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유럽으로 간다

가난한 몸으로 마주한 스위스, 아름다웠다

by Aeree Baik 애리백


내가 탄 비행기는 뉴욕을 출발해 일단 런던에 내렸다. 다시 제네바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동안 짐을 끌고 다니느라 팔이 뻐근했다. 한쪽 바퀴가 빠져 있는 가방을 억지로 끌고 다니는 건 미련한 짓이다.

웬걸, 수년이 지난 후에야 그게 우둔한 짓이었단 것을 확신할 수 있다니.

뉴욕에서의 살림살이를 챙겨 오느라 가방이 무척 무거웠다. 앞으로 1년 동안 제네바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져와야 했다. 그래 봤자 당장 필요한 옷과 신발, 타월, 대용량 화장품, 책과 노트들 뿐이었다. 비용을 아끼느라 작은 여행 가방에 가장 무거운 짐들을 차곡차곡 쌓아 넣고 겨우 가방을 눌러 닫았다. 모든 일들의 기준은 비용 절감이다. 계획을 세울 때도 동선을 결정할 때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언제쯤 그 무엇이든 마음껏 허비해 볼 수 있을까.


뉴욕 공항에서 무게 제한에 걸리면 추가 비용을 내라고 할까 봐 긴장이 되었다. 두근두근. 수하물에 해당하는 큰 여행 가방은 허락된 무게를 정확히 맞추어 놓았다. 출국하는 날 공항 데스크에서 체크인하는 동안 약간의 꼼수를 썼다. 기내용 작은 가방은 가벼운 척 한 손으로 번쩍 들고 있었다. 어디 그것도 무게를 재보자고 할까 봐. 들고 있던 기내용 여행 가방이 마치 젖은 솜이불처럼 더욱 무거워진다. 누가 내 어깨를 마구 내리누르나?

무게 제한에 걸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수중엔 돈이 이백 달러밖에 없었다. 사실은 그게 전재산이었다.


‘여행 가방 하나 가볍게 들고 한국을 떠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달팽이처럼 짐을 이고 지고 무겁게 움직이게 되었나. 앞으로는 짐을 늘리지 말자. 또 어딘가로 떠나야 할지 모르니.’

천근만근 무거운 가방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유럽 땅을 밟았다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런던은 그렇게 정신없이 경유했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은 몸에 배어 때로는 충실히 즐겨야 할 많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 주변을 둘러보고 만끽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고정되어버린 태도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즐기고 만끽하고 낭비하는 것에 마음이 불편해질 만큼.


기내에서 영국 스튜어드는 불친절했다. 매사에 과장된 표현력과 친절함을 보이는 미국과는 온도차가 났다. 딱딱하게 음절이 끊어지는 강한 영국 엑센트도 흥미로웠다.


대륙을 넘어왔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시원한 콜라를 한 잔 받아 마시니 벌써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 됐단다. 이제 착륙 준비를 시작하니 좌석 벨트를 매라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니 이럴 수가! 이륙할 때 맸던 좌석 벨트를 아직 풀지도 않았는데..
런던에서 제네바까지 비행 거리가 겨우 1시간 20분밖에 소요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이후 매년 수차례 런던을 이웃집 삼아 오가게 된다.

그렇게 10월의 어느 토요일 오전, 나는 제네바 공항에 도착했다. 온통 불어로 적혀 있는 제네바 공항의 안내판들이 무척 설레어 마음이 수선스러워졌다. 무거운 여행 가방을 챙겨 출국장을 나갈 채비를 하면서 기대와 긴장을 하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무슨 마음이었는지 난 인천공항에서 한국을 떠날 때 입었던 의상을 의도적으로 똑같이 챙겨 입고서 직전 출발지인 뉴욕을 떠났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가난한 와중에도 스타일을 포기할 수 없어서 홍대에서 산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인천공항을 떠난 나란 녀석.ㅋ 제네바에도 같은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왔다.


토요일 오전의 제네바 공항은 다소 한산했다. 천천히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인파에 섞여 나오는 나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동료 제임스가 보인다. 나와는 비슷한 또래이고 NGO 활동을 하며 한 해 전 국제 컨퍼런스에서도 함께 일한 사이다. 그런데 옆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다가 난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롤란도 달마스와 글로리아 달마스, 사무총장 부부 아니신가! NGO에 겨우 말단 신입이 오는데 공항까지 직접 마중을 나오시다니.


“미스터 달마스! 공항까지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와요, 환영합니다. 미스터 빼고, 롤란도라고 불러요.”

내가 시작하는 이 자리가 그런 자리였다, 전 세계에 딱 한 자리 존재하는 우리 NGO의 청소년 인턴 포지션이었다. 많은 리더들이 주목하며 모두의 관심과 케어를 받는 축복받은 자리, 뒤돌아보니 그랬다. 기회를 주고 네 꿈을 펼쳐보라고 젊은이에게 주어진 고군분투의 삶이 허락된 자리였다. 역시나 이 자리에서 난 많이 깨지고 성장했다. 스물 중반이 이미 넘은 나를 ‘청소년’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행운인지, 천운인지. 내가 그 해 지원 나이 제한에 정확히 턱걸이로 걸려 합격을 했다. ‘오, 주여! 타이밍이 절묘했습니다.’

제임스와 롤란도가 내 여행 가방들을 대신 받아 차에 실어주며 농담을 했다. “아무래도 가방 안에 돌이 들어 있는 것 같아.” 사무총장 롤란도가 끌고 온 경차에 우리는 콩시루처럼 끼어 앉아 내 기숙사로 출발했다. 부릉부릉.


Life in Geneva, 제네바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시작된다.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스위스는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제네바 올드 타운과 레만 호수 풍경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1화 막막함에 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