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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Jun 21. 2017

뮤지컬의 중심, 런던 피카딜리 & 내 추억속  피카디리

중학교 졸업을 앞둔 해 겨울, 난생 처음 어느 남학생과 극장을 찾았다. 복합상영관도 간단한 예매시스템은 물론 극장 자체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단성사, 대한극장, 피카디리 극장 정도가 그 시절의 영화판을 주도하던 개봉관으로 기억된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극장에 찾는 일은 좀더 잦았다. 학교앞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만 시내로 나가면 종로였고 아직 학과공부에 매진하기 전인 신입생시절에는 종로의 어학원에서 매일 아침 친구와 함께 중국어강좌를 들었기 때문에 학원 오가는 길에 극장표를 사두고 종이에 인쇄된 상영시각을 몇번이고 확인하며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극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중에서도 피카디리 극장은 다른 극장에 비해 조금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극장앞 아주 작은 사각형의 공간에 간판을 올려다 보며 서있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피카디리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른다.


핸드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삐삐라고 불리우던 호출기가 이제 막 사업하시는 좀 잘나가시는 사장님들의 허리춤에서 벗어나 대학생들도 아르바이트를 통해 장만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에 극장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이가 상영시각에 늦지나 않을까 먼저 온 친구는 그 작은 회색빛 블록 위에서 친구를 혹은 연인을 기다리곤 했다.


내 청춘의 피카디리 광장이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시절, 해외여행 경험 자체가 귀했던 시절, 피카디리 극장앞에서 런던의 피카딜리를 연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나는 피카디리를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런던에서 가장 활기찬 공간이라고도 하는 피카딜리서커스는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닮은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타임스퀘어보다 오랜 세월을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자리에 있었건만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마치 피카딜리 서커스가 타임스퀘어를 닮았다고 느껴진다.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살았었다면, 딸들과 브로드웨이의 공연장보다 피카딜리의 공연장을 찾았었더라면 반대로 느꼈을까? 비단 시간의 순서만이 아니라 미국의 면면은 규모로 압도되어 버리는 면이 있기에 확신하긴 어렵다.


딸들과 함께 한 피카딜리의 추억은 브로드웨이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타임스퀘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퀸즈극장에서 레미제라블을 보겠느냐?', '오페라 유령을 보겠느냐?' 여러 뮤지컬 이름을 열거하며 내가 들러보고 싶은 극장들을 방문하길 희망했지만 딸들은 브로드웨이에서 이미 다 봤으니 아직 보지 못한 공연을 보고 싶다며 위키드를 보자고 제안한다.


미국에서 살던 3,4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보기 좋은 라이언킹이라던가 애니같은 공연을 먼저 보았을 테지만 그 사이 아이들은 자랐고 경험도 쌓였다.어린이를 위한 공연이 아니어도 같이 즐기기에 충분할 만큼...


라스베가스의 위키드스푼에 갔을 때부터 보고 싶었다고 하는데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하필 위키드냐, 위키드 전용관은 피카딜리에서 벗어나 버킹검궁전너머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으로 가야 하는데 말이다!!! 얘들아, 피카딜리에서 공연을 보잔 말이다!!!!!


엄마가 이끌고 다니는 여행이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어 엄마가 원하는 레미제라블과 딸들이 원하는 위키드를 관람하기로 했다. 오페라유령은 너무 많이 보아서 그만 보자고 선을 그었기에 덜 많이 본 레미제라블의 카드를 던졌고 다행스럽게도 딸들이 받아주었다. 일단은 위키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너그러워지기도 했을 테고 너도 나도 인증샷을 남기는 퀸즈극장의 위엄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피카딜리 서커스일대 관광중에 일단은 딸들도 인증샷을 남겼다.


타임스퀘어 같아~

하하하 레고매장이랑 M&M도 있네, 토이저러스만있으면 똑같겠다.

아니야, 삼성이랑 엘지간판없쟎아....

뭐야, 쉑쉑버거는 왜있는거야


아이들도 피카딜리 서커스의  분위기가 타임스퀘어와 비슷하다 느끼는가 보다.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양대산맥으로 우뚝 서 있는 피카딜리의 매력은 타임스퀘어를 닮은 열기가 아니라 단연 공연의 질이다. 지금은 조금 사정이 달라졌지만 불과 십수년 전만해도 한두명의 유명배우가 모든뮤지컬의 남녀주인공을 맡아 공연했었다. 주인공의 엄마나 친구역할도 늘 같은 이들이었다.


어느 공연을 보아도 같은 이미지의 남녀주인공은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주었고 같은 톤의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연출과 무대장치 등의 미흡함을 느끼기도 전에 극의 몰입이 어려웠던 기억이 위키드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 떠올랐다. 초록얼굴의 마녀역에 최적화된듯한 얼굴과 체형, 그리고 빛나는 목소리... 실제 그녀는 위키드역만 수천 번을 연기한 위키드자체이다.



노래 한 곡, 한 곡마다

배우 하나 하나의 몸짓마다 감탄과 탄성을 자아냈던 명품공연... 고작 열두해 남짓 산 딸은 감동으로 울먹이며 본인 인생 최고의 공연자리를 위키드에 내주었다. 적어도 딸아이의 세계에서는 브로드웨이가 피카딜리에 밀렸다. 내 추억 속의 피카디리는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이었지만 딸아이 추억 속의 피카디리는 런던이 되겠구나... 이런 글로벌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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