이 부모님의 여행으로 비게 된 날이었다. 누가 먼저 제안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고, 짜릿하고 알딸딸한 기분을 주었던 일탈은 결국 나와 한 친구의 싸움으로 끝났다(다음 날 우리가 바로 화해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십 대의 싸움이 길어야 얼마나 길었겠는가. 얼마 못 가 우리는 다시 죽고 못 사는 친구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심취해서 틈만 나면 영화를 보곤 했었다. 그때는 누군가 어떤 영화에 대한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영화를 만든 감독과 그 감독의 다른 영화들의 제목을 줄줄 읊어댔었다. 덕분에 공부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지금은 가끔 아이를 위해 디즈니 만화를 몇 편 볼뿐이다.      


그러고 보니 수영에 빠져 살던 스물아홉 시절도 기억난다. 접영 웨이브 자세를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을 연습하며 자세를 고쳤던 그 시절 말이다. 나중에는 체육센터 내에서 진행했던 대회도 나가 메달도 따고, 미사리에서 열렸던 왕복 3km 오리발 수영대회에도 출전했었다.(대회 기록은 57분 정도가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약속도 잡지 않고 퇴근 후에는 무조건 수영장으로 달려갔었다. 임신하면서 그만두었다가 3년 전 다시 시작했었는데 얼마 못가 코로나가 터져 수영과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지금은 수영장에 가면 물에는 뜰 수 있는 실력 정도가 될 것이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언뜻언뜻 떠오르는 장면들도 함께 떠나보냈다. 어떤 장면은 선명한 사진 같았지만, 대부분은 뿌옇게 김 서린 안경 너머로 보는 경치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기억력이 나쁜 걸까.      


이것은 사실 내 성향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한 가지에 빠지면 그 밖에 다른 일은 신경을 끄고, 금세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좋게 말해서 선택과 집중을 훌륭하게 실천하는 사람이다. 무언가에 깊이 빠지는 건 사실 꽤 멋진 일이다. 얇게 두루두루 섭렵하는 지식도 좋지만 하나를 깊이 파고들면서 알게 되는 나름의 쾌감이 있다. 남들보다 그 분야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고 조금 더 잘하게 되면서 느끼는 약간의 우월감도 생긴다. 그러나 내가 빠져있는 부분 이외에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소홀해지는 단점도 분명히 있다. 게다가 그나마 생기는 우월감 역시 찰나의 감정이며 대부분의 시간은 나보다 높은 경지에 있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비교로 인한 좌절감을 이겨내야 하는 인고의 과정을 거친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단지 본인의 성향이나 취향의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단지, 무언가에 빠질 경우에는 분명 희생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 경우에는 그 희생이 기억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자신을 별로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엄마 내가 사달라고 했던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22권 주문했어?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또 잊어버렸지? 어휴, 대체 언제 사줄 거야!"      


기억력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데 딸이 다가와 를 타박한다. 망증조차 끌어안고 있는 자신을 수용하는 것도 좋지만, 생활과의 적절한 타협위해 메모하는 습관은 하나 만들어야겠다.


한 줄 요약 : 기억력이 나쁘면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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