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가난을 참을 수 있는 한계 지점

나에겐 보조 바퀴가 필요했다

by Aeree Baik 애리백

가난하면 살이 찐다. 이상한 일이다. ‘허리를 졸라맨다’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몸무게가 순식간에 불어나는 것이다. 왜지? 난 최대한 ‘허리를 졸라매’고 아끼고 아끼며 오늘 지갑에 얼마가 남았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몸무게가 이만큼이나 불어나는 건 이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식욕이 많지 않아서 음식을 항상 남겨 부모님께 늘 혼이 났다. 입이 짧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매운 거, 뜨거운 걸 특히 못 먹고 면종류 음식도 즐기지 않는다. 아구찜처럼 고추가루가 잔뜩 들어있는 새빨갛고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바로 배탈이 난다. 헌데 멀리멀리 집을 떠나니 이상한 식탐이 생겼다. 기회가 있을 때 먹어두어야 한다는.

나이 먹고 뒤늦게 LA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때 돈이 아까워서 한국 식당도, 한국 식료품점도 안 갔다. 가끔 떡갈비나 만두 따위가 먹고 싶은 날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 어학연수 학생들이 자주 가는 LA의 아울렛도 미루고 미루다 단 한 번 일본인 친구들과 차를 한 대 렌트해서 다녀왔다. 70% 세일을 하는 캘빈 클라인 가방을 하나 샀을 뿐이다. 쇼핑 좋아하는 내가 과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음식 앞에서 무너졌다. 평소 못 먹는 소담스런 음식이 테이블에 놓이면 와구와구 먹어댔다. 폭식을 하게 된다. 저 먹음직스런 요리를 풍족하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두엽을 지배한다. 또 언제 이런 요리를 맛 볼 수 있으랴 하는 생각에 정량을 넘어 선다. 살이 찐다. 몸이 온갖 결핍을 흡수해 버린다.

가난하면 그렇다. 스위스에 와서도 여전했다. 한번 몸에 배어버린 습관을 리셋하는 게 쉽지 않았다. 적당한 양이 담긴 비싼 유기농 채소를 차마 고르지 못 하고 대용량 포장의 정크 푸드를 집는다. 거대한 포장 안에 잔뜩 들어 있는 음식을 버리는 게 아까워서 남김 없이 먹어 치우다 보면 살이 찐다. 수퍼엔 의외로 대용량 물건들이 많았다.



대용량 커피, 대용량 생수, 대용량 감자칩, 모든 것을 싸고 가성비 높은 대용량으로 구입하다보면 내 몸도 대용량이 되고 내 공간은 창고로 바뀌어 버려 삶의 질이 뚝 떨어진다.



누군들 깔끔하고 아늑한 공간이 그립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방은 창고가 된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감자를 5kg짜리 포장 단위로 샀다. 이상하게 값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kg짜리 포장과 값이 거의 비슷하다니. 와, 싸다! 하고 냉큼 5kg짜리 감자 한 주머니를 사고 2주내내 감자만 먹게 된다. 삶은 감자처럼 퍽퍽해진 삶의 질은 개나 줘버린지 오래다. 맵시 나는 디자인의 옷들은 옷장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펑퍼짐한 옷을 골라 돌려가며 입다보니 의도치 않게 ‘단벌 신사’가 된다. 참 속상한 일이다.

한국에서 첫직장은 다소 열악했다. 재정 규모가 크지 않았고 모두들 사명감과 열의를 가지고 일의 자양분 삼았지만 우리는 최저 생계비에 다름 없는 월급을 받았다. 교통비와 식비를 지출하면 남아 있는 돈이 얼마 없었다. 저축할 돈은커녕 월세 낼 규모가 안 되어 모두들 이모집에, 언니집에, 오빠집에 ‘더부살이’하는 선배들이 반이상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반지하 원룸에 살며 부모의 빚을 갚고 있었다. 그는 전세 사는 나를 부러워 했다. 내 전세 보증금은 정확히 엄마가 지원해 준 규모였다. 내겐 보탤 돈이 단 1백만원이 없었다. 세 달에 한 번은 월초에 엄마한테 전화를 해야했다. ‘엄마, 카드 값이 연체 됐어...’
연체 된 금액은 그다지 크지도 않았다. 한 달은 16만원 연체, 또 한 달은 8만원 연체, 뭐 이런 수준이었다. 명백히 생활비가 모자란 것이었다. 삶을 꾸리는 비용이다. 월급을 받아도 ‘똔똔’이 되는 상황이었지만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았다.



난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고, 정확히 열망하는 것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부족해 쩔쩔매는 일상이 유쾌할 리는 없다.



어느날 빨랫감을 잔뜩 챙겨 본가에 갔는데 다음날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네 빨래 하다가 염색물이 얼마나 빠지는지 욕실 타일이 빨간색으로 물들뻔 했다는 거다. 홍대 거리에서 산 그런지룩 치마나 칠부 바지들이었다. 엄마는 되도록 똘똘한 옷들을 사라고, 저런 집시같은 옷 좀 사지 말라고 싸구려 옷은 금방 망가진다고 했다. ‘엄마, 이건 집시가 아니라 히피룩이라고!’ 한 마디 더 했다가 등짝을 맞을 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 초반 한창 멋을 내고 싶을 나이에 크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대안을 찾는 게 옳은 것 아니겠나. 한번은 광장시장 2층 빈티지 가게에서 사입은 자켓을 입고 걷는 중이었다. 동행인이 발견했다. ‘어머, 이 옷 옆구리가 찢어졌는데?’

