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재촉해 잘 따라가보자
기대와 긴장을 함께 가슴 속에 가득 담고서 NGO본부에 첫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제네바에서 보낸 조용하고 평화롭던 첫 일요일을 보내고 깜짝할 새에 시차가 이미 적응이 되었다. 아닌 척을 했지만 나는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해보는 해외 취업이지 않은가! 이제부터는 출근 시작부터 퇴근까지 몽땅 영어로 근무해야 하고 밖에서는 불어로 의사소통을 해야한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선택했던 불어, 공부를 열심히 해 둘걸.. 그때도 시제 때문에 힘들었다.
제일 중요한 지점은 내가 맡은 프로젝트를 잘 해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영어로. 게다가 나는 애초 계약에 약속된 시간보다 한 달이나 늦게 나타난 신참이었다. 나 때문에 벌써 일정이 늦어졌다.
사무실은 의외로 참 작았다. 전세계 119개국을 아우르며 멤버와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규모였다. 살림도 소박했다. 작은 평수에 작은 냉장고, 작은 캡슐 커피 머신이 있었다. 네스프레소라고 적혀 있었다. 냉장고엔 각자의 점심 도시락과 간식용 사과나 자두 몇 알이 들어있었다. 벽면에는 역대 NGO 총재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NGO여서 그랬는지 역대 총재 반 이상이 미국인이었다. 한국인도 두 명이 있었다. 그리고 흑백 사진 약 20장 중 단 한 명의 여성 총재 사진이 중간쯤 걸려 있었다. 그 역시 미국인이었다.
함께 일할 동료들은 이미 이곳에서 10년 혹은 20년 이상을 근무한 베테랑들이었다. 나를 새 집에 들어온 하숙생처럼 친근히 대했다.
신참을 최대한 배려해 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 6명의 스태프 중 반이 영어 모국어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새로운 청소년 인턴이란 매해 새롭게 함께하는 인물이다.
나를 맡아 전담 트레이닝을 해 줄 사람은 영국인 캐롤과 호주인 제임스였다. 공항에 마중 나오고 올드 타운 구경을 시켜준 그 제임스다. 영어 모국어자들은 모두 각각의 엑센트가 강했다. 폴린은 말레이시아인이면서 영국식 학교를 다닌 중년 여성이었는데, 각자의 사무실에서 모두 나와 영국 영어, 호주 영어, 말레이시아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하면 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사무총장 롤란도는 우루과이 사람이라 스페인어 엑센트가 무지하게 강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남의 엑센트 말할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제일 문제이기 때문이다.
곧이어 알게 된 진실.. 내가 얼마나 엉터리 영어로 말하는지 서로서로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되었다. 스태프들은 NGO 근무를 오래 하며 이미 각국 멤버들의 엉터리 영어를 상대한지 오래였다.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구사하는 제각각의 브로큰 잉글리시들을 대강 90%이상을 이들은 감쪽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내 영어가 충분히 괜찮다고 말한 건 다 뻥이었다. 곧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다음날 회계사 앤드류가 등장하자 나와 관련한 많은 서류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체류증에 관련한 서류와 필수 건강 보험,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휴대전화와 세금/연금 납부 등등이 진행되었다. 앤드류는 NGO 두 군데에서 각각 50%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회계사이고 엄마가 남미 베네수엘라 아빠가 미국인, 계부가 스위스인이라 여러개 언어를 모국어만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었다.
앤드류까지 등장하니 우리 사무실은 그날 비로소 나의 환영회를 했다. 출근 3일차 점심 식사였다. 폴린은 스태프 설문조사를 해서 가까운 수퍼에서 참치 샌드위치와 햄 샌드위치를 사람 명수만큼 사왔고, 그에 질세라 예쁜 냅킨을 깔고 크래커와 쿠키 등을 치즈와 함께 접시에 소담스레 올려놓은 사람은 다름 아닌 사무총장 롤란도였다!
