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스 Dec 08. 2016

파리, 루브르 박물관 #3, 들라쿠르아

낭만주의 거장, 외젠 들라쿠르아

실증철학의 거장, 오귀스트 콩트가 태어나고 로마공화국이 탄생했으며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이집트 원정이 시작된 1798년 외젠 들라쿠르아가 태어난다.


외젠 들라쿠르아


피카소, 고갱, 모네, 샤갈, 르느와르 등 수많은 거장 화가들에 밀려 이름만 들어서는 충분한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은 본 적이 있다. 여성성의 상징이라고도 하는 젖가슴을 드러낸 체 한 손에는 총검을, 또다른 한 손으로는 프랑스 국기를 높이 치켜들고 전진하는 여인의 모습, 마리안느라 불리우는 이 여인은 혁명의 상징이 되고 이후 프랑스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이 그림은 미술사적 외의 이유로도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숙한지도 모르겠다.


1798년 부터 1863년까지 살았던 들라크루와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혁명과 따로 생각할 수 없는 세대를 살게 된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쿠테타를 일으키고 집정정치를 시작한다. 또 그 이듬해인 1800년에는 마렌고 전투에서 보나파르트가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고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한 유럽 국가간 동맹이 이루어져 나폴레옹의 시대가 펼쳐지니 말이다. 이 시기를 살아간 테오도르 루소, 장 프랑수아 밀레,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등이 자연속에서의 인간을 그린 반면 들라쿠르아는 인물이 부각된 사건을 재현하는 식의 그림을 많이 그린 것 같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루브르 박물관

마리안느가 어쩌다가 혁명의 상징이 되었는지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 혁명의 3대 상징물 중 하나이며( 마리안느가 쓰고 있는 프리지아 모자 역시 혁명의 3대 상징물 중 하나이다, 나머지 하나는 수탉) 마리안느는 당시 서민여성의 이름을 대표한다고 한다. 19세기,20세기 프랑스 주화에도 마리안느의 옆모습을 본딴 얼굴이 들어갔으며 프랑스 정부의 공식로고에도 마리안느가 있다.

                  고려우표사의 자료들


저 여인이 마리안느라 치자, 왜 마리안느는 혁명의 상징인가? 정답은 7월 혁명. 나폴레옹의 몰락이후 외국으로 망명해 있던 루이16세의 동생들이 프랑스로 돌아와 즉위한다.평화를 기대하며 왕정을 받아들였건만 왕들은 점차 언론을 탄압하고 선거권을 축소하는 등 중세 왕정으로의 복귀를 꿈꾼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인들이 떨쳐 일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7월 혁명이고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와 동지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피를 흘리며 싸웠던 바로 그 7월 혁명이다.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다시금 가슴뭉클해지는 레미제라블의 장면

7월 혁명을 배경으로 들라쿠르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을 그렸다. 마리안느는 이렇게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프랑스를 상징하게 되었다.





단테의 작은 배

단테의 작은 배

루브르에 전시되고 있는 들라크르아의 또 다른 걸작이다.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하고 작은 배를 집어삼킬듯 몰아치는 폭풍속에서 배를 타고 황급히 떠나는 세 남자, 그리고 배를 둘러싼 벌거벗은 남자들. 이곳은 지옥의 도시 디스이고 남자 셋은 배를 타고 지옥을 탈출하려 서두르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이라고도 평가받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읽고 들라쿠르아가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다.


단테의 작은 배는 들라크루아에게 천재화가라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음은 물론, 후대에는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로서 고전주의에 도전했다는 평을 받게 한다. 이보다 3년 앞서 발표된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은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화풍을 성립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루브르박물관에서 함께 감상하면 좋겠다.

메두사의 뗏목, 루브르


키오스섬의 학살

키오스섬의 학살

키오스섬은 그리스의 작은 섬으로 지리적으로는 터키에 가까운 곳이다. 나폴레옹 시절에야 그리스가 독립국이었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빈 체제를 이끈 메테르니히는 반 나폴레옹 정책을 펼치며 그리스는 다시 오스만투르크의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3개 대륙에 걸쳐 그 위세를 떨치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서서히 국운이 기울고 마침 독립의 열망으로 독립전쟁이 활발한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그리스를 희생양삼아 위신을 세우고자 키오스 섬을 공격한다. 대략 10만에서 12만의 인구가 살고 있던 키오스 섬은 처참한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가고 약 2만명의 인구만 남게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처참한 학살이 자행되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인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들라크르아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키오스의 학살을 그리게 된다.


사르다나팔왕의 죽음


사르다나팔왕의 죽음

고대 앗시리아왕인 사르다나팔 왕이 적에게 포위되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애첩과 애마를 직접 죽이고 재산을 불사른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원전 7세기의 전설을 담은 바이런의 시와 희곡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392cm x 496cm의 거대한 그림으로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당하는 잔혹한 현장을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화면 가득 그려냄으로써 당시 미술계에 커다란 반응을 일으켰으나 대부분은 비난일색이었다고 한다.


알제리의 여인들

알제리의 여인들
알제리의 여인들, 피카소


세계 경매사상 최고가에 거래된 피카소의 연작시리즈인 알제리의 여인들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7월 혁명 이후성립된 정부는 모로코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게 되는데 이 사절단에 들라크르아가 함께 한다. 모로코에서 돌아오는 길에 알제리에서 3일간의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알제리 여인들의 방을 들여다 볼 기회를 우연히 얻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한 3일이 들라크르아는 물론이거니와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에 큰 방점을 찍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우연이다.




단테의 작은 배 이후 정성껏 작성한 글이 뾰옹 튕겨나가는 바람에 다시 써보지만 급격히 성의없어진 내용에 괜시리 내 마음이 애잔하다. 신고전주의 낭만주의의 대립속에 들라크르아가 받아야 했던 비난과 낭만주의 화풍의 완성 등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들라크르아의 작품만 해도 이야기를 충분히 못다할 지경이니 루브르의 위용에 새삼 놀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 루브르 박물관 #4 메두사 없는 메두사의 뗏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