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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Dec 17. 2016

파리,오르세미술관 #2 밀레의3대작

자비심, 만종, 이삭줍는 사람들

밀레의 대표작이자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만종, 이삭줍는 사람들과 더불어 밀레의 3대작으로 꼽히는 자비심


농촌의 한 모녀가 문을 열고 걸인에게 빵을 건네는

그림이다. 만종, 이삭줍는 사람들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져 두 작품과 색감이나 빛의 표현 등이 유사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밀레의 두 작품에 비해 유명세가 덜한데 그 이유는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으로 취급되다가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극적으로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자비심

밀레의 편지나 일기등을 통해 그렸다는 기록만 존재하고 그림의 실체가 없어 '잃어버린 명화'로 여겨졌던 이 그림은 벤더필드 가문의 개인소장품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다. 벤더필드가문은 네덜란드 이민자 출신으로 배 1척으로 출발해 미국 해운업, 철도산업을 장악한 철도왕 가문이다. 3대 벤더필트의 무능과 호화로운 생활로 가문은 기울기 시작하고 세계 2차대전이후 교통수단이 다양해 지면서 철도산업이 쇠퇴함과 동시에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벤더필드 가문의 몰락덕분에 개인소장품들이 벤더필드 컬렉션을 통해 정리되는데 이때 밀레의 자비심이

극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삭줍는 사람들


이삭줍는 사람들, 오르세

1854년 세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던 것을 각색하여 3년 뒤 다시 그린 작품으로 밀레의 작품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여인들은 허리를 구부린 체 밭의 이삭을 줍고 있는데 추수하고 난 뒤 밭고랑에 떨어진 이삭이라도 주워가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으면 이삭을 주울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소작농보다도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이삭을 주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1848년,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나고 같은 해 마르크스-앵겔스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다. 밀레가 농촌의 삶과 농부들의 고단함을 그림으로 표현하던 시기는 사회주의의 물살이 거세던 시기로 하층민의 삶을 그려낸 밀레의 그림은 좌파세력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지독한 가난끝에 서서히 명성을 얻게 된 밀레의 변명인지 모르겠으나 정작 밀레 자신은 이념과는 관계없이 보이는 대로를 그릴 뿐이라고 선을 긋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좌파라 하면 종북 또는 빨갱이로 지칭되곤 하는데 본래 좌파, 우파의 의미는 프랑스 혁명 이후 소집된 국민회의에서 의장석에서 바라본 우측에 왕정을 옹호하는 왕당파가 앉고 좌측에는 공화정을 주장하는 공화당이 앉은 데서 유래된 것이다. 좌파가 반드시 사회주의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와 진보의 개념으로 볼 때 당시의 좌파는 공산당선언 또는 사회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삭줍는 사람들 데셍, 한국의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데셍을 비롯한 이삭줍는 사람들이 전시된다고 한다.

만종

만종, 오르세

미국의 거부 토머스 G.애플턴의 청탁으로 1857년 완성한 이 그림의 첫 제목은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그로부터 몇년 뒤 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며 개인 구매자에게 판매하려던 그림이 공개전시되는 상황에 이르자 밀레는 그림을 고쳐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모양을 바꾸거나 그림의 제목을 바꾸기도 한다. 혹자는 밀레가 좌파로 오인되는 정치적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썼는데 만종의 변화도 그 중 하나라고 한다.


만종을 두고 일어나는 가장 흥미로운 논란 중 하나는 감자바구니이다. 초기에 밀레가 그림의 제목을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로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자바구니는 애초에 아기의 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더욱이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까지 나서서 여러 논문을 통해 감자바구니가 아닌  아기의 관이라는 주장에 힘을 보탠다. 급기야 밀레의 만종은 X-Ray 투시를 거치게 되고 감자바구니를 그리기 전 관모양의 스케치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감자바구니가 아닌 아기의 관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케치 과정에서 이 그림을 본 밀레의 지인의 충고 혹은 밀레 스스로의 자각으로 좌파로 몰릴 것을 우려해 감자바구니로 고쳐 그렸고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제목을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는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이 사실주의 화풍과 맞물며 많은 화가들이 하층민의 삶을 극도로 사실적인 표현으로 담아 논란이 일기도 하는 등 사실주의와 사회주의의 혼재로 미술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던 시기다.


감자바구니로 감자의 수확을 감사하는 기도하는 농부의 모습을 그린 것이든, 죽은 아기를 묻고 애도하는 가난한 부모의 모습을 그린 것이든 지금에서야 정확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밀레의 만종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달리가 새로 그린 만종

밀레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만큼이나 후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가 밀레를 흠모했던 달리며, 노골적으로 흠모를 드러냈던 고흐가 있다. 우리나라의 박수근도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밝힌 바 있다.


고흐는 밀레가 죽은 후에도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고 그의 작품을 모사하며 밀레를 흠모했다.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은 21번, 낮잠은 9번을 그렸다 하니 밀레에 대한 고흐의 마음이 어느정도였는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하지만 고흐가 그린 밀레의 그림들은 이뿐만이 아니니 밀레와 고흐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


밀레의 낮잠, 보스턴 미술관
고흐의 낮잠, 오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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