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40세에 한국을 떠난 인물, 공수신
아이가 대학입시 시험 바칼로레아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이었다. 입시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공부를 더 해야 하는 때였다. 그때 공수신은 아이를 일으켜 세워 함께 마라톤 트레이닝을 한다. 근육을 단련시키고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고.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두 달을 꼬박 함께 운동을 하며 경쟁과 균형을 배우고, 관계와 충족감에 대해 같이 경험하고 싶었다.
제네바 국제 마라톤 당일 아버지와 아들이 속도를 맞추며 나란히 달렸다. 후반부에 체력이 떨어진 그는 아이를 향해 먼저 가거라 주문하고, 그렇게 아버지를 앞서가며 박차를 가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자신도 다시금 힘을 내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1분 차이로 마라톤 결승선에 들어왔다. 아이는 3시간 45분, 수신은 3시간 46분 기록이었다. 라인을 먼저 통과한 아이가 수신이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둘의 역사를 함께 하며 신뢰와 관계 맺음을 단단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치른 바칼로레아는 좋은 성적을 얻었고, 아이는 몇 달 뒤 취리히 공대에 입학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공부했고 학생들을 가르쳤던 학교가 스위스의 취리히 공대 (Swiss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in Zurich (ETH Zurich))이다. 한국을 떠난 지 7년 만의 일이다.
마음이 약해서 학교 급식을 늘 꼴찌로 받던 아이가 그 사이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갈등 속에서 이민을 결심하고 심란한 마음을 추스르던 공수신은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국제기구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 7년의 세월은 어떻게 흘렀을까. 그를 인터뷰하는 동안 드라마틱하게 전개가 되고 있는 스토리를 들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선배는 어쩌면 타고난 트레이너인가 보다.'
회사에서 어려운 시절을 거치면서 심리적으로 지쳐있던 내게 자신의 탁구 라켓을 쥐어 준 이가 수신 선배이다. 그 라켓은 마치 나무 신발을 깎는 장인이 손으로 깎아 놓은 것처럼 본인의 손에 꼭 맞게 중국, 일본, 한국식 그립의 장점만을 모아 종합적으로 손잡이의 각도를 섬세하게 깎아놓은 수신 선배의 핸드메이드 라켓이었다. 나는 그때 회사 내에서 탈진 직전의 상태를 겨우 벗어난 시기였고 그는 그 순간을 포착했다. ‘이제 운동을 해야 해.’ 하며 자신의 라켓을 건네주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의 서술을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공수신이 진술하는 이 모든 이야기는 가족의 서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공로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놓지 않았다. 아내가 많은 것을 설계했고 우리는 따랐다고 말한다. 온유하고 늘 웃는 얼굴의 공수신, 그는 고통과 불행을 끌어안으며 기어이 아픈 상처로 만들지도 않았고 자신이 이룬 성취를 홀로 독식하지도 않은 채 모두를 위해 나누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내게도 넘겨주었다.
이민을 결심하고 난 뒤 처음 그는 캐나다 이민 서류를 준비했다고 한다. 드디어 이민 영주권을 위한 모든 서류를 구비하고 캐나다 이민국에 제출하며 그는 생각했다. '설마 엔지니어인 내게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으랴, 뭐라도 하면 되겠지.'
그러던 중 공수신은 국제기구 채용 공고를 열람하게 된다. 이때는 국제기구의 존재가 일반인들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전이었다.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용이하지 않았다. 당시는 국제기구의 채용에 관한 정보가 흘러가는 정확한 루트가 있었다. 정부 부처 공무원들에게 가장 먼저 전달이 되고, 부처를 통해 지원 자격을 얻은 공무원들과 산하 연구기관의 지원자를 후보로 선발하여 지원하는 방식이 흔했다고 한다.
돌파구를 찾는 한편 여러 시도를 한 그가 대기업의 전략팀과 국제협상팀을 거치게 되면서 이 같은 정보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인 것이다. 수신은 공직에 있지도 않았고 정부 부처의 외교적 지원을 받지도 않았다. 그는 합격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개인의 자격으로 무작정 지원했다. 그동안 쌓은 경력은 꽤나 단단했다. 정부 부처와는 전혀 상관없이 혼자 영문 지원 서류를 준비하여 송부했다. 어차피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차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것은 캐나다 이민을 계획했던 그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택지가 된다. 그러나 영어권도 아니고, 미주권도 아닌 또 하나의 트랙이었다. 가족들 중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경로였다. 국제기구가 위치한 스위스 제네바는 불어를 사용해야 하는 곳이다. 아이들은 당장 몇 달 뒤 불어로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합격 통보가 문서로 도착했을 때,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다. '가도 괜찮을까?' 둘째는 초등학생이었고, 첫째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아이들이 내놓은 의견은 모두 OK 였다.
