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택, 나를 위한 싸움의 방법, 미하엘라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프랑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베누아는 오히려 가톨릭 교회에 치를 떨 정도로 거부감을 보였다. 미하엘라가 그의 본가에서 가족들과 가톨릭 미사를 함께 드리러 간 날이었다. 교인들의 행동거지가 하도 희한해서 꽤 유심히 관찰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긴장한 몸짓을 하고는 목회자를 향해 얼마나 굽신거리며 머리를 조아리는지, 마치 중세시대의 연극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심리적 죄인이 된 교인들의 어깨를 마구 내리누르는 강압된 순종의 모습이었다. 억압되고 정적인 분위기의 종교는 베누아가 결국 그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지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미하엘라는 조금 달랐다. 태어났을 때에 교회의 축복을 받지 못한 생명이었고, 세례를 해줄 신부님을 수소문하느라 애를 먹었던 이 아이는 오히려 정기적으로 교회 예배당을 찾고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고 돌아왔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제도권을 벗어나 성장해온 한 영혼과, 철저히 제도 안에서 살아온 또 한 명, 둘은 이렇게 완벽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25살, 쌍둥이 언니가 먼저 집을 떠났다. 인도주의적 구호활동을 하는 기관에 근무하게 되었다. 언니는 여러 다른 나라를 다니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파트너와 함께였다. 그때 청소년 단체의 심포지엄에서 처음 만나 어느 날 그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가겠노라고 차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 엄마의 걱정을 뒤로하고 과감히 집을 나서게 했던 그 프랑스 청년이었다. 그 청년은 프랑스 정부 프로젝트에서 일을 해왔다. 곧이어 둘은 결혼을 했다.
그러던 어느 해 연말 쌍둥이 언니는 미하엘라를 프랑스로 초대했다. 오랜만에 쌍둥이가 시간을 함께 보내며 프랑스 문화를 만끽했다. 프랑스의 리옹에서 친구들끼리 모임이 있던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언니 커플과 함께 한 그 자리에서 미하엘라는 베누아를 처음 만났다. 배경도 언어도 너무 다른 사람이었지만 둘은 그렇게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각각 크로아티아와 프랑스에서.
미하엘라는 공부와 일을 병행하며 격주로 주말마다 베누아를 만나러 프랑스로 다녀왔다. 피곤한 일상이었다. 본가에서 할머니와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베누아는 미하엘라와 함께 있기 위해 크로아티아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려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둘은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의 중간 지점이었던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무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자고 의견을 모으게 된다.
엄마 레이카는 당시 쇠약해진 외할머니를 돌보고 있었다. 노년에 6년 동안이나 치매를 앓던 할머니는 한시라도 돌봄을 소홀히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미하엘라에게 말했다. “가봐, 엄마는 괜찮으니까 거기 가서 새로운 길을 찾아봐.” 레이카는 미하엘라가 새로운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에 다가가길 간절히 응원했다. 자신이 마음껏 누리지 못한 자유로운 삶이었다. 엄마는 아이들의 그릇을 알았다. 품에 가두어 놓기 아까운 아이들이었다.
엄마의 응원 속에서 새로운 곳에 정착해 구직활동을 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가며 나름의 일상을 꾸리던 시기였다. 4년 동안이나 연인 관계를 지속해온 베누아는 미하엘라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프랑스 국적 때문에 나랑 사귀고 있는 줄 알았어.”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하엘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덩달아 놀랐고, 그 발언이 짐짓 경악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연애를 4년이나 해왔는데 어떻게 너를 그렇게나 몰랐다니? 지금까지 국적 취득하려고 자길 만나는 줄 알았단 말이야?”
크로아티아는 동유럽에서도 빈곤한 나라에 속한다. 비교적 최근에 유럽 연합에 포함이 되었다지만 물가가 다른 나라보다 월등히 낮은 까닭에 통용 화폐를 유로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연인이 소기의 목적을 갖고 본인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다니. 오래전 스토리를 지금에 와서야 꺼내 듣고 있는 나지만, 그리고 베누아를 몇 차례 만나봤지만 한순간 내 마음까지 뾰족해진 게 사실이다. ‘무례한 사람 같다는 인상은 전혀 없었는데 대체 뭐지?’
독일어 문화권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자리를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잘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당분간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생각보다 구직 기간이 길어졌다. 모아놓은 돈은 기어이 바닥이 나고 있던 차였다. 어느 날 베누아의 가족 중 한 명의 결혼식에 동반 참석하러 그의 프랑스 본가에 간 날이었다. 결혼식은 가족이 오랫동안 헌신해온 성당에서 치렀다. 대가족이 모두 모인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그날 결혼 리셉션에서 성당의 신부는 미하엘라에게 묻는다. “여기 프랑스 올 때 여행 경비는 누가 냈어요?”
다름 아닌 성직자에게서 받은 질문이었다. 전통적이고 독실한 듯 보이는 그들은 누구보다 계산적이었고 동유럽에서 온 이 여성에 대하여 평소 품고 있던 선입견을 매우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내 여행 경비는 내가 냈어요. 모든 비용은 정확히 반반으로 부담하고 있고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베누아가 보인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너와의 결혼? 글쎄 눈에 그려지지 않는데?’ 그때 미하엘라는 조금 슬펐지만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마음은 어떤지. ‘그는 정직하다. 내게 솔직하게 말해준 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 지금 함께 하고 있어. 그런데 내 마음은 어때? 나는 그와 함께 있어서 변함없이 행복해.’
