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로의 비너스와 니케상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 섬(지금은 그리스의 영토)에서 두 조각으로 나뉘어진 조각상이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된다. 프랑스 해군 장교가 이 소식을 듣고는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에게 조각상의 구입토록 설득하였고 이 조각상은 프랑스의 루이18세에게 헌납된 뒤 지금까지 루브르박물관 1층에 자리잡고 있다. 이름하여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고대 조각상 중 얼굴이 온전히 남아있고 몸통의 대부분이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비너스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은 니케상을 복원하듯 비너스상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지만 팔이 없는 현재의 상태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결론을 내려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큐레이터들이 재현해 본 비너스는 왼손은 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뻗은 체, 사과를 집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왜 사과일까? 정답은 파리스의 심판이다.
퓌티이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결혼식장에 나타나 사과를 던지며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사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전쟁의 여신 아테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비너스)가 사과를 두고 미를 겨루게 되었으며 그 심판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하게 된다.
아테나는 최고의 지혜를, 헤라는 세계의 주인이 되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였지만 파리스의 선택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주겠다고 제안한 아프로디테! 그렇게 황금사과의 주인은 아프로디테가 되고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주었으니 이로써 트로이전쟁이 시작된다.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왕비였으니 왕비를 트로이의 왕자에게 빼앗긴 스파르타가 가만히 있을리 없지 않은가?
파리스의 심판은 이렇게 트로이전쟁을 낳았지만 알몸의 상태로 심사하겠다고 주장한 덕분에 여인의 몸체를 표현한 수많은 예술작품도 낳았다.
사모트라케 섬에서 출토된 3m28cm에 이르는 대리석 니케상, 니케는 승리의 여신이다. 출토 당시에는 산산조각이 나있던 것을 루브르박물관의 복원작업을 거쳐 지금의 역동적인 자태를 갖추었다. 비록 머리와 두 팔은 없지만 오른손 손목부터 손가락까지의 손 일부가 발견되고 비엔나 예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손가락들이 니케상의 일부임이 밝혀져 니케상의 원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니케상은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돌리며 위로 젖히고 오른팔은 앞으로 쭉 뻗어 승리의 나팔을 쥐고 왼팔은 뒤로 젖혀 아래로 늘어뜨렸을 것이라 추정되는데 이같은 모습의 니케가 여기저기에서 발견됨으로써 추정에 신뢰를 더한다.
니케상을 뱃머리에 올려 세우는 전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토대로 오스트리아의 발굴팀이 대리석 뱃머리와 조각상을 올려 꼭 맞음을 증명해 니케상이 뱃머리에 올라 선 자세로 있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니케상은 박물관 복도 끝 계단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날아오르는 듯한 니케상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전달하고자 루브르박물관측에서 고심끝에 계단 꼭대기에 배치했다고 한다.
니케는 승리의 여신으로 유명 스포츠 브랜드 Nike역시 니케에서 따 온 것이다. 니케는 기간토마키아전쟁에서 제우스편에 섰기 때문에 제우스 옆에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 전쟁의 여신 아테나와도 관계가 많아 파르테논 신전에는 아테나가 니케에 팔을 두룬 모습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아크로 폴리스에는 니케신전이 남아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 45도의 불볕 더위를 뚫고 수많은 신전을 탐방한 탓에 니케신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더위속에 올라간 언덕의 신전은 하나같이 폐허와도 같았으니 루브르에서 니케상을 보며 딸들과 니케신전이야기를 하면서 다음 방문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아크로폴리스 미술관의 '샌들을 벗는 니케'도 유명한 니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