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역사 수업을
일요일에는 미술관에 갔다. 유럽의 일요일은 참 한산하고 조용하고 매우 심심했다. 쇼핑가도 문을 닫고, 케냐AA를 내려 마시는 카페도 고소한 빵냄새가 가득하던 불랑제리도 일요일엔 문을 닫았다. 그렇게 모두들 고요하게 휴일을 보내던 날이면 나는 제네바의 미술관에 갔다. 도자기 미술관, 현대미술관을 층마다 한걸음씩 떼며 관찰하고 읽고 음미했다.
작품 연도를 확인하고 그림이 완성된 시기, 작가의 나이를 천천히 읽다보니 그의 연대기가 얼핏 연결이 되었다.
‘네덜란드 출생의 화가는 왜 프랑스 남부의 정신병원에 가게 되었을까.’
‘동물의 유골을 그리던 미국인 화가는 꽃을 육욕적으로 그리며 시선을 끌어당기는군.’
미술 전시는 관람자의 동선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의도하여 안내하는 듯했다. 뒤늦게 알게된 사실이 하나 발견되었던 것을 빼면 말이다. 나는 전시자가 큐레이팅을 한 그 반대방향으로 미술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종의 쾌감이 있었다. 반대로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묘한 기쁨이 있다.
일요일의 시간은 느리고 가고 있었다. 이상하게 평일보다 더 촘촘했고, 몇시간 뒤에도 시간은 여전히 남아 돌았다.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 미술관에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발견한 대안이었지만 내게 영혼을 쉬게 하고, 감성의 상자를 충전하는 장치가 되어주었다. 기숙사는 늘 시끄러웠고 사건사고가 가득했다. 도파민이 솟구치는 젊은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미술관은 달랐다. 그곳엔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고 가격이 비싸서 소장할 수 없었던 두꺼운 미술 도록이 있었다. 그래서 어김없이 미술관행을 했다. 미술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다.
일요일은 조용한 사람들의 날이다. 모두들 가만가만 미술품 앞에 앉아 그림 감상을 하고 카페에서도 나른한 시간을 보낸다. 큰 소리를 내며 떠드는 사람도 없고, 나의 영역을 침범하며 불쑥 다가와서 말을 거는 사람도 없다. 서로에게 신체적으로 부딛칠 일이 만무하다. 두꺼운 겉옷도 무거운 가방도 모두 벗어 외투 보관실에 맡긴채 얇은 인간이 되어 전시실로 입장한다. 조용한 전시실에서는 숨을 고르게 된다. 나비가 그 얇은 날개로 어디론가 팔랑팔랑 날아가다가 잠시 앉은 그 자리는 흔들리지도 추락하지도 않는다. 그 자리에서 나비는 숨을 쉰다. 나도 숨을 쉬었다. 일요일의 고요한 미술관은 어쩐지 위안을 주었다. 서로의 시선과 공기와 발자국 소리까지 모두 잠잠했다.
유럽을 여행 할 때면 일요일은 어김없이 헛탕을 치는 날이었다. 문 닫은 점포들 앞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숙소에서 조식을 마치고 남긴 빵 한 조각을 살뜰하게 손에 쥐고 일요일의 아침 텅빈 거리를 그렇게 걸었다. 그리하여 여행지에서의 일요일은 평소의 루틴처럼 또 미술관에 갔다. 그 어느 나라를 가던지, 많은 미술관들은 그곳의 미술가들을 소개하고 싶어했고, 그곳의 미술가들은 어김없이 그곳의 이야기를 그려놓았다.
여행지의 아침에 도달한 미술관에서 이곳의 정서와 시대적 감수성을 그림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우아한 귀부인의 초상화와 숨겨둔 정부의 초상화, 소풍 나온 귀족들, 훈장을 차고 있는 군인과 전쟁을 가득 메운 상처들이 그림에 드러났다. 때로는 적나라하게 때로는 추상적으로. 나는 그림이 그려진 연도를 확인했다. 모든 그림에는 몇년도에 어디에서 그려진 그림이라는 레이블이 명확히 적혀 있었고, 화가는 그때 무언가 간절히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자신이 증거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나는 화가의 메시지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읽어내야했다. 공들여 그린 그림 안에 넣어 놓은 그의 메시지를 말이다.
그림 안에서 나는 보았다. 고개를 떨구고 있는 농부의 고단함을, 가죽신을 만들고 있는 갓바치의 손을, 손님을 상대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카운터에 서 있는 웨이트리스를, 전쟁이 휩쓸고 간 땅에서 절규하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자랑스럽게 군복을 입고 있는 장교들의 어깨를, 어두운 골목을 등지고 저녁 다이너에 앉아 있는 남녀와 체리나무로 만든 튼튼한 카운터 안에서 밤늦도록 일하고 있는 블론드 보이를. 그리고 나는 그렇게 화가의 시선을 확인했다.
어느 순간, 경외감이 차올라왔다. 화가는 자신의 일상을, 우리를 둘러싼 한 사건을, 또한 시대의 역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가 기록하고 해석하고 부지런히 그려낸 작품들을 나는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시를 쓰며, 음악을 연주하며 예술로서 발현하고 기록한 시대의 결과물들을 나는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역사를 읽고 공감각적으로 감상하는 나의 방식을 찾게 되었다. 지배자가 남긴 사료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책을 통해 활자매체로 공부하지 않은 또 다른 역사 학습을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참 부지런했다. 저마다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방식대로 힘껏 편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림으로, 글로,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방식으로 가장 처참한 현실을 고발했다. 전쟁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서로를 찢어죽이고, 이상을 실천하며 죽어가기 위해 전진하고 있었다. 미술관에서 또한 음악으로 만난 작품들이 내 안에서 세계 근현대사의 연대기가 되어 쌓이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작품의 연도를 확인했다. 왕정이 무너지고, 전쟁이 선포되고, 군중은 목적없이 폭력에 가담하게 되고, 목숨을 던진 인물들이 영웅으로 혹은 처형자로 전면에 드러났다. 늙은 어머니는 죽어가며 소멸하고 있는 아들을 간신히 품에 안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향한 암투는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누군가는 영문도 모르게 죽었다. 사과하는 이는 없고 역사는 그렇게 계속되었다.
국제기구에서 인턴십을 하며 시사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있다보면 나의 무식함을 적나라하게 확인할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작은 메모지에 키워드를 적어 왔다. 사료를 내 손으로 직접 찾아보기 위해. 동료들은 참으로 수다쟁이들이었고 본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많이들 풀어놓았다. 흥미진진했다. 나로서는 이런 기회가 배움의 터전이 되었다. 세계사 시간을 방불케했다.
자칫 속아 넘어갈뻔한 적도 있었다. 이들이 들려주는 소스는 중산층에 고학력이며, 본국 고위공무원 출신의 현 국제공무원들이 들려주는 매우 외교적이며 국가에서 승인한 보도 라인 안에 속해있는 공식적인 스토리일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소스가 무한정 나올 때 그들을 무조건 흡수하기 보다는, 약간의 거리감을 유지한채 나는 나만의 시야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관점’을 갖는 것은 중요했다. 필사적으로 내 생각을 갖는 것이 주효했다. 지식과 정보는 카피할수 있지만 ‘생각의 카피캣’은 절대로 되지 않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계선을 늘 그어 놓았다. 이면을 보기 위해 틈을 만들어 놓았다.
매우 조악했던 나의 역사 지식이 조금씩 넓어졌다. 역사를 모르면서 현재를 해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