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환대의 경험

나를 초대해 준 ‘선한 사마리아인’들

by Aeree Baik 애리백

제네바 도착 첫날, 토요일 오후에 부랴부랴 장을 봐온 물건들을 기숙사 공용 주방 테이블에 모두 꺼내 놓았다. 공동 주방에 있는 내 몫의 작은 냉장고에 정리할 참이었다. 찬장 선반에 전임자가 두고간 기본 조리 기구들이 있었다. 후라이팬, 작은 냄비, 후추 그라인더, 꽤 양이 많이 남아 있던 소금통과 설탕통 등등이었다. 양념통 포장지엔 무려 세 가지 언어로 적힌 설명서가 붙어있었다.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차례로 친절하게 적힌 설명서였다. 그럼 무엇하나. 나는 세 언어를 모조리 할 줄 모르니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보는 수밖에. 까막눈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경험으로 지식을 획득하게 만든다. 그저 긁히고 피를 보며 맨땅에 구르다 보면 결국 체득된다.



전임자들이 두고 간 포크와 나이프도 있고 짝이 맞지 않는 찻잔과 몇개의 그릇이 차곡차곡 깨끗하게 포개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벌의 젓가락이 있었다. 단촐한 생활의 시작이 내 앞에 놓여있다.


토요일의 해가 지고 초저녁이 어스름 달밤이 되어 가는 참이었다. 주방을 왔다 갔다 하며 짐 정리를 하는 내 모습을 포착한 한 청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모른 척하지 않은 것이다.



“Bonjour! 혹시 310호에 새로 온 인턴이에요? NGO 인턴?”

“네, 맞아요. 오늘 제네바에 도착했어요.”

“반가워요. 내 이름은 레미Remy에요. 그 방이 한 달 넘게 비어 있어서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레미는 저쪽 복도에서 떠들고 있는 다비드를 불렀다. “다비드David, 인사 해!”

레미는 프랑스인, 다비드는 스위스인이었다.



레미와 다비드는 나를 이쪽 복도에서 저쪽 복도까지 이끌고 다니며 그야말로 전 층의 기숙사생들과 인사를 시켰다.



20대의 기숙사생들은 무척 수다스러웠고 알려야 할 사건들이 많았다. 게다가 그 ‘비쥬 Bisous’ 말이다.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보는 인물들일텐데도 마치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무척이나 반갑게 포옹을 하며 서로 볼뽀뽀를 세번씩을 했다. 저 멀리 떠있는 허공을 향한 뽀뽀 소리. 그 모두가 그야말로 그 모두와 포옹을 하다니, 한명씩 한명씩 인사만 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려 급기야 배가 고파올 지경이었다. ‘며칠만에 만난 것도 아니잖아. 옆옆방에 사는 친구인데 말야.’ 아직 주방에는 정리가 미처 덜 끝난 내 장바구니가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대강 하고 있던 참이다. 말로만 듣던 ‘비쥬 bisous’, 서로 얼굴을 내밀어 볼을 대고 뽀뽀를 하는 소리를 입으로 내가며 인사를 하는 것인데, 이들에게 이렇게 자연스러운 인사가 내게는 꽤나 생소한 걸 보면 아무래도 나는 이곳의 이방인이다.


하지만 걱정 없다. 그저 신기하고 즐거울 뿐. 어차피 나는 적응이 빠르거든.


이곳은 각종 국적의 인종들이 그것도 온갖 종류의 견습생과 교환학생들이 잔뜩 모여 있는 인턴 하우스였다. 스위스 호텔에서 실습을 하는 인턴, 유엔 산하 국제 기구에서 일하는 인턴과 컨설턴트, 대사관에서 일하는 단기 인턴, 여러 NGO에서 일하는 인턴, 은행에서 일하는 수습 사원,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등지에서 온 교환 학생들이 전층에 가득했다. 매력적인 인간들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숙사생들이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저녁 시간엔 온갖 종류의 언어가 복도의 공기를 떠들썩하게 가득 가득 채웠다. 저녁 식사 테이블에서는 토론이 오가고 흥미로운 말투로 덮은 고민과 농담이 실려 나왔다. 청년들은 모든 분야의 욕구가 다양하게 강했다.


전층을 돌며 기숙사 메이트들에게 나를 소개시킨 레미와 다비드는 배가 고파진 나를 본인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공용 주방엔 각자 후라이팬을 꺼내와 이런저런 요리를 하는 뒷모습들이 보였다. 여럿이 차지하고 있는 주방 불 앞에서, 찬장에서 허브를 꺼내오며,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하며 채소를 씻으며 요리 동선이 겹치지 않게 서로 서로 잘 비껴다니는 모습이 참 흥미로워 보였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이곳에서는 나름의 룰이 있었다. 앞으로 그 보이지 않는 원칙을 하나씩 탐구하고 발견해 가는 게 내 몫이다.



레미는 신선한 채소와 불린 쿠스쿠스를 준비하며 닭고기를 구웠다. 유럽 남자들은 요리를 잘 하는군.


그는 내게 조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애리, ‘피크위크 Mr. Pickwick Pub’라고 아이리쉬펍에 가지마. 제임스가 매일 그곳에 가서 놀더니 불어가 하나도 안 늘었어.”


그날 저녁 나는 이들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고 많이 웃었고 처음 만나는 반짝 거리는 얼굴들과 셀 수 없이 많은 bisous를 했다. 저녁을 마무리 하고 깨끗한 기숙사 방에 누워 충만한 안도의 기분을 느꼈다.


뉴욕에서 무겁게 가져온 짐을 모두 기숙사 방에 풀기도 전에 난 이렇게 친구들이 잔뜩 생겼고, 근사한 저녁 테이블로 초대 받으며 더할나위 없는 환대를 받았다. 도착 첫날이었다. 피부색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나를 의심없이, 경계심도 없이 받아준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다.


이 생소한 작은 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내가 이물감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이들을 만난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존재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렬히 행동하는 건강하고 젊은 에너지에 둘러싸여 생활한다는 것은 은근한 심적 지지가 되었다. 계산하지 않고 이방인을 품어준 이들에게 감사한다. 그 환대를 잊지 말자.


제네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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