네스프레소 머신을 여기와서 처음 본 나는 출근 후 이틀간 맛 본 커피 맛이 너무 좋아서 커피 머신을 담당하게 되었고 환영 점심 식사에서 사람 수만큼 커피를 내렸다. 우물쭈물 하며 뭘 해야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었는데 역할이 주어지니 뿌듯했다. 나를 반겨주니 기분이 좋아져서 크게 웃음이 났고 농담도 많이 했다. 사실 아직은 이곳이 낯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크게 웃고 농담하는 것 이외에.
빠른 시일내에 일을 장악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슬며시 밀려왔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나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듯, 느긋해 보였다.
우리 사무실의 회식은 거의 이런식이었다. 기념하거나 축하할 일이 있다면 모두 모여 간단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모두들 정시에 칼퇴근을 했다. NGO에서 외부 손님 초청 행사를 개최하거나 경영 커미티 회의를 진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동일했다. 개인의 저녁 시간은 터치하지 않았다. 억지로 술을 마시며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앉아 누군가의 설교를 경청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회식이었다. 당연히 근무 시간 중에 이뤄지는 근무 중의 한가지로 인정되었고 짧은 다과로도 친목은 이미 충분했다.
앤드류는 그날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 서류를 발급하러 다녔다. 돌아오는 길, 그는 내게 스위스 초콜렛을 먹었느냐고 물었다.
“아니오, 아직 스위스 초콜렛은 안 먹어봤어요. 며칠 전 제임스와 함께 수퍼마켓에 다녀왔는데 종류가 엄청나더라고요. 막 팔뚝만한 초콜렛바도 있고, 두께가 이렇게 두껍고!”
“안 먹어봤어요? 말도 안돼! 스위스에 온지 3일이 지나도록 아직 초콜렛을 맛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아니, 사무실 사람들이 지난 이틀동안 뭘 해준 거죠? 얼른 이쪽으로 갑시다. 내가 초콜렛 사줄게요.”
앤드류를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던 방향을 바꾸었다. 공원 입구로 들어갔다.
(‘초콜렛이 그리 중헌가...’)
그리하여 앤드류와 나는 세무서를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초콜렛을 사러 한 공원을 가로질러 가게 된다. 공원에는 푸른 잔디가 가지런히 깔려 있고 수백년도 더 되어 보이는 멋진 나무들이 울창했다. 여기 저기 꽃이 놓여 있었고 큰 대리석 조각들도 보였다. 조각들은 반짝거리는 햇빛에 비쳐 아름다웠다. 하지만 왜 어두침침해 보이지? 공원은 거대했다.
“그거 알아요? 여기 공동 묘지에요.”
“네에? 여기가 공원이 아니라 묘지라고요?”
“저-기 저 방향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보면 어딘가에 깔뱅 묘지가 나올 거에요, 장 깔뱅.”
“뭐라고요? 기독교 종교 개혁을 한 그 깔뱅? 깔뱅 묘지가 여기에 있다고요?”
“가끔 점심 시간에 와 보면 여기서 사람들이 피크닉을 해요. 쌍떼! 하면서 건배를 하기도 하죠. 남의 묘지 앞에서 ‘건강!’을 외치며 잔을 마주친다니 너무 재밌지 않아요? 하하”
앤드류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네.. 도심 한 가운데 우리 사무실 바로 앞에, 그것도 길만 건너면 보이는 낮은 담장 안에 종교개혁가 장 깔뱅의 무덤이 있다니.’ 세상에,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세미터리를 가로 질러 넘어와 회사 앞 작은 구멍 가게에서 앤드류는 초콜렛을 네 개 샀다. 본인이 두 개를 챙기고 내게 남은 두 개를 건네 주었다. 포장지를 까서 초콜렛 한 조각을 잘라 입 속에 넣으며 생각했다. ‘맙소사 깔뱅이 저기 있다니..’
입 안에서 살살 녹여 가며 초콜렛을 음미했다. 앤드류는 이미 두개째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나보다도 본인이 초콜렛을 먹기 위한 핑계 같았다. 스위스 초콜렛은 정말로 진하고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