늘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먼저 물었다. 스스로 헷갈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남들의 판단, 사회가 명령하는 것에 생각 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는 미하엘라만의 ‘생각 매뉴얼’이었다.
‘왜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묻는 질문에 미하엘라는 이 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나는 몇 년 전 그가 오랜 연인과 함께 하고 있지만 제도적 결혼은 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를 했을 때 이 수많은 이유들이 배경에 있을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의아한 행보를 보았다. 곧이어 미하엘라는 법적인 보호를 받기 위해 ‘시민 결합’의 형식으로 파트너와의 관계를 공식화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 커플은 헤어지지도 않았고 이후 아이를 둘이나 출산했다. 매번 이 같은 결정을 할 때 미하엘라는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더 큰 무게를 두었다. 누군가의 별책부록이 되기를 거부하고 고유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지키기를 원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내가 봐도 그랬다. 남의 책에 책갈피처럼 꽂혀있는 납작하고 가벼운 사람이 되기엔 미하엘라의 존재감은 굉장히 크다. 엄마 레이카가 자전거 바퀴를 열심히 두 발로 굴려 자기 인생을 동력 한 것처럼 미하엘라가 자신의 모습을 지우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 과감한 선택에 나는 무한한 응원을 보내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조금씩 웃음이 흘러나왔다. 몇 년이 지나 아이 둘을 출산하고도 법적인 결혼 관계가 아닌 아들의 여자 친구로 남아있는 미하엘라를 지켜보며 누구보다도 조바심을 낼 사람들은 보수적인 가톨릭 집안인 베누아의 가족들이 아닌가 해서 말이다.
나에게도 그는 똑같이 조언했다. “남들이 너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100% 전부 끌어안지 마. 외부의 세계가 너의 내면보다 중요하다고 여길 이유가 없어. 나 자신이 원하는 걸, 그걸 해 내면 돼. 자신을 위해서 말이야. 누군가 너를 사정없이 반대해도. 흔들리지 말고 오로지 너 자신을 채워나가. 방어 체계를 만들어서 남들의 말을 막아 버려. 어려워도 조금씩 천천히 연습해, 거절하는 연습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나를 향해 미하엘라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누군가는 어디선가 나를 비난하고 내 의견을 손쉽게 묵살하지,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도 분명히 있어. 항상 나쁜 것과 좋은 것이 동시에 찾아올 때 사람들은 안 좋았던 것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는 습성이 있지만 말야. 그래도 괜찮아. 거기서부터 다시 자기 자신을 채워나가면 돼. 그 과정 중에 슬픈 일이 있을 테고, 또 사람을 잃게 되기도 하겠지만 확실하게 얻는 게 분명 있어. 나만의 교훈을 얻었고, 경험을 얻었어. 또한 도움을 주는 손길을 만나기도 하고 말이야.”
‘맞다. 헤매던 시절, 그날 내게 미하엘라가 결정적인 도움이 된 것처럼.’
이후 그는 제네바의 국제기구에 합격했고 엄마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안정적인 위치에 도달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2달에 한 번씩은 엄마를 만나러 크로아티아에 다녀왔다. 엄마는 딸들을 독립시키고 오랜 지병 끝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홀로 삶을 꿋꿋이 지탱했다. 곁으로 돌아오라거나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나이 든 모친을 부양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지 잘 알기에 딸들에게 그 고단함을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한걸음에 달려올까 봐.
나는 미하엘라에게 물었다. “어떤 날에는 너무도 지쳐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을 수 있잖아.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때, 그저 무기력한 상태에 갔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질문을 던져놓고 미하엘라의 말을 최대한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에게 묻고 싶었던 가장 핵심적인 물음이었다.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펜을 움직였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오늘은 세계의 끝에 다다른 것 같아도 내일은 또 다른 날이 열려. 아무런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아주 사소하고 아주 작고 단순한 걸음을 딱 한 발자국 내딛으라고 말하고 싶다.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뭐가 손에 안 잡힐 때, 일단 밥을 먹어. 그리고 내 눈 앞에 빈 그릇이 보이잖아? 싱크대로 가서 그 접시 한 장을 닦는 거야. 그다음은 그다음에 또 생각하면 돼.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한 가지,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걸음을 걸어.”
더 중요한 한 가지를 꼭 말해야 한다는 듯 그는 검지 손가락을 펼치고 덧붙였다. “도와달라고 말하는 용기가 필요해. 사람들과 걱정을 공유하고, 도움을 청해.”
좋아하는 일을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집의 인테리어를 바꾸어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렇게 자신은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필수적으로 향유해야 마음이 풀어진다고 하던 미하엘라는 이윽고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미하엘라의 엄마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3년 전, 그러니까 60세가 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을 추구하며 떠나고 오랜 병구완을 하던 모친이 떠났을 때부터 자신의 책임이 완전히 없어지자 아마도 엄마는 모든 긴장을 놓은 것 같다고 했다. 그때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여러 합병증이 동시에 왔고 많은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곧 돌아가셨다. 그동안의 생존이 하도 고달파서 모든 힘을 다 쏟았나 보다