그렇게 가족의 마음이 모아져 국제기구를 향하게 된다. 캐나다 이민국에 제출했던 이민 지원 서류에는 취소 레터를 보냈다. 그는 이 장면을 회상하며 내게 '초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언어가 완벽하게 다른 이곳 스위스의 현지 학교에 적응해야 했던 아이들은 그만큼 고생스러운 시간을 넘어온다. 당시 수신의 가족은 국제학교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비가 상상을 초월할만큼 대단히 비싸고 학부모들의 개입이 많은 국제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그들의 초심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이었다. 그의 가족은 시작 지점이 달랐다. 아무리 새로 고용된 소속 기관에서 자녀 학비의 절반 이상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고 해도 이들에게는 그 선택이 당연하지 않았다. 공수신의 가족은 스위스 현지 학교와 현지 친구들의 일상에 적응한다.
스위스 공교육은 엘리트 교육으로 유명하다. 학비가 무료이며 연구 분야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만을 선발한다. 나머지는 모두 과락시킨다. 고등교육으로 올라갈수록 학생수는 줄어든다. 그만큼 관리가 철저하고 효율적이며 한 명의 학자를 키울 때 국가적인 지원을 한다.
막대한 빚을 갚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외식이나 낭비 없이 검소한 삶의 방식으로 단련된 가족은 물가 비싼 스위스에 이주해 와서 소박한 유럽의 생활에 금방 적응을 하게 된다. 인건비가 매우 높은 유럽에서 살기에 공수신의 가족은 이미 탄탄한 기본기를 장착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자동차 정비와 간단한 집수리도 수신이 모두 해결했다.
두 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낸다면 학비 때문에 생활비가 빠듯할 테지만 스위스 공교육을 선택했기에 경제적으로도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도움을 준 셈이다. 그리하여 몇 년이 지난 시점에는 스위스 교육을 받고 바칼로레아를 치른 두 아이 모두 스위스의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융통성 없이 정석으로 선택한 많은 순간들이 그의 가족의 삶을 구성했다. 운동성을 유지한 그의 하루하루가 이 많은 것을 견인했다. 아낌없이 누리지 못한 수많은 자원들에 ‘결핍’이라고 방점을 두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날 그의 운동성과 긍정성이 내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혼돈의 시절을 보내던 내게 그날은 이상하게도 꽤 명확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어떤 무작위의 날이었다. 회사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받는 모든 스트레스를 내 몸에 퍼부어대던 시기였다. 폭음과 불면을 반복하며 팀 내의 부당한 일들을 속으로 어떻게든 참고 목구멍으로 넘기던 나날들이었다. 그때 공수신을 복도에서 마주쳤다. 여느 때와 같이 여러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커피 브레이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그는 우연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는 나를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그가 순식간에 웃음을 거둔 채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성큼성큼 다가왔다.
"애리 씨 요즘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왜 이렇게 얼굴이 부었어? 차 한 잔 하자. 무슨 일 있으면 내 사무실로 오던지."
나는 그때 마음속의 딜레마를 겪었다. 힘겨워하는 나를 누군가 발견해 주기를 몹시 바라기도 했고, 또 몹시 바라지 않기도 하는 두 마음으로 살았다. 폭음과 불면은 내 생애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그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매일 술을 마셨고 가만히 앉은 채로 몇 시간이고 TV를 보았다. 다시 불면의 밤을 보낸 후 메마른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늘 보고 느끼는 것에 대해 내 안의 감상들을 메모로 적어 놓는 습관이 있는데 이 당시의 메모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넘쳐 오르는 강퍅한 마음을 아무것도 적어놓고 싶지 않았다. 대신 공원에 가서 푸른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왔다. 나는 공수신을 만나러 갔다.
그는 유럽 사람들의 거리두기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기분이 상하지 않을 만큼만 개입하려고 애썼지만 그가 속으로 나의 주변 상황에 대해 깊게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회사에서 겪는 부조리한 일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혼자 앓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에게 맨 처음 털어놓았다.
그는 내게 회사 내의 심리상담가를 만나보라고 했다. 비밀 유지 조항이 있으니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공식화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놓으라는 당부를 했다. 회사 내에서는 벌써 여러 명이 번-아웃 상태로 병원에 실려가거나 장기 휴직을 내고 병가에 들어간 케이스들이 있다.
한 달이 지난 뒤 그는 추이를 보며 덧붙였다. 그의 말투는 건조하게 시작했다.
"모든 걸 다 버릴 각오로 해야 돼.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다른 자리에 지원해. 다른 부서 사람들을 만나서 근무지를 옮겨보도록 얘기를 꺼내봐."
"선배, 나는 다 버릴 수 없어요. 내가 어떻게 지금껏 버텼는데요. 나는 지금 당장 자리를 옮긴다고 해도 새로운 자리에 적응할 기력도 없다고요."
그는 심각성을 나보다 더 크게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평화로운 나날들이 어서 오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던 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 시간이 무작정 지나가길 원하는 나를 보고 그는 호통을 쳤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는 중에도 그는 ‘I’ (나) 시점으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상황이 나아지길 바랄 수 있어? 나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구조가 바뀌길 바라? 거기서 빠져나와야 돼." 분명히 그 순간은 내게 찾아온 위험 경보였다. 마음속에서 지진이 났다.
