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멘린나, 헤메캐슬로 떠나는 시간여행
헬싱키에서 차로 한 시간, 헤멘린나를 찾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유럽으로 들어오는 허브공항으로 stopover를 하거나 스웨덴, 덴마크 등과 함께 핀란드여행이 아닌 북유럽여행을 하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헤멘린나에 까지 관심을 두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헬싱키로 교환학생을 온 경우 당일치기여행지로 헤멘린나에 들리거나 하루키의 팬임을 자처하는 몇몇 여행객이 기어이 시간을 내서 헤멘린나에 들르는 경우를 가끔 보았을 뿐이다.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다 보면 주인공이 과거의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어느날 갑자기 거대한 벽을 마주하게 된 사연을 되짚어 보는 순례지로 헤멘린나가 등장한다. 헬싱키까지 찾아갔지만 친구는 휴가를 맞이하여 헤멘린나의 summer house로 떠난 뒤다.
다자키 쓰쿠루는 이런 사정으로 예정에도 없이 헤멘린나로 향했지만 사실 하루키의 팬이라서 헤멘린나를 찾을 만큼의 의미가 소설속에 녹아있지는 않다. 그저 친구의 summer house가 헤멘린나에 있다는 것뿐, 헤멘린나가 아닌 그 어디여도 상관없을 정도의 묘사와 존재감이다. 핀란드는 국토가 넓고 숲이 많은 반면 인구가 매우 적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숲에 집을 지어 살아 왔기에 숲에는 지금도 빈집처럼 보이는 집들이 많이 있다.
지금은 도시로 나와 사는 어떤 이들이 어릴적 살았던 혹은 놀러갔던 할아버지댁을 손질해서 summer house로 사용하기도 하고 경치좋은 곳의 빈집을 사서 수리한뒤 summer house로 이용하기도 한다. 큰 도시에서 멀지 않고 경치가 좋을수록 좋다. 하지만 핀란드의 도시는 어디라도 이삼십분만 벗어나면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경관이 아름답게 펼쳐지기에 어느 도시, 어느 숲에라도 summer house는 가족들이 찾아오길 바라며 여름을 기다린다. 우리식으로 여름별장이라고 바꿔 부르기 어색한 핀란드의 summer house다. 별장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한 곳이며 일상적인 곳이다. 주인공의 친구도 여름을 맞이하여 summer house에서 산책을 하고 수영을 하는 여름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헬싱키를 떠나 헤멘린나로 간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친구의 summer house를 둘러싼 숲에 관한 이야기가 길을 찾는 과정의 묘사중 잠시 나오고 광장의 작은 시장에서 체리를 사먹는 모습이 묘사된다. 핀란드의 도시에는 크건 작건 광장이 있고 그곳에는 시장이 열린다. 헬싱키 관광객들이 꼭 찾아가는 마켓광장은 헬싱키의 마켓광장이고 주인공이 찾은 곳은 헤멘린나의 마켓광장이고 우리 마을 투르크에도 마켓광장이 있다.
이것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헤멘린나의 전부다. 헤멘린나라는 이름대신 핀란드 어느 도시의 이름을 넣어 보아도 관계없을 만큼의 존재감이지만 하루키의팬들은 하루키에 대한 애정으로 헤맨린나를 찾았으며 그들의 방문기를 보자면 하루키때문에 그곳에 다녀온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 눈치다. 애정이 있고 애정을 토대로 행하였으니 그 성의는 인정해 줄 일이기도 하다.
헤멘린나에는 13세기 말에 지어진 중세의 성이 남아 있다. 하루키의 팬이 아닌 내가 헤멘린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성때문이다. Vanajavesi 호숫가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Hame castle, 부활절 무렵에는 성앞에 부활절 장이 열리고 성의 입장료도 무료이다. 한여름에는 중세마켓이 열리고 축제가 한창인 곳, 헤멘린나
붉은 벽돌의 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요새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 마을에 있는 투르크성과는 또 다르구나...
햇살이 쏟아지는 Hame castle 구석구석에 칼바람이 꽂힌다. 우리가 상상하는 봄날은 노곤할 정도로 따스하고 부드럽지만 내가 겪고 있는 봄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오랫동안 그려왔던 유럽의 성은 동화속 공주님이 어여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로맨틱한 성의 이미지였지만 이곳 핀란드에서 만나는 성들은 하나같이 묵직하고 견고하다. 두꺼운 성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 뒤에야 햇살이 쏟아지고 파란 하늘이 싱그러운 아늑함을 선사하는 것이 마치 핀란드사람들의 속내처럼 다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