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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스 Mar 30. 2016

바르셀로나 구석구석 뒤지기

세 번째 이야기 몬주익 언덕

1992년 여름,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육상에서 금메달 소식이 들려온다. 올림픽의 꽃이라 하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이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도 유명한 손기정선수의 한국인 첫 올림픽 금메달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황영조 선수는 몬주익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었다.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마라톤 벌판에서 부터 아테네까지 달렸던 병사의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법한 유명한 이야기다. 학창 시절 영어교과서에도 지문으로 실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마리톤의 th발음이 번데기발음이니 하며 쥐꼬리발음 th발음과 뒤섞여 시험문제로 종종 출제되던 마라톤, 아니 매러썬(떤), 혀를 살짝살짝 내밀며 시범을 보이시던 영어선생님의 모습도 기억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번데기발음은 여전히 후지다. 딸들은 잘하던데...


우리가 알고 있듯 이때 그 병사가 달렸던 거리는 42.195km가 아니라  이설이 있기는 하나 40km가 조금 안되는 거리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테네 첫 대회부터 40km를 마라톤 거리의 표준으로 삼았으나 42.195km의 긴 코스는 런던대회이후 자리잡게 된다. 에드워드7세가 발코니에서 경기를 관람하고 싶다고 하여 40km를 기준으로 당초 세웠던 코스대로 선수들이 윈저궁앞을 지나지 않고 정원으로 들어와 달려야 했기 때문에 마라톤 경기 코스가 길어졌단다.


그렇게 황영조선수는 42.196km을 달렸고 뜨거운 바르셀로나 태양아래 가파른 몬주익 언덕을 달리고 달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행정보를 조사하던 중 많은 여행자들이 케이블카를 타고도 한참 올라가는 몬주익 언덕의 괴로움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걸어올라가는 용감한 분도 계시더라만 열흘간의 일정 대부분을 도보여행으로 계획했던 나는 가족의 체력안배를 위해 버스를 타고 몬주익 성까지 올라갔다가 걸어 내려오는 길에 올림픽 경기장을 들르기로 한다.

몬주익 성에서는 바르셀로나 전경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멀리 파밀리아성당도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적으로 부터 지키고자 대포도 설치되어 있다. 아이들은 대포안이 궁금하다. 어떻게 이곳을 통해 포환이 발사되는지, 그 무거운 포환이 어떻게 멀리까지 나가는지, 어떤 원리로 포환이 터지는지 궁금한 것 투성이다. 이럴 땐 아빠가 필요하다. 선박박물관, 우주박물관 등에 가면 빛을 발하는 아빠의 과학적 상식과 20대를 모두 불살라 십년 넘게 공부한 과학도의 지식은 아이들에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 30대는 연구원으로서의 십년을 보냈으니 본인 말로는 공학자, 아이들말로는 과학자아빠다. 대포를 들여다 보며 한참을 이야기하는 그들을 바라본다. 대포가지고 할 이야기가 저리도 많은지...엄마는 잠시 쉰다.

햇살이 너무 좋아 태양빛을 받으며 꿀같은 일광욕을 즐긴다. 1월의 핀란드는 어둡다. 이 햇살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모른다.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도 굳이 올림픽주경기장을 찾아가지 않는 편인데 이제와 잠실주경기장이 무슨 의미인가 생각해 보면 굳이 그 도시에서 올림픽을 개최했기 때문에 남아있을 뿐인 경기장을 보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이미 수많은 올림픽이 열렸고 경기장 역시 세계에 산재해 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에 들른 이유는 바로 황영조선수의 기념비때문이다.

올림픽 경기장 입구 맞은 편에 황영조 선수의 부조가 세워져 있고 발바닥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미니버스나 승합차에서 우르르 내려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는 우르르 다시 탑승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여러 팀 볼 수 있다. 다른 버스에서 내린 한국인들이나 먼저 와서 한참을 앉아있는 우리에게나 그 누구도 서로 인사하지 않는다. 타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운 것이 인지상정이라 생각했는데 관광지에서는 예외가 되는 모양이다. 수십 혹은 수백개의 여행지를 다니면서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고개를 돌리거나 못본 척 하는 한국인들을 수없이 경험했다. 내가 무섭게 생겼나? 고민도 해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내 외모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안심

황영조 선수의 공식사이트에서 가져온 사진. 태극기 뒤로 황영조 선수의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황영조 선수의 달리는 모습을 따라 그의 옆에서 사진을 찍고는 버스에 몸을 싣고 또 어디론가 달려가는 그들을 멀뚱히 바라다 본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떠나고 나면 다소 한적한 그 언덕의 벤치에서 주섬주섬 간식거리를 꺼낸다. 1월인데도 볕이 좋다. 한 여름 그 뜨거운 태양아래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곳을 달리고 달렸을까



황영조 선수의 은퇴 후 비난과 구설수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어쨌거나 그는 영웅이고 천재다. 우리 나라는 사회체육의 기반이 약하고 약간은 정치적인 의도로 스포츠가 이용되고 있기에 탄탄한 선수층 혹은 체계적인 체육인 양성의 결과가 아닌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에 의존하여 국민들이 기뻐하고 환호한다.


박세리 선수가 그랬고 김연아 선수가 그랬고 박태환 선수가 그랬고 황영조 선수가 그랬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웅이자 본인과 가족의 희생과 땀으로 성장한 외롭고 고단한 천재들이다. 이들 덕분에 해당 스포츠의 팬층이 생기고 수많은 키즈가 생겨나고 부족하나마 사회적 관심과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고 딸들은 피겨를 시작하게 되었다. 비록 올림픽이나 선수로서의 포부를 꿈꾸는 피겨꿈나무는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피겨는 훌륭한 취미이자 운동이다.


어제는 아이들이 운동하는 클럽의 정기 아이스쇼가 열렸다. 매 시즌마다 컨셉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짜서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부모와 친구앞에서 선보인다.

비싼 레슨비를 내고도 레슨시간 아니면 스케이트 신을 일도 없던, 통장에서 돈은 나가는데 아이들이 피겨를 하는지, 가서는 뭘 배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아빠도 한국에서는 흔하다. 경기장에 태워 나르고 스케이트화 끈을 묶고 빙상장에 들어간 아이의 레슨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수첩에 기록한다.  끊임없이 다른 부모들과 다음 연습일정을 위한 빙상장 대관 및 코치들과의 시간조율로 빙상장에 따라 나선 엄마들은 아이들의 손짓과 발끝에 미소지을 겨를이 없다. 레슨이 끝나면 아이의 발을 주무르며 지난 레슨에서 실수했던 것을 빼곡하게 적은 수첩의 내용을 기관총처럼 연사한다. 아이도 엄마도 굳은 얼굴이다. 한국에서 스케이트를 하면서 보아 온 빙상장 주변, 대기실의 풍경이다.


그들이 스케이트를 시작했으면 그들은 김연아같은 천재처럼 우뚝 서야 한다. 하지만 그런 천재가 어디서나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혹독한 채찍질과 인내만 남게 되는 스포츠 현장이 우리의 현실이다.


황영조 선수는 몬주익의 영웅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음을 내딛었을까? 사진만 찍고 황급히 떠나기엔 뭔가 아쉽고 애잔하여 한참을 더 머문다. 생각보다 그의 발은 작았다.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추측하건데 체격도 크지 않았으리라...


경기장을 둘러 본다. 저무는 태양빛 아래 경기장의 모습이 펼쳐진다. 황영조 선수의 단상이 남아서인지 경기장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인지 여타 관광객들마냥 사진만 좀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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