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주마등
東, 동녘 동
나는 주변사람 모두가 인정하는 지독한 방향치다
같은 곳도 몇십 번은 같은 길로 가야만 그나마 찾아갈 수 있고
다른 길로 똑같은 곳을 가기 위해서는 다시 같은 연습을 반복해야만 한다.
그래서 나에게 새로운 길로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건 언제나 큰 모험이다
너를 만나고 너로 향하는 미지의 길은 나에게는 도전이었고 용기였다.
매번 같은 길을 통해 같은 곳으로 가는 것밖에 모르는 나에게 너는 늘 새로운 길, 낯선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너에게 가기로 결심했을 때 난 붉은색으로 점점 짙어져 오는 아침이었다
西, 서녘 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어컨을 꼽겠지만
나는 누가 뭐라 해도 단연코 일등은 내비게이션이다.
가야 하는 목적지만 입력하면 지금 내가 어느 곳에 있든 간에 최단시간, 최단거리의 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방향치인 나에게는 내비게이션이 신이었고 그것의 말이 곧 신의 가르침이었다.
너를 향하는 길은 내비게이션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신의 가르침이 없으니 너와의 거리를 최단으로 가로질러 갈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하였다.
해가 질 때까지 너의 모습을 좇아 두리번거리며 신중하게 갈 수밖에 없었다
南, 남녘 남
지하철 역을 나와 3번 출구로 나가면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횡단보도를 건너면 되었었는데 나는 6개월을 무식하게 지하철로 들어가 3번 출구로 나와서
항상 퇴근을 했다. 그곳에서부터는 집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어느 날, 시간이 늦어 지하철 역 입구가 닫혀 있었다.
술도 취했고, 집에도 가야 하고, 굳게 닫힌 지하철역 철문으로 내려가 매달리면서 소리쳤다
문 좀 열어주세요. 집에 가야 해요
간신히 너에게 알아낸 길로 나는 다녔다. 조금씩 익숙한 길이 풍경으로 다가왔다.
아이스크림은 딸기맛, 여유로운 평일 놀이공원, 소곤소곤 비 오는 날, 학교 뒷골목 허름한 중국집 짬뽕
나는 무식하게 그 길로만 너에게 갔다. 시간과 거리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술에 취한 어느 날, 친구를 통해 너의 마음이 여전히 닫혀 있다는 걸 알았다.
취한 마음에 성급하게 너에게 전화를 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너에게 가야 해요
北, 북녘 북 그리고 달아날 배
무모하게 가끔 내비게이션에게 도전을 할 때가 있다.
이길로 가면 더 빠를 거 같은데? 이번엔 너의 말을 무시해 보겠어
어김없이 나는 틀리고 내비게이션은 맞다
자책하고 후회하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
신을 거스르는 일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잠시 볼 수 있냐고
동네 작은 주유소 뒤편
작고 예쁜 바이올렛 꽃바구니를 나에게 주며
너와는 계속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했다
꽃말은 영원한 우정이라고도 했다
나는 틀렸고 너는 맞았다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보일 수 없어서 우정 한 다발을 받고는 뒤돌아 집으로 왔다
그래 너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하니까
그렇게 달아난 나는 다시 방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