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바깥놀이
1월도 끝자락을 향해 달려간다.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설렘과 부담으로 시작한 1월이 저물어 가면 왠지 곧 봄이 올 것 같은 기다림, 3월 새학기를 앞둔 설레임이 기다리곤 했다.
한국에서 이 시기는 새로운 것들을 기다리기 시작하는 지점이었지만 핀란드로 이사한 이후의 1월은 그저 하얀 세상일 뿐이다.
9월 학기제에 9학년제도인 이곳에서 6학년을 마치는 딸의 2월과 3월은 한국의 친구들이 맞이하는 졸업식, 입학식과는 상관없이 그저 여전히 추운 어느 날일 뿐이다.
특별할 것도, 기다릴 것도 없는 1월이지만 하얀 솜이불을 덮어 씌운 듯 눈길 닿는 곳 모두가 하얗고 포근한 이곳에서 1월의 눈을 즐긴다.
12월의 하루하루가 어둡고 음습했다면 1월의 하루하루는 빛나고 화창하다. 물론 특별히 일조시간이 길어진 것은 아니지만 한낮의 세상만큼은 하얗게 내린 눈이 얼고 그 위에 또 내려앉은 눈이 햇살에 반짝이는 밝고 밝은 아름다움이 있다.
모처럼 침대시트를 벗겨 세탁을 하고 모든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대청소를 했다. 하얀 기운이 집안으로 습격하듯 찬 공기와 함께 치고 들어온다.
상쾌하다. 이웃님들은 썰매와 크로스컨츄리스키를 챙겨 산책을 한다. 눈이 오지 않는 날이 눈 오는 날보다 드문 이곳에서의 일상이다.
눈이 많이 내려 걸어서 식료품점까지 갈 수 없을 때는 스키를 타고서라도 먹을 것을 구해왔어야 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에게 스키는 취미와 오락이라기 보다 생존을 위한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창고에는 크로스 컨츄리 스키가 가족 수대로 구비되어 있다.
학교 체육시간에도 스키를 타러 가곤 하는데 핀란드에서 나고 자란 딸들 또래의 아이들은 이미 능숙하게 잘탄다. 그도 그럴 것이 걸음마시작하고 나면 이내 두발 자전거를 배우고 스케이트와 스키를 배우기 시작하니 열살이 넘었다면 이미 고급자다. 크로스 컨츄리 스키가 처음인 딸아이는 체육시간에 친구들이 산넘어 숲속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평지트랙에서 뱅글뱅글돌면서 지루하게 연습을 해야만 했단다. 친구들과 체육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던 딸을 돕기 위해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스키장을 찾아갔다. 장비가 없어도 1유로의 저렴한 가격에 모든 장비를 대여할 수 있는 무료 스키장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축구장에 물만 뿌려놓으면 아웃도어스케이트장으로 변해 주민들이 무료로 이용하고 눈이 내리기만 하면 썰매장, 스키장이 되는 마을 이곳저곳은 천연의 놀이터가 된다.
햇살이 반짝이는 1월의 주말마다 딸들은 친구들과 함께 자연이 허락한 놀이터에서 땀을 흘리며 놀곤 한다. 부지런히 청소를 마무리하고 보온병에 딸기차를 담고 장갑과 스키바지 등 방한용품을 챙긴다. 오늘도 스키장에 가기로 했으니까!
이제는 제법 잘타게 된 딸아이는 친구와 짝을 지어 산 속으로 들어간다. 언덕도 척척 오르고 평지는 사뿐 사뿐 달리듯 미끄러져간다.
지겨울 때까지 스키를 타고 나면 썰매를 타고 언덕에서 쏜살같이 내려온다. 썰매가 뒤집혀 눈밭에 굴러도 마냥 즐겁다. 추워서가 아니라 더워서 볼이 발그레해지는 핀란드의 겨울이다.
피크닉에어리어에서 어느 가족이 쏘세지를 굽고 있다. 챙겨온 도시락을 펴서 테이블 한 쪽에 자리잡으니 쏘세지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하나하나 은박지로 돌돌 말아 싸온 핫도그를 데워도 되겠느냐 묻고 아저씨의 쏘세지 옆에 나란히 놓는다.
핫도그가 데워지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지난 추억을 되짚어 본다.추운 바깥에서 무언가를 먹어 본 적이 있던가? 어릴 적 논밭에 물을 뿌려 얼려 만든 스케이트장 한 켠 비닐 하우스, 그곳에서 먹던 오뎅과 쥐포가 생각난다. 그뒤로는 바깥에서 찬 공기속맞으며 무언가를 먹은 기억이 없다. 비닐하우스에서 먹었던 그 오뎅, 정말 맛있었는데... 하마터면 딸들은 추운 바람 속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추억을 경험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핀란드의 차가운 공기도 길기만 한 이 겨울도 새삼 고맙게 느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