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투알과 계단을 오르는 무희들
13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탄생한 발레는 피렌체의 유명한 메디치가문의 딸,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면서 프랑스왕궁으로 전파된다. 카트린느는 훌륭한 발레 무용수이자 애호가였으며 병약한 세 아들을 대신해 그녀가 섭정을 하면서 프랑스 왕궁의 발레는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카트린느 섭정왕후 이후 앙리3세, 루이 13세 등 꾸준히 프랑스 국왕의 사랑을 받으며 발전하던 프랑스 궁정발레는 루이14세가 왕립무용학교를 건립하며 절정에 달한다. 무용학교출신의 전문 무용수들이 대거 양성되면서 궁정중심이 아닌 대중에게로의 발레가 시작된다.
오랜기간 융성했던 발레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발레의 쇠퇴기가 오지만 19세기 낭만주의에 힘입어 발레는 다시 피어난다. 수많은 예술분야를 통틀어 발레만큼 낭만적인 분야가 또 무엇이 더 있으랴! 그 유명한 지젤은 이 시기 낭만발레의 대표작품이다. 이후 러시아 표트르대제의 프랑스문화 넘어서기정책의 일환으로 발레의 중심지는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넘어가게 된다.
19세기 프랑스로 돌아와 보자. 이전의 궁정발레에 비해 주인공과 내용이 다양해지는 등 내적인 개혁이 이루어 졌음은 물론 외적으로는 발레복의 길이가 짧아지고 튀튀를 입었음에도 하체의 윤곽이 비치는 얇은 의상을 입게 된다.
발레가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대중화란 궁정밖으로 나왔다는 의미이지 사전적의미에서의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다. 이는 궁정밖으로 나온 발레를 즐기는 계층은 신분이 높거나 재력이 상당한 대중과는 거리가 있는 남성이 대부분이라는 의미다.
당시의 여성이라면, 특히 교양있는 여성이라면 다리를 드러내는 것을 수치로 여기던 시절, 다리를 드러내고 사람들앞에서 무용을 해야했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대게 명망있는 가문의 자제는 아니었을 뿐더러 이 일은 어지간히 먹고 살만한 집만 되어도 꺼리는 일이었다.물론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발레에 매진한 여성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게는 그러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무용수들,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 이들의 몸짓을 즐기는 재력있는 남성들의 조합은 오늘날 연예계에 풍문으로 나도는 스폰서와 비슷한 관계들을 만들어 냈다. 최고로 꼽히는 몇몇 무용수를 제외하고는 몸을 파는 여인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아름다운 여인의 욕망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품으려는 남성의 욕망이 서로 맞물린 일련의 관계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두운 저곳 깊숙히 꿈틀거리고 있다.
한국어로는 발레리나라고 이름붙인 드가의 대표작 중 하나 에투알, 오르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에투알은 본래 L'etoile는 유명스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발레용어로는 제1무용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기 무용수를 부르는 말이다.
발레를 하는 무용수들에게는 회사조직의 직급과도 같은 일종의 계급과 명칭이 별도로 존재했는데 남녀 각 1인에게만 부여되는 제1무용수,제1무용수가 되기 직전의 쉬제가 있다. 4,6 또는 8,12명으로 그룹을 이루어 춤을 추는 서포터들은 작은 쉬제라고도 한다. 간혹 제1무용수와 쉬제 사이에 솔리스트를 두는 경우도 있는데 배역이 없음에도 솔로로 춤을 출 수 있다. 예컨대, 백조의 호수에서 파 즈트르와나, 두 마리 백조 등을 솔리스트가 맡는다.
가장 많은 인원이 그룹을 이루어 춤을 추는 경우는 코피레와 카드뤼를 총칭해 코르 드발레라고 하는데 러시아 발레에서는 솔리스트 바로 아래, 프랑스의 쉬제에 해당하는 역할을 코리페라 한다. 카드뤼도 제1,제2 카드뤼로 나누기도 한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발레단이 부르는 용어가 다른데다 같은 이름으로 다른 대상을 부르기도 하여 다소 혼한스럽가는 하나 단 하나의 제1무용수를 발레리나라고 한다. 오늘날 발레를 하는 모든 여성을 발레리나라고 부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각 극단에 존재하는 제1무용수, 발레리나들 중에서도 최고의 스타가 에투알이다.
에투알이 얼마나 대단한 자리의 무용수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발레의 계급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는데 이렇게 대단한 최고의 스타무용수를 드가가 그렸다.
드가의 그림 속 에투알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데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지 우리의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 무대 위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는 시선으로 당대 최고의 스타무용수를 그리고 있다. 무대 위 높은 곳은 아마도 귀빈석으로 추측된다. 귀빈석의 누군가가 에투알을 내려다 보고 있다. 그 시선에는 욕망이 베어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은 과한 상상일까?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에서 드가의 에투알을 타락한 파리의 발레라는 관점에서 분석했는데 이 책에서 나카노는 에투알을 창녀로 보고 있다.
에투알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은 그녀의 무대 뒷편 검정 구둣발의 사내의 시선이다. 나카노는 구둣발의 사내가 그녀에게 돈을 지불하는 스폰내지는 성구매자로 보고 있다.
아름답기만 했던 드가의 그림들에 대한 환상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다. 실제로 드가는 무용수들의 연습모습, 무대위 또는 무대 뒤의 모습까지 다양한 그림을 남겼고 조각도 남겼다. 그의 작품 중 절반이 무용수를 그린 그림이란다. 이 모든 작품에 깔려 있는 드가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다 보면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상대적 약자에게 얼마나 많은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담고 있는지 놀라게 된다. 드가 역시 혁명적인 선각자가 아닌 이상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무용수를 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간혹 비평가들은 드가의 그림에 무용수들을 향한 은밀한 시선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하여 드가를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그림을 그리던 예술가에게 시대의 과오를 먼저 깨닫고 각성했기를 바라는 후대의 어줍지않은 참견은 아닐까? 이 시대의 드가가 그린 그림에서 발레리나에 대한 시선이 창녀와 동일한 시선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비판의 대상이 되겠지만 그 시대의 드가라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그의 시선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일설에서는 어린 시절 드가는 어머니의 외도를 목격하고 이로 인해 아버지와 집안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하고 여성험오가 생겼다고도 한다. 이들은 드가의 그림에 나타나는 여성들이 얼핏 보면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의 형태가 불분명하거나 심지어는 추악하게 그리기도 했다는 것을 증거로 삼는다. 드가가 마네에게 그려준 마네 부부의 그림에 그려진 마네 부인의 추한 얼굴을 보고 화를 내며 얼굴부분을 찢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일로 형제와도 같이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은 인연을 끊게 된다.
일종의 시대적 사회적 한계라고나 할까, 만일 드가의 그림에서 무용수들에 대한 시선이 보다 진보적이었다면 드가의 그림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그의 각성된 시선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칭송받았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