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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May 01. 2016

학예회보다가 눈물 흘린 이야기

핀란드의 아이들

지난 계절에는 분명히 잘 맞았던 옷과 신발이 이내 작아지는 성장기의 딸들이다. 특히 큰 아이는 마지막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인지 계절초입에 사준 운동화가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엄지를 짓누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주변 사람들이 인사와 함께 ' 이제 엄마만해졌네~', ' 곧 엄마보다 크겠구나' 라고 덧붙인다.


내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당시로는 국민학교 6학년 신체검사에서 내 키는 156이었다. 그뒤로 한참이나 더 클 줄 알았는데 중학교 다니는 내내 10cm 남짓 자라더니 고등학교 시절은 자라는지 멈춘건지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만 눈금이 변해갔다. 반면 몸무게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우리 자매는 이를 사춘기 역변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아가면서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이 체력과 건강관리에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깨달은 바 있는 엄마는 큰 아이의 운동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아이의 운동복이 그새 또 작아졌다. 이제 날이 풀리기도 하니 조금 가벼운 운동복을 새로 사주려고 스포츠용품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Alison을 만났다.


' 내일 아침에 talent show 올거니? 나 보러갈거야'


학교에서 TIS Talent Show를 한다고 안내를 받은 바 있지만 부모님도 참석하시라는 내용은 없었고 방과후가 아닌 수업시간 중에 진행되는 행사라서 구경갈 생각은 못했었는데 가도 되나보다.


' 아! 그럼 내일 아침에 나도 보러 갈께'


Alison의 딸 Tilly와 Susanna의 딸 Gabriela는 큰 아이와 셋이서 팀을 이루어 아크로바틱과 댄스를 결합하여 안무를 짰고 한동안 연습을 했다. 발레를 오래 한 Tilly, Show dance을 오래 한 Gabriela, 체조를 오래 한 큰 아이... 다리 하나는 정말 잘 찢는 삼총사에게 걸맞는 선택이다.


Talent show 당일 아침, 모처럼 립스틱도 바르고 교복처럼 입던 라이트패딩이 아닌 코트를 입고 학교로 향한다. 총회에도 면담에도 그 어떤 학교행사에도 평소 입고 다니던 대로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오는 이곳 엄마들이다. 한국에서 부모가 원이든 학교에 방문하는 경우에는 대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예쁘고 격식있는 옷과 가방, 구두로 모양을 내던 모습이 일반적이었는데 참 다른 분위기다. 학교모임이나 엄마들 모임때문에 명품팩 대여사이트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도 본 적 있다. 이곳에서 학교는 아무렇게나 장보다가, 혹은 운동하다가 들러도 좋은 그런 곳이다. 하지만 한국엄마인 나는 오래도록 남은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코트나 재킷정도로 갈아입는 수고를 한다. 물론 이곳에도 멋쟁이 엄마들이 있기는 하지만 고가의 명품백과 구두로 치장하고 방금 미용실 다녀온듯한 비주얼의 엄마는 아직 못만났다.


강당으로 가는 길에 큰 아이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 우리 엄마 이쁘게 하고 오셨네~ 엄마, 이쁘다~'

딸아이라 그런지 엄마의 외모에 관심이 많다. 결혼식이나 돌잔치갈때 정말 예쁘게 변하는 엄마란다. 예쁘게 단장하고 학교에 오면 자랑스럽고 기분이 좋다는 딸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시절, 퇴근 후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는 집에 있다가 데리러 온 엄마에 비해 아무래도 꾸며져 있는 모습이다. 그때마다 친구들이 '너희 엄마는 참 이쁘다'고들 했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단다. 그런 딸의 이야기는 오늘도 엄마가 립스틱을 바르게 한다.


Tilly와 Gabby가 인사를 하더니 빨리 동작 맞춰보러 가자고 재촉을 하며 딸 아이와 사라진다. 강당에 모여 있는 아이들, 전교생이 다 모여도 200명이 채 안되는 소규모이다 보니 한 명, 한 명 익숙한 얼굴이다. 더욱이 인터내셔널 데이에 한국소개 수업을 한 뒤로 모든 아이들이 나를 알아본다. 나 역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고야, 저 녀석, 머리 좀 봐~ 저러고 피아노를 치네~


Crazy hair day라고 해서 요란한 머리를 하고 등교하는 행사도 함께 행해졌던 탓에 아이들 머리 구경만으로도 재미난다.


