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플갱어 – 구로사와 기요시
‘밝은 미래’, ‘카리스마’에 이어 세 번째로 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도플갱어’는 앞선 두 영화와는 달리 생각보다 그리 음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의 뒷맛은 내게 기나긴 여운을 남겨준다.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란 그림에서처럼 도플갱어는 내 속의 나, 즉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 간간이 보여주는 화면의 양분화로 인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이 생소한 화면 기법(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지만)을 통해 영화는 역시 영상의 언어임을 새삼스럽게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두 갈래로 나뉜 화면처럼 인간은 분명 누구나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인간이란 보다 다양한 인격체가 공존하는 존재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중성에 대해 나를 대입시켜 보자면 그것은 ‘파괴하고자 하는 본능’과 ‘생산하고자 하는 본능’으로 나뉜다.
생산의 본능은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모성 본능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모성이란 단어는 그리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가장 근원적인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창조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파괴욕은 비단 전쟁과 같은 거대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직 죄책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잠자리나 개미와 같은 생물을 죽이는 쾌감을 느껴보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몇 시간씩 공을 들인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쾌감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공포영화 역시 자신을 자학하는 데서 오는 쾌감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한 경우 SM 플레이를 즐기는 자도 있겠다)
흔히 ‘노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은 이 상반된 본능을 적절히 중재할 충분한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것은 저울을 수평으로 유지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쳐도 그것이 넘쳐흐르지 않도록 반대편도 채운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균형이 깨어진 자들을 ‘어브노멀’ 혹은 ‘정신적 환자’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론 그것이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때에는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어브 노멀’인 상태로 살아간다. 그러나 결코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그렇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니까. 생각해 봐라. 첫 번째 메트릭스가 무너진 이유를...
- 2004년 3월 2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