열악했던 첫직장인 잡지출판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잡지라는 비난을 받았다. 우리는 욕망에 대해 글을 쓰고 스타일리시한 이벤트를 했다. 가난하다고 욕망이 초라할 거라 믿지 말라. 사람들은 섣부르게 재단했다. 광장 시장에서 고른 옆구리가 찢어진 라이더 자켓도, 염색약이 잔뜩 빠지는 히피룩 스커트도 나 자신의 정체성의 발현이면 누군가의 판단으로 요동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취향과 욕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꿈꿀 수 있는 존재 아니겠는가. 하지만 일상에서 생활인으로 금전적인 압박을 받는 건 참 가혹한 일이었고 오랜 생채기가 되기도 했다.

매일 내 지갑엔 단돈 1만원이 채 들어있지 않았다. 최저생계비와 다를 바 없는 월급으로 생활을 꾸리면서도 회사에서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함은 덜하지 않았다. 인생이 서럽기까지 했다. 체중이 5킬로가 순식간에 빠져 인생 처음으로 44사이즈가 되어봤다. 급기야 24살에 허리 디스크로 몸저 누웠다. 허리를 굽혀 신발끈을 묶지도 못하고 허리를 펴서 등받이에 똑바로 등을 대고 앉지도 못 했다. 출근길 버스가 저 앞에 있는데도 뛰어가 타지 못 했다, 허리 통증 때문에. 빨리 걷고 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도 몇년간을. 본가에 가서 요양을 해도 만성이 된 최악의 허리 디스크는 나아지지 않았다. 회사를 ‘걸어가지 못 해서’ 그만 둬야했다.

온갖 정형외과, 운동치료, 추나, 요가, 척추주사, 한의원에 이름 있는 척추전문병원를 다 수소문해 다녔다. <21세기 병원>, <우리들 병원>,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각기 다른 병원마다 새로이 MRI 검사를 받도록 해 그 비용만도 무지하게 컸다. 내 병원 검사비, 치료비, 수술비는 모두 부모님이 내 주셨다.


스위스 우체국 la Poste


NGO에 합격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후 3일 뒤 나는 회계 담당자인 앤드류와 함께 이런저런 행정적인 업무를 보게 되었다. 스위스 이민국 Office cantonal de la population et des migrations (OCP)에 가서 체류증을 받아오고 은행 계좌를 개설하러 스위스 우체국 은행에 갔다. 서류가 한 가지 갖추어지지 않아 즉각 발급이 불가했다. 계좌 개설을 신청할 때 본인의 주소지를 입증해야 했다.


스위스에서는 거주지가 확실치 않을시 계좌 개설을 아예 거부당한다. 신용카드 발급은 애초에 조건이 훨씬 더 철저하다. 월급 내역을 제시해야 하고 단기 고용직은 신용카드를 발급 자체가 전면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리 월급 액수가 상당해도 앞으로의 고용 기간이 짧으면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다. 내 경우엔 전기세/수도세 등의 고지서처럼 본인의 이름과 주소지가 정확히 기입되어 있는 종이를 제시해야했다. 혹은 본인 이름으로 수취한 편지 봉투라던지. 기숙사에 들어갔으니 전기세 고지서가 있을 리 만무하고 또한 제네바 도착 3일밖에 안 되었는데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가능성은 제로다. 창구에 있던 은행 직원은 내게 묘책을 제시했다.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라고. 여기는 우체국이니 바로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리하여 나는 스위스 도착 첫 주 수요일에 나 자신에게 행운의 편지를 쓰게 된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라고 쓰려다 몇분 고민 끝에 단 한 마디를 적었다.


이튿날 받은 편지 봉투를 열고 소리내어 읽어 보았다. 내가 스스로에게 보낸 마디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경제적 독립.

이날 개설한 스위스 은행 계좌로 매달 월급을 받기 시작했다. 생활비 지원을 해주는 NGO 사무소에서 우리 동료들은 혹시 내가 굶고 다니는 건 아닌지 늘 걱정을 해주었다. 나는 청년 인턴이었고 그들 기준으로는 보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렇게 하찮은 월급으로 스위스에서 생활하기 어렵다며 무척이나 안쓰러워했다. 웬걸, 한국에서 받던 월급보다 몇 배는 되었다. 착실히 근무하며 3개월간 저축액을 모았다. 한 푼이 아까워 모으고 또 모았다. 매일 저녁이 퍽퍽한 감자와 파스타면과 함께였다. 저축액을 모으다 보니 처음으로 덩어리가 생기고 마음이 든든해졌다. 동료들은 내가 빈곤 계층이라며 집에서 자꾸 뭘 가져다주고 싶어 했지만 내 계좌에는 숫자가 쌓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대적 숫자’, 순수하게 한 인간의 ‘생활비’로 인정받는 규모가 다르다는 점을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연말 첫 크리스마스를 휴가를 제네바에서 가까운 파리와 런던으로 다녀왔다. 최저가 비행기표를 찾고, 다시 가장 저렴한 기차표를 구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런던에서 나는 엄마에게 선물할 버버리 자켓을 한 벌, 핸드백을 한 점 샀다. 세일 중이라 엄두를 내보았다. 엄마를 위해 고른 영국 브랜드 버버리, 이날은 금전적으로 늘 쪼들리던 내게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국제 특급 우편으로 소포를 받은 엄마는 이걸 두고두고 자랑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입사 몇년차여도 여전히 최저생계비보다 못한 월급을 받던 나는 이때 생애 처음으로 호사를 누렸다.

그날 스위스 우체국 은행에서 자신에게 보낸 마디 메시지를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고 귀하게 여긴다. 내게 경제 ‘규모’가 생기기 시작한 중요한 모먼트이다. 이제는 자전거의 보조 바퀴를 떼고 휠을 가만히 굴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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