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40세에 한국을 떠난 인물, 공수신
한참 성장기일 때, 수신의 가족 다섯 명이 전부 모래알처럼 흩어져 지낸 시절이 있었다. 짧은 시절이 아니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는 어느 하숙집에 맡겨졌고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동생은 각각 다른 곳에서 생활을 했다. 그의 십대는 돌봐주는 가족이 없이 지나왔다.
파산을 한 가족은 그 시절을 그렇게 견뎠다. 사춘기 시절이었을 수신에게 가족의 가난과 정서적 분리의 시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가족들이 하나둘씩 재회하고 다시 모여들 때, 마지막까지 홀로 남겨져 있던 둘째 아들이 수신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그에게 질문한 유년시절의 기억에 대한 대답이었다.
“오히려 자유롭게 지냈어. 매일 농구를 하며 뛰어놀았거든.” 공부는 잘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며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매번 반에서 1등을 했어.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모범생의 망언이로군요. 교과서대로 공부했다고 말할 차례인가요?” 나는 그에게 농담을 했다.
부모와 멀리 떨어져 지내며 공부에 대한 강요가 없으니 마음 편히 지냈다고 하는 그 말이 무슨 뜻일까. “정말이야.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도통 모르겠어. 놀기만 했는데.” 영문도 모른 채 반에서 매번 1등을 했다니. 믿기 어렵지만 일단 진심이라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특히 어학에 재능이 없었다고 한다. 대학 입학 영어 시험을 순 엉터리 답안으로 제출했다. 채점을 해보니 겨우 다섯 개가 맞았다. 영어를 제외하고는 전과목 총점이 모두 높았다. 대학을 입학한 뒤 과수석을 했는데 그것도 어떻게 된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신기하다고 했다. 이쯤 되면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가 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모두 그저 우연이라고? 반에서 1등을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본인도 모르겠다니.’ 하지만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청해 들으며 나는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수신 선배를 생각하면 늘 웃는 얼굴에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이 곧바로 떠오른다. 한여름이든 한겨울이든 늘 똑같다. 어느 날은 머리에 헬멧을 쓰고 자전거로 퇴근하는 그와 길가에서 스치며 서로 커다란 목소리로 인사를 했고, 어느 날은 운동가방을 메고 탁구를 치러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멀리서 “선배!” 하고 부른 적도 있다. 항상 싱글벙글 유쾌하게 손을 흔든다.
그는 매일 다른 파트너와 탁구를 친다. 어제는 에티오피아 동료와 오늘은 중국인 동료와 탁구를 쳤다. 모두들 에이스다. 회사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한결같이 웃고 있다, 한 번도 어김없이. 그렇게 웃음이 많으니 얼굴에는 선한 눈주름이 가득하다.
프랑스 동료들과는 불어로, 스페인 동료들과는 스페인어로 대화하며 뭐가 늘 즐거운지 온화한 얼굴을 하고 농담을 주고받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의 사무실에 찾아가면 내게 뭐라도 주고 싶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 서랍 속에서 비스킷을 꺼내 주었다.
딱 한번 그가 내게 호통을 친 것을 제외하면 그는 겉에서 보이기에 매우 평화로워 보이는 인간형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호통 때문에 나는 오늘 그를 만났다. 당신의 스토리를 들어보고 싶다고. 온유해 보이는 그에게도 막막했던 시절이 존재했을까.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실망을 감당해야 하는 자신의 일상을, 그의 매일을 어떤 마음으로 지탱하고 있을까. 그는 이번에도 내게 비스킷을 꺼내 주었다. 그의 삶은 평탄했을까, 나는 그게 오랫동안 궁금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수신은 공기업에 입사 후 만년 평사원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폐쇄적인 조직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시작 지점이 달랐고, 성장의 기회가 없었다. 공무원 조직과 비슷한 면이 많은 공기업은 낮은 직급의 사원에게 특히 가혹하다.
