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 짐을 정리하다.

by 글쓰는장의사

"죽을 때까지 이 집 팔지 않을 거예요"

"평생 여기서 산다고?"

"아니요 이 집은 절대 팔지 않고 나중에 우리가 늙어서 다시 와서 살아요 헤헤"

그녀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몰래 나의 본가와 같은 빌라 옆 동을 샀다.

계약을 하고 기뻐하던 모습, 인테리어 중간중간 같이 올라와서 보며 행복해하던 모습, 가구를 고르며 들뜬 모습.

불과 두 달 전 이야기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이 집을 다시 판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마음이 아프다.

아침에 퇴근을 해서 옷과 신발들 그리고 몇몇 내 물건들을 본가로 옮겼다. 책과 자전거를 아직 옮기지 못했다. 그러고 나는 지금 이 집에서 마지막글을 쓰고 있다.


더 이상 이 집에서 글을 쓰지도 티브이를 보지도 잠을 잘 수도 없다. 눈에 하나하나 지그시 눌러 담고 있는 중이다. 혹여나 잊어버릴까 사진도 찍어두었다.


2인용 화산석 식탁. 그녀가 화산석 식탁이 좋다는 말에 인터넷 주문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딱 한 끼를 먹었다. 하루 세끼도 아니고 딱 한 끼. 그녀가 차려준 그 한 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좀 더 천천히 시간을 늘렸을 텐데 후회가 밀려온다. 지금 나는 그 식탁, 그 한 번의 식사 때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에어컨이 없는 집에 방에서 잠을 자기에는 조금 더웠다. 그래서 소파베드를 구입했던 우리는 창을 살짝 열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며 잠을 잤던 날이 더 많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비싸게 주고 산 편백나무침대에서 두 번? 세 번? 정도 잠을 잤다.


작은 방에는 한쪽 벽을 책장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내가 가지고 있던 책들을 모두 넣었다.

"나중에 이 책장들이 책으로 가득한 날이 오겠죠?"

"어렵겠지만 우리가 책을 열심히 보면 가능하겠지?"

이제 이 책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소파에서 우리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잘 마시지 않는 맥주가 그날따라 이상하게 같이 먹고 싶었다. 우리의 미래에 대해 그리고 그녀의 다짐을 나누었다. 이제 그 소파는 우리가 함께 앉지 못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사연이 많은 티브이. 또다시 주인이 바뀐다. 좋은 티브이라서 엄마 집에서 가지고 왔었다. 이 집에 들어온 지 한 달 만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나 혼자 산다를 즐겨보는 그녀는 박세리의 팬트리가 부러웠나 보다. 크지는 않지만 과자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팬트리를 구입했다. 열심히 조립해서 세워두고 과자로 가득 채운 후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팬트리에 채워진 과자들은 아직 그대로이다.


맥주를 좋아하는 그녀는 냉장고에 맥주를 가득 채워두었다. 오늘 무심코 냉장고를 열었는데 그 맥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의견에 작고 비좁은 화장실에 욕조를 넣었다. 내가 꿈꾸었던 장면은 내가 아침에 퇴근하고 오면 그녀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물을 받아두는 것. 아쉽지만 이 또한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럴 시간도 상황도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저 욕조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




아직 이 집은 변하지 않았다. 행복한 미래를 그렸던 그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 많이 바뀌어 버렸다. 그녀의 의지는 확고해 보이고, 내 머리는 그녀를 이해하고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고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옷가지 몇 개와 속옷 그리고 신발들. 고작 이것들만 챙겨서 나오는데 손과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뛰었다. 결코 무거워서는 아닐 테고, 며칠째 밥을 못 먹어서 힘이 빠진 걸까?


이상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본가보다 여기가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고작 한 달도 살지 않았고 지금은 혼자 있는데 그래도 이 집이 더 편하다.


짐을 정리하듯 마음이 정리가 된다면 조금은 덜 아프지 않을까?


매번 나는 정리가 아주 쉬웠다. 하지만 이번은 정말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흐릿해질까 봐 두렵다.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더라도 계속해서 이 기억들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아직은 생생한 그녀의 웃는 모습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들이 흐릿해 질까 두렵다.


지금 나는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보다 그녀의 향기, 촉감, 웃음, 발걸음 등 그녀의 모든 것이 흐릿해질까 봐 그것이 두렵고 그것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이 집에서 나가고 싶지가 않다. 조금이라도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 그런데 이제 그럴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다. 정리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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