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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Feb 05. 2023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행복. 여행.

두 여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태국 끄라비로 여행을 왔다. 각 집당 매달 일정 금액을 3년 넘게 같이 모았었는데 세 집의 일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데다가 코로나까지 겹쳐 계속 미루다가 마침내 성사된 대가족 여행이었다.           


여행은 하러 가기 전날이 가장 즐겁다고 했던가. 떠나기 전주부터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오른 남편과 아이의 기대치는 여행 전날 최고치가 되었다. 그에 반해 나는 내내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막상 여행 날이 되어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정말 떠난다는 실감이 들어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우리는 6시간 비행 후 한밤중에 푸껫 공항에 도착했다. 너무 늦은 밤이라 예약했던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끄라비 아오낭 해변가에 있는 비치 리조트로 이동해서 5일간 머물렀다. 그 후 풀빌라가 있는 호텔로 한 번 더 옮겨서 마지막 이틀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매일 집과 직장, 기껏해야 운동하러 헬스장이나 들르던 나의 생활 패턴이 하루아침에 확 달라졌다. 먹고, 자고, 노는 이 단순한 행위는 절대 질리는 법이 없다. 1일 1 마사지를 부르짖던 남편의 소원도 8일간의 여행 중 총 4번을 받았으니 반절은 성취한 셈이다. 섬 투어로 갔던 환상적인 홍섬(Koh Hong)에서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바닷속 물고기는 꿈속에서나 다시 볼 수 있는 장면이리라.


계속 놀고 끼니때마다 타국 음식을 먹었던 탓인지 여행 중간에 조카 하나가 배탈이 났다. 그 바람에 하루는 호텔에서 온종일 쉬었지만, 풀장 옆 선베드에 누워서 꾸벅꾸벅 졸며 한가하게 보낸 시간도 나름대로 참 좋았다. 어째서 이곳은 햇살도 구름도 이다지도 아름다운 걸까. 마음이 여유로워진 탓인지 모든 풍경이 천국이고 그림 같았다. 붙잡아서 간직했다가 힘든 날 꺼내 보고 싶은 순간이 참 많았다.           


해외여행의 매력은 낯섦과 익숙함의 공존, 그리고 무엇보다 잠시 동안 내 삶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거리에 넘쳐나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서 온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고, 태국 특유의 현란한 색채가 가득했던 옷과 가방이 걸려있던 상점에서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즉석에서 믹서기로 갈아서 주는 생과일주스는 맛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도 저렴한 가격에 반해 매일 마셨다. (한잔에 50밧=한화로 약 1,870원) 그 밖에도 모닝글로리 볶음, 똠얌꿍, 팟타이 등의 음식에서는 태국의 고유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의 대화는 또 어떠했던가. 태국인들 대부분은 거의 영어를 할 줄 알았는데 그 나라 사람들 특유의 억양으로 인해 처음에는 단순한 영어도 알아듣기 힘들어 굉장히 집중해서 듣고 천천히 대답했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과 지내면 처음에는 조금 위축되는 기분이 들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태도가 자연스럽게 겸손하고 정중해진다.     

     

그런가 하면 낯선 풍경 속에서도 익숙한 장면을 발견했다. 호텔 조식을 먹는 식당에서 본 세계 각국의 인형 같은 아이들이 부모가 밥 먹는 동안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묘한 동질감을 느껴 혼자 실소했다. 길거리 상점에서 바지를 사며 주인아저씨와 동생이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은 우리나라 시장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정겨웠다. 섬 투어를 위해 이동 수단으로 탄 모터보트가 푸른 바다를 가르며 만들어낸 짙은 안개 같은 잔물방울은 세계 어느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하고도 청량한 물보라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감성에 젖어 비행운처럼 형성된 물보라 길을 감상했다.       

    

남편이 유심을 신청했고 호텔 와이파이로도 충분히 인터넷을 쓸 수 있었기에 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생활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식적으로 아침저녁에만 한 번씩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었고 한낮에는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었다. 실제로 떨어진 거리 이상으로 마음의 공간은 지구 반대편만치나 벌어졌다. 내 삶과의 일시적인 단절은 지쳤던 내 영혼이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매일 푹신하고 안락한 호텔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남편과 아이는 서로를 얼싸안으며 돌아갈 날이 점점 가까워져 온다고 서운해했다.    

       

행복했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유는 내가 단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한 순간에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한 순간에 지금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을 오롯이 가질 수 없다. 행복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즐겨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보내야 한다.

          

오늘은 꿈같이 흐르던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잡지에서나 보던 예쁜 화장실과 욕조, 뭉게구름에서 자고 일어난 느낌을 주던 침대, 화려한 분위기의 거실 테이블을 찬찬히 둘러보며 빠진 물건이 없나 하나씩 확인하고 마지막 캐리어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모든 짐을 다 싸고 나니 우리가 여기서 묵었던 사실도 금방 과거 속으로 잠겼다.           


아쉬움만을 간직한 채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딸이 말했다.      

“엄마, 간장게장 먹고 싶어.”      

나는 웃으며 얼른 한국 가서 먹자고 대답했다.

그래, 푹 쉬었으니 이제 다시 생각의 회로를 돌릴 수 있는 현실로 돌아가자.     


한 줄 요약 : 가족여행은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즐기고 오는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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