뭐야, 쟤는 섹스폰을 분다더니 바람소리만 쉭쉭 나네???


마술쑈를 하는 아이의 연습이 한참 부족했나 보다. 멀리서도 트릭을 쓰는 손이 여실히 티난다. 대단히 잘하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정해서 나름 연습을 하고 올라온 무대다. 모두가 박수를 쳐주고 그 용기와 과정, 노력을 칭찬하며 즐긴다.


문득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단 한 번뿐이지만 치루었던 1학년 학예회 행사가 떠오른다. 옆반보다 잘해야했기 때문에 담임선생님도 엄마들도 엄청나게 열을 올렸었다. 그 와중에 내 아이가 좀더 돋보이는 무대를 보여주었으면 싶어서 나 역시도 이런 저런 준비를 도우며 정성을 들였었다.


그렇게 탄생한 무대에 비해 참으로 초라하고 어설픈 무대지만 부모님도 선생님도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대견함이 가득하다. 아이들 스스로 참여를 결정하고 준비하며 꾸민 무대다.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이 이곳에서의 어른이 하는 역할이다.


딸 아이의 차례다. 덤블링을 하고 점프를 하더니 이어서 다리를 찢고 팔을 흔들며 율동을 한다. 어설프기는 하지만 서로 동작을 맞추려고 쉬는 시간에도 구호를 붙여가며 수십번 덤블링을 하고 다리를 찢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노래를 하겠다며 무대에 오른 Panny는 이 학교의 공식왕따아이다. 천국이라 오해되는 핀란드학교에도 왕따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는 했지만 우리 나라의 보도에서 접하던 끔찍한 괴롭힘은 아니고 파티에 초대를 안한다거나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없어 혼자 다니는 정도이다. 상대를 안한다거나 Panny에게 상처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가 겪는 마음의 상처는 가볍다할 수 없겠지...


Panny는 자신의 상처를 큰 아이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이 먼 곳까지 입양되온 이 작은 아이는 가족과 다른 생김새때문에 혼자만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밖에 나가 만나는 또래아이들과 다른 모습에 자기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세상 모든 것에 화가났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화를 내다 보니 자기 주변에는 친구가 하나도 남지 않았더라는 슬픈 이야기... 그렇다. Panny가 왕따가 된 것은 억지를 부리고 무조건 화를 내는 그 아이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아이의 내면에는 겉잡을 수 없는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Panny가 용기를 내어 무대에 올랐다. 조금은 주눅들고 자신없는 얼굴로 조심조심 노래를 한다. 가사도 웅얼웅얼...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때 선생님 한 분이 프로젝터로 인터넷에 올라온 이 노래 가사를 띄워 주셨다. 놀랍게도 무대를 바라보던 모든 아이들이 Panny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팔을 들어 올려 호응을 하며 Panny에게 힘을 주고 있다. 무대가 끝난 뒤 Panny는 울먹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휘파람을 불며 친구들이 엄지를 들어올린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늘의 기억이 Panny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뒤이어 올라온 Emmi는 어려서부터 체조와 디스코 댄스를 열심히 해온 아이다. 스웨덴이나 다른 북유럽 국가단위로 이루어지는 대회에도 참가하고 시대표로도 뽑히는 재주꾼이다.우리 딸을 비롯한 삼총사와도 친하지만 Emmi는 디스코댄스쑈를 공연하기 위해 단독으로 무대에 오른다. 의상부터 남다르다. 동작 하나하나에 그동안 얼마나 연습을 했을지가 그려진다. 어른인 내가 보이게도 참 기특하다. 반 친구들이 Emmi! Emmi! Go Emmi! 친구의 이름을 연호하며 박수를 치고 함께 응원하기 시작하자 모든 아이들, 선생님들이 함께 박수를 친다. 뭔가 좀 뭉클하네?


진심으로 친구를 응원하는 모습에 감정이 북받쳐오른 Tilly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무대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Emmi를 너나할 것 없이 끌어안는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Tilly를 Emmi는 조용히 안아준다.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서로를 끌어안고 친구를 응원한다. 하나둘 눈물을 훌쩍인다. Tilly가 울기 시작할 때부터 터지려는 눈물을 꾹 참고 있던 딸아이도 더이상은 참을 수 없는지 눈물을 줄줄 흘린다. 바라보던 엄마들, 선생님들도 조용히 눈물을 닦는다.



옆에 앉아있던 Alison도 나도 조용히 눈물을 닦아내며 속삭인다.


' 아이들이 너무 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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