마치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처럼 한 번의 시험으로 앞으로의 신분이 확정이 되면 10년이든 그 이상이든 세월이 그대로 흐른다. 여전히 실권이 주어지지 않는 평사원으로만 존재한다. 입사 경로가 이상하게 천차만별인 곳이 바로 공기업이다. 준정부기관이나 다름없다. 불합리한 근무환경을 겪어야 했다. 높은 직급으로 시작한 사람과 비슷한 조건의 이력서를 보유하고 있던 그는 여전히 피라미드의 말단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곳에 정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아주 오랫동안 출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손에 헤럴드 뉴스 한쪽을 쥐고 다녔다. 엔지니어로서 특별히 언어에는 소질이 없는 그였다. 두배로 힘이 들었다. 중학교 수준의 영어 교재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차피 영어 텍스트를 한꺼번에 몇 페이지씩이나 읽기 어려워서 영자 뉴스를 딱 한 장씩 들고 다녔다. 불합리한 틀을 탈출하려고 계속해서 애를 썼다. 아무런 기약이 없지만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나아갔다. 운동성을 유지했다. 틀 안에 여전히 남아 있더라도 계속해서 시도하고 쉬지 않았다. 아주 조그만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상어에 비유해. 계속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상어들의 습성이 잠시라도 멈추면 산소부족으로 죽는다잖아.”
이러한 기질은 그를 어디로 향하게 했을까. 최소한 익숙한 세계에 남아있도록 충동질하지는 않았다.
중학교 영어 수준의 교재로 다시 시작한 영어 공부, 이후 토익 시험 결과는 회사에서 최상위층에 올랐다. 해외 연수 기회도 생겼고, 몇 년 뒤에는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파견 근무를 다녀오게 되었다. 아내와 어린 아들, 더 어린 딸과 함께 영국 생활을 하게 된다. 발령을 받은 인원 중 가장 말단이었다.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비싼 타운 하우스가 아닌 월세가 무척 저렴한 영국 로컬에서 지내며 영국인, 외국인 친구들 가족과 어울렸다. 지금까지도 그들과 만난다. 과연 수신 선배답다.
3년을 영국에서 근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는 회사에서 수신의 근속연수가 10년이 이미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겨우 대리로 직급을 달고 있었다. 그때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면 명패에 과장이나 달고 마무리할 수 있을까.” 일반사원으로 시작했기에 진급할 수 있는 지위가 어디까지 그에게 허락될지 미지수였다. 큰 아이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신문광고를 보게 된다. 경제경영서였다. <돈 좀 벌어보자>, 그 말이 왜 희망적으로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다. 열심히 책을 읽었다. 수신은 답답한 환경을 뚫고 싶었다. 뭔가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은행을 찾아다닌다. 공기업에 근무하며 정확히 정년이 보장된 이에게 은행은 그야말로 최대치의 대출액을 증액해준다. 그 돈으로 고가의 아파트를 구입했고 그는 몇 달 동안 큰 소망을 품었다고 한다.
나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선배.. 얘기를 듣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죠? 결말을 알 것 같은 이 예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말하는 찰나, 그는 대답했다. “그때가 1997년이었어.” 소망을 품었던 그의 마음은 단 몇 달을 이어가지 못했다.
IMF 구제금융 결정으로 기업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엄청난 여파가 몰아쳤다. 그는 매달 월급을 전부 쏟아부어도 대출 이자만을 겨우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대단한 빚을 짊어지게 되었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처분해도 답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서도 빛이 보이지 않았어.”
회사에서 늘 온화한 웃음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마음이 건강해 보이기만 하는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오래 전의 이야기가 꺼내져 나오니 나도 혼란스러워서 말이 안 나왔다. 30대의 공수신, 한순간 억대의 빚을 지고 그는 무엇을 했을까. 앞에 놓인 막막한 상황을 바라보며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그리고 그는 어떤 서사를 안고 7년 뒤 이곳 스위스에 오게 되었을까.
계속해서 그의 구술을 들으며 나는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에 대하여, 동시에 그가 겪은 행운에 대해서 강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자기 연민’이 없는 그 같은 캐릭터는 신기한 면이 있다. 자신이 겪은 생채기를 완고하게 몸에 새기지 않고, 독성을 자신의 마음에 깊이 축적하지 않으며, 서서히 흉터와 상처를 떠나보낸 인물을 앞에 두고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