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과 주변인물들
고흐는1886년 부터 죽을 때까지 약 30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일설에는 인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돈이 없어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고도 한다. 사교에도 능하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를 그리며 인물화그리기에 열정을 태웠던 모양이다.
초기의 초상화는 고흐의 초창기그림이 그러하듯 자화상 역시 어두운 분위기이다. 고흐 특유의 화법이 완성되기 전의 그림들이라 짧은 선이 거칠게 드러난 붓질을 찾아볼 수 없다.
1887년의 자화상들은 조금씩 고흐그림의 특징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선을 짧게 끊어 그린 붓의 느낌이 살아 있고 색감의 변화도 보인다. 맨 윗줄의 87년 자화상 석 점은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약 20점 가까운 자화상과 스케치를 감상할 수 있다. 고흐얼굴 많이 봐서 정들지도 모르겠다.
붓을 들고 있는 이 그림은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또다른 자화상으로 87년에서 88년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고흐의 그림습관을 보여주는데 그가 들고 있는 붓을 보면 예닐곱개의 붓이 모두 비슷한 사이즈다. 당시 고흐그림에 나타나는 붓질과 일치하는 사이즈로 보인다. 붓을 들고 있는 다른 자화상도 있지만 붓의털까지 붓전체가 드러나 붓사이즈를 가늠하게 하는 그림은 이 그림뿐인 것 같다.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잘랐다는 엄청난 일화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붕대를 감은 고흐의 자화상이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이 자화상은 생레미정신병원에서 그린 것으로 고흐의 수많은 자화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내 영혼에까지 감동을 주는 것은 오직 인물뿐, 인간을, 살아 있는 존재를 그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 같이 밝혔음은 물온 스스로 인물화가로 자청했다. 그가 정물화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인기있는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초상화 주문이 들어오는 일도 매우 드물었고 모델료를 지급할 충분한 돈도 없었으며 에곤 쉴레처럼 몸바쳐 모델이 되어주는 연인도 없었던 고흐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모델이 될 것을 부탁하여 종종 그들을 그리기도 했다. 주변인 중에서도 고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델이 되어 준 얼굴들이 있다. 아를로 옮긴 고흐의 삶에 따뜻한 영향을 끼쳤던 우체부 룰랭가족과 오베르에서 고흐의 치료를 담당했던 가셰박사가 이들이다.
룰랭가족을 그린 고흐의 그림들이다. 안타깝지만 룰랭부부를 직접 감상하려면 일단 아메리카로 가야 한다. 왼쪽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차례로 보스톤, 뉴욕현대, 디트로이트, 필라델피아, 시카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이 다섯곳에 모두 가보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넓은 미국대륙을 수십시간씩 운전해 주곤 했던 남편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내야 겠다.
다행스럽게도 룰랭의 아이들은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수 있다. 왼쪽은 Camile이고 오른쪽은 룰랭부인이 안고 있는 아가 Marcelle이다.빨간 배경의 소년 그림은 학생이라는 제목의 그림인데 그려진 시기와정황들로 보아 Camile로 추정된다. 다만, 나의 경우 이 그림은 이생에서 보지 못할 것 같다. 브라질 상파울로에 있는데 남편은 절대로 방문하지 말자 정한 몇몇 지역이 있다. 그중 하나가 브라질이니 남편과 함께 사는 동안에는 가기 어려운 곳이다.
룰랭가족이 마르세유로 이주한 뒤에도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가까이 살며 오가던 시절에 비하겠는가! 고흐는 테오가 있는 파리로 건너가지만 여의치않아 불과 몇일만에 파리를 떠나 오베르로 향한다.
테오의 소개로 오베르에서 가셰박사를 만난 고흐는 지독한 정신병에 시달리면서도 가셰박사에게 치료를 받으며 또 동시에 교제하며 안정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어쩌면 고흐일생에 있어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테오와 돈문제로 심하게 다툰 고흐가 유일하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가셰박사였을 것이다. 수도 없이 많은 스케치를 하고 그려낸 가셰박사의 초상화는 그림이 완성된 백년만에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상최고가를 기록하며 판매된다. 이 그림을 사들였던 사이토 료에이는 자신이 죽으면 자신이 소장했던 고흐와 르느와르의 그림을 함께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전 세계를 발칵뒤집었다. 미술계 인사들의 강력한 반발로 이 유언은 취소되었으며 이제는 새로운 주인의 품속에 숨어 있다. 소장가가 전시나 공개를 원하지 않고 있어 우리는 실물작품을 감상할 수는 없다. 누구는 타국의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조차 쉽게 감상할 수 없는 판국에 또 누구는 혼자만 숨겨놓고 감상할 수 있다니 세상살이가 참말이지 공평치 못하다. 하긴 세상살이에 공평함을 운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소장가의 자비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오르세미술관에 가면 가셰박사의 초상을 감상할 수 있다. 위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가셰박사는 ' 지누부인의 초상 ' 같은 느낌을 원한다며 자신의 초상화가 만족스럽지 않음을 표현했고 고흐는 두번째 초상화를 그렸다. 모두 그가 자살하던 마지막 달의 일이다.
지누부인은 누구인가? 지누부인은 고흐가 고갱과 같이 살았던 노란 집 1층의 카페 여주인이다.아를은 그림을 그릴 만 한 것들이 많아 평생을 살아도 되겠다며 즐거워했던 고흐를 떠올려 보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람들과 교류하며 얼마 되지 않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시기가 아를의 시기인 듯 하다. 고흐는 이 카페의 여주인을 총 여섯 번 그렸는데 1888년에 두개, 1890년 귀를 자른 이후에 네 번을 더 그렸다고 한다.
고흐는 지누부인을 그리면서 앞에 책을 두 권 그렸는데 함께 지내던 고갱은 카페여주인과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마땅치않아했다고 한다. 고갱 역시 지누부인을 그렸는데 고갱의 지누부인은 카페의 모습과 부인을 함께 담고 있다.
두 권의 책이 아닌 카페테이블과 잔, 뒤로는 당구대와 손님들, 어느 것이 실제 지누부인의 모습과 닮았을까는 우리 상상의 몫이다.
참고로 두 권의 책은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헤리엣 비쳐 스토우의 <엉클 톰스 케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