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주마등
그날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마침 퇴근시간 바로 전에 하필 부서장이 회의를 하자고 해서 마라톤으로 2시간 넘게 회의를 했을 뿐이고, 마침 택시 타기 전에 담배라도 한대 피울까 했더니 그날따라 택시가 빨리 잡혔을 뿐이고, 택시에서 내려 집 앞에서 한대 필까 했는데 장을 보고 돌아오는 와이프와 만나서 같이 들어왔을 뿐이었다.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걸로 알고 있으니 담배 생각은 꾹 누르고 있었는데 마침 와이프와 저녁식사 후에 틀은 영화에서 계속 줄담배를 피우는 영상들이 나왔다.
더 이상은 담배를 참는 게 한계에 달하고 있었지만 뜬금없이 나갈 핑계가 부족했다.
생각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담배 피우러 나갈 수 있는 이유를……
“여보 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데 집에 있을까?”
“어, 자기가 좋아하는 메로나랑 바밤바 있을걸?”
“아니, 갑자기 구구콘이 먹고 싶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핑계는 내가 생각해도 너무도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아 그럼 자기 피곤하니까 내가 사다가 줄게”
“어? 어 그래 줄래? 고마워”
예상과 달리 내가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괜찮았다.
그래 내가 사러 나가지 않더라도 와이프가 집에 없으니 난 그사이에 베란다에 나가서 피면 되겠다.
와이프가 주섬주섬 외투를 챙겨 나가자마자 이런 굉장한 아이디어를 순간적인 기지로 쏟아낸 나 자신을 칭찬하며 베란다로 나갈 타이밍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편의점까지 다녀오면 15분이니까 여유 있게 두대를 필 수 있겠군.
심지어 베란다에서 편의점 동선도 보이니까! 일이 잘 풀리는 구만.
와이프가 나가고 바로 담배를 피우면 하수지.
무언가를 놓고 가서 다시 들어올 수도 있으니, 여유 있게 소파에 누워서 티브이를 보다가 베란다로 나갔다.
역시 난 대단해라는 생각을 하면서.
첫 번째 담배를 물었다.
뭔가 길거리 쪽에 새소리 같이 짧고 긴 소리가 났다.
웬 야밤에 새가? 신기한 마음에 멀리 쳐다보았지만 깜깜한 밤이라 라이터 불빛만이 보일뿐 딱히 새는 보이지 않았다.
후…. 4시간 만에 피는 첫 담배 맛은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기에 너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담배 한 모금 한 모금을 연기 한 오라기라도 내 폐로 거쳐가지 않을까 봐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폈다.
담배 한 모금에 늦게 회의를 잡은 부서장도 용서했고, 다른 한 모금에 일찍 온 택시기사도 고맙게 생각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빨 때쯤 나한테 담배를 피우게 한 그 이름도 기억 안나는 군대 선임 놈까지도 용서했던 것 같다.
나는 담배를 군대에서 배웠다.
군대의 선임이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사역을 면제하여 주고 비흡연자에게 몰아주었다.
심지어 사역이 끝나고 나면 비흡자들의 코와 입에 담배 10개비를 꽂은 다음 불을 붙이고 고개를 숙여 깨스를 시켰다.
올라오는 연기에 콜록거리며 콧구멍에 끼워놓은 담배가 빠지면 귓방망이 한 대씩 맞고 다시 끼웠다.
“너희 담배 필래? 안필래?”
“시정하겠습니다. “
결국 버티던 비흡연자들은 3일도 못 가 모두 항복하고 흡연자의 대열에 올라섰다.
“저 새끼 제대하는 그날까지 피는 시늉만 하자. 그때 끊지 뭐”
그렇게 쉽게 될 줄 알았는데. 구타가 심했던 군대에서 결국 맞을 때마다 담배를 피우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이면 계속해서 피게 되었다.
결국 그 새끼 제대 하는 날에도 난 담배를 물고 있었고, 제대하면 끊지 뭐, 내가 제대하는 날 끊지 뭐, 복학 전에 끊지 뭐, 졸업 전에 끊지 뭐, 회사 가기 전에 끊지 뭐, 하다가 결국 지금까지 오게 됐다.
두 번째 담배를 물었다.
지나가는 구급차 소리에 군대시절 맞았던 곳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으나 새로 들이킨 한 모금은 통증을 빠르게 가라앉혀 주었다.
담배를 끊었던 적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났을 무렵 KBS 스펀지에서 밖에서 아무리 씻고 와도 집에 아이에게서 니코틴이 검출된다는 실험 소식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고 아직 부성애는 부족한 시기였지만 뭔가 아빠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꽤 오랜 기간이었다. 1년 정도 지나 아이가 돌잡이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을 핑계 삼아 다시 담배를 시작했었다. 20년간 가족 앞에서는 담배는 절대 피우지 않았으니 나도 참 지겹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 나도 슬슬 담배를 끊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고, 담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름이 없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사람들이 계속 찾자, 다음배에 들어와요, 다음배에 들어와요 하던 것이 담배로 이름이 정해 졌을 거야, 이 좋은 걸 어떻게 끊어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질 때쯤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들이켰다.
와이프가 슬슬 돌아올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
세 번째 담배를 피울까 고민이 들었지만 용의주도하게 냄새를 지울 시간도 필요하니 참기로 하였다.
“어디쯤 와” 톡을 보냈지만 표시는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
또 아이스크림 이외에 이것저것 더 샀구먼. 들고 오느라 톡도 못 보고 뭘 얼마나 이렇게 많이 산 거야.
10분쯤 더 지났을 때, 담배를 피울 때 들었던 새소리와 구급차 소리가 불안감이 되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전화는 계속 받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왔다. 휴..
“어디야, 왜 이렇게 늦어?”
“정수희 씨 남편분 되시나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분명 전화를 온 핸드폰은 와이프 번호인데 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정수희 씨께서 강도를 당하셨어요. 칼에 찔리신 거 같은데 출혈이 심해서 병원으로 이송 중입니다.”
옷은 입는 둥 마는 둥
정신이 나간 체 한쪽에는 운동화를 한쪽에는 슬리퍼를 신고 미친 듯이 뛰어 나갔다.
그냥 담배가 피고 싶었던 뿐인데… 왜…….
내가 담배만 피우고 싶지 않았어도.
부서장이 회의만 늦게 잡지 않았어도, 택시기사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그 개새끼가 담배만 강제로 안 피우게 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달려가며 너무 맛이 있어서 다음 배에 들어온다던 담배 이야기가 다시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