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방법
나의 오늘, 이 시간이 죽기 직전의 내가 떠올리는 가장 소중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나의 글은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어린 시절 꾸었던 작가라는 꿈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내 글을 구독하며 공감하고 누군가는 나를 작가님이라 부르고 어느 출판사 편집장님과 책을 발간하기 위해 미팅을 하고 목차를 정하며 글을 추리는 작업을 하면서 “작가”는 농염할 정도로 매혹적이지만 그에 맞서는 처절함이 공존하는 이름일 것이라 여겼다.
나는 나의 일상, 상념 그리고 여행의 순간들을 기록할 수 있었고 수년이 지난 지금, 첫사랑의 기억만큼이나 아련하게 그 시절의 나를, 나와 함께한 모든 것들과 시공간을 추억하며 곱씹을 수 있게 되었다.
서른이 되던 해, 그 해 겨울은 몹시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흔한 농담으로 계란 한 판, 꽉 찬 나이인 서른의 나는 인생의 계단 하나를 오른 듯했다.
그리고 윤석렬나이니 만나이니 이 나이, 저 나이 다 동원해도 쉰이 넘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고 서야 반백이라는 말이 다가왔다.
스물을 넘겨 빛나는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이 된 큰 아이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스물이 된 둘째를 지켜보면서 반백살의 나는 이들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이십 대의 나를, 이 아이들을 낳고 기르던 삼십 대의 나를, 미국과 핀란드를 오가며 외롭지 않은 이방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다른 관점에서는 경단녀로 나이 들어 버린 나를 다시 내 이름 석자로 사람을 만나고 돈을 벌고 세금을 걱정하는 나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사십 대의 나를 한 순간 한 순간 돌아보았다.
기억이 희미하다. 왜곡된 기억도 소실된 기억도 많을 것이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나는 지금부터의 나를 기록하기로 했고 나의 기록은 반백살의 버킷리스트라는 나의 인생 후반전의 첫 프로젝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