그날 저녁 나는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사무실 불을 꺼둔 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하나, 다시 쓰고 수정했다. 마음이 수선해서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경력이 나쁘지 않다. 오만한 동료들에게 정서적으로 치이는 동안 나는 나의 가치를 오랫동안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겠다고 그날 당장 결심한다. 공수신의 호통이 나에게 액션을 만들었다. 신선한 일이었다. 변화하겠다고 결심한 뒤 하루아침에 내 태도가 바뀌니 속물스럽던 주변 동료들은 자세가 움츠러들었다. 코웃음이 나왔다.
수신의 말을 다시 짚어본다. "움직여야 해, 무언가를 계속해야 해, 돌파구를 찾고 변화하기 위해서 운동성을 유지해야 하는 거지." 그의 발언이 내게는 어렴풋이 귀를 맴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모아 함께 탁구를 치러 가자고 독려하는 그를 보며 그때의 장면을 다시 본다. 돌이켜보면 그가 처음 나를 발견한 것은 회사 복도에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혼자 회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만이라도 속한 팀 동료들이 따라와서 제발 방해하지 말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음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커다란 나무 화분 뒤에 숨어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공수신은 나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지나가는 말로 덧붙였다.
"애리 씨, 다른 부서의 동료들이랑 약속을 정하고 근황을 나누면서 차를 마셔."
자동차 보닛에 들어가 있는 작은 길고양이처럼 위험하게 몸을 숨기고 있는 나를 그가 구조하려고 애썼던 장면이다. 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막막한 마음을 이겨낼 근력을 회복하라는 뜻이었다.
심리적 탈진 증세를 벗어나자 나는 그가 수작업으로 핸들을 깎아놓은 탁구 라켓을 들고 그의 제안에 따라 스포츠 클럽으로 향한다. 운동하는 동료들은 마음도 건강했다. 이들이 나를 트레이닝시켰고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넓혀놓았으며 나는 정기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서서히 다시 소셜 활동을 재개했다. 근육을 쥐어짜며 운동을 하고, 무력감에 한없이 내려앉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짜내며 나는 이제 강해질 일만 남았다고 다짐했다. 숨을 쉴 틈이 조금 생겼다.
오늘 그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나는 그에게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배, 모두 다 상어처럼 그렇게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살 수는 없어요. 나처럼 거북이거나 나무늘보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는 대답했다.
"거북이걸음으로라도 천천히 움직여야 해. 무언가를 향해서. 그건 자신을 위해서야."
내가 본 그의 모습은 그렇다. 혼자 긍정적이면 곤란한 사람, 조금이라도 함께 전진하고 싶어 하는 사람.
그는 나와 인터뷰를 하던 중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일주일 전, 첫째가 박사 학위 수여식을 했노라고. 초등부 로봇 올림피아드에서 학부모들의 공분을 샀던 그 아이가 일주일 전 스위스에서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학부와 석사 과정을 취리히 공대에서 마치고, 박사 과정을 로잔 공대에서 연구했다. 둘째 아이는 다음 학기면 학부 졸업생이다. 그의 얼굴에서 뿌듯함과 안도감이 드러났다. 그의 가족은 먼 길을 잘 지나왔다. 많은 것이 결여된 조건 속에서 그는 궁핍을 느낄 바에야, 그것을 동기부여의 계기로 삼았다.
공기업에서 10년이 지나도록 만년 말단 사원이었던 그와 함께 영국에서 근무를 했던 동년배의 고위직 인사들은 벌써 예전에 현직에서 물러나 있다. 50대 나이에 현역인 사람이 이제는 없다. 인생은 길게 봐야 한다고 그의 삶이 말하고 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지요? 에너지가 어느 순간 고갈되기도 하잖아요.” 하고 묻는 내게 그는 답했다. “신을 믿으면 돼. 궁극적인 신의 존재를 믿으면 감사한 마음을 유지시켜주는 절대적인 존재를 놓지 않게 되지.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모든 일의 시점이 달라져. 나의 존재는 끌려가게 되는 거지, 그 중심으로.” 흔들리지 않는 방향성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믿는 신앙의 힘이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는 그 어느 종교이든 종교가 필요하다는 언급을 하는 그를 향해 내가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자, 그는 이 말을 덧붙였다.
“생각을 바꾸면 아픈 게 덜 아파. 한번 해보라 그래.”
오늘도 나는 그와 함께 출석하는 주간 요가 수업을 마치고 ‘나마스테’라는 인사를 했다. ‘안녕’을 실천하는 자 공수신, 운동성이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 준 선배의 모습은 풍파와 어려움을 웃는 얼굴로 넘어온 고수의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거북이걸음’ 같은 기록을 남기고자 그의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한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가 되어주길 바라는 나의 마음을 또한 이 글에 실어 넣는다.
*참고로 공수신이라는 이름은 그가 직접 선택한 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