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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Dec 11. 2016

파리, 루브르 박물관 #4 메두사 없는 메두사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

외젠 들라크르아의 그림에 관한 글을 읽던 딸이 묻는다.



엄마, 이게 왜 메두사의 뗏목이에요?
메두사도 없는데???


아마도 딸아이는 포세이돈의 유혹에 넘어가 아테나의 벌을 받아 쳐다만 봐도 돌이 되어 버릴 정도로 흉측한 괴물, 아름답던 머리칼은 독사가 되어 버린 메두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이 그림은 메두사호라는 배에서 일어났던 끔찍한 일화와 관계가 있단다.


프랑스가 아프리카 식민지 지배에 열을 올리고 있던 1816년, 프랑스 함대는 군함 세 척(그 중 한 척의 이름이 메두사호) 군인들과 이주민들을 싣고 아프리카 세네갈로 향하던 중 메두사호가 아프리카 연안 암초에 좌초되는 일이 발생한다.


선장임명시 부터 부족한 항해경력 등으로 임명에 대한 반대가 많았으나 선장으로 임명된 쇼마레는 그다지 위급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좌초된 사실만으로 당황하여 배를 버리고 탈출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선장 임명 당히 쇼마레는 25년간 항해를 하지 않아 항해능력에 의심을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구명보트의 정원은 250여명,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400여명이었으니 선장을 위시한 장교 등이 우선으로 구명보트에 오르고 계급이 낮은 군인들과 신분이 낮은 이주민들은 구명보트에 오르지 못하고 뗏목에 올라탄다.구명보트와 뗏목을 밧줄로 연결한 체 바다를 표류하던 중, 쇼마레는 급기야 뗏목을 연결한 밧줄을 끊어 버리고 뗏목은 파도에 휩쓸리고 만다.


뗏목에 올랐던 이들은 강한 위기감에 뗏목의 가운데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된다.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던 젊은 군인들은 중심으로 몰려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한다. 뗏목에 올랐던 절반 가량의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고 28명만이 살아남았으나 이들안에서도 약한 자를 물에 던져버리고 죽은 자의 시체를 뜯어먹는 등의 비극속에 최후에는 15명만이 살아남아 구조된다.


구조가 된 직후 오랜 굶주림에 지쳐 목숨을 다한 5명을 제외한 10명이 최후의 생존자이다. 10명 중 한 사람이 살아돌아와 이 사건을 밝히고 프랑스는 발칵 뒤집힌다. 헤닝만켈의 에세이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헤닝만켈은 세 명의 생존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사건의 전말을 접한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전해듣고, 실제로 뗏목을 만들어 보기도 하면서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는 등 그림으로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수개월 간 노력한다. 심지어는 신체안치소에 찾아가 이 사건으로 숨진 시체의 모습까지 확인했다 하니 제리코가 얼마나 이 그림에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열정에 사로잡혀 주제에 몰입했던 그는 13개월동안 이 그림을 그리며 아틀리에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메두사의 뗏목은 최초 습작과 완성본이 모두 루브르에 전시되고 있는데 습작에서는 완성작보다 인물이 적고 완성작에서는 뗏목 도르레, 밧줄, 돛대를 잡아 맨 줄 등의 묘사가 세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습작은 65X 83의 작은 그림이지만 실제 메두사의 뗏목 완성작은 490X715 크기의 대작이다.

메두사의 뗏목 습작

낭만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한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세계 100대 명화 중 하나로 꼽히는 이 그림을 준비하며 제리코는 공모전에 출품하여 명성을 얻기를 희망하였다. 하지만 당시는 엄격하고 애국적이며 영웅적이기까지 한 화풍을 선호하는 신고전주의가 강세였으므로 현실을 포장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알리고 작가가 느낀 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제리코의 화풍은 환영받지 못하고 수많은 논란만을 남긴다. 메두사의 뗏목으로 살롱전 입상을 꿈꾸었던 제리코는 입상에 실패하자 희망을 잃고 영국으로 떠난다. 비록 입상에는 실패하고 신고전주의자들로 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제리코의 화풍에 매료된 젊은 동료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사람이 외젠 들라크루아이다.


메두사의 뗏목은 낭만주의의 시발점이 되고 이에 영향을 받은 들라크루아에 의해 낭만주의는 꽃피게 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는데 뗏목 왼쪽에 바다로 던져지는 시체는 들라크르아라는 이야기가 있다. 들라쿠르아는 제리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돈 피에르 게렝의 문화생이었고 들라크루아는 제리코를 존경하고 따랐으니 영 없는 이야기만은 아닐런지도 모르겠다.



제리코는 무표정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는데 정신질환 연구의 개척자이자 제리코의 친구였던 조르제 박사의 부탁으로 환자의 얼굴을 많이 그렸기 때문이다. 조르제는 환자의 얼굴을 그림으로 살피며 환자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고 한다.. 많은 초상화중 빨갛게 핏발이 선 눈으로 유명한 '미친 사람'그림은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루브르가 아닌 리옹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빨간 눈을 만나보기로 한다.

미친 여자, 리옹 미술관

                  제리코가 그린 초상화들


제리코는 사회적인 메세지를 담은 사실적인 그림과 초상화로도 유명하지만 말그림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말의 해부학 > 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말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잠겨 조용히 지냈는데 그 무렵부터 말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뛰어난 승마가였고 승마를 매우 즐겼다고 하는데 33세로 요절하게 된 이유가 낙마사고였으니 요절한 천재 이미지와는 조금 멀어지는 듯 하다.


엡슨 더비, 메두사의 뗏목이 입상에 실패하자 영국으로 떠난 뒤 영국의 풍경을 화폭에 담곤 했다.


돌격하는 샤쇠르, 루브르박물관
부상당한 프랑스 군사

돌격하는 샤쇠르는 제리코의 샬롱전 첫 출품작으로 힘찬 기상으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인물의 묘사때문에 종종 다비드의 나폴레옹과 비교되곤 한다. 최대한 영웅적으로 그려진 나폴레옹과 현실적인 샤쇠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화풍을 제대로 보여준다고도 한다.


다비드의 명작,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 역시 루브르의 자랑 중 하나이다. 다음 이야기는 다비드로 찾아와야 할 것 같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1세의 대관식, 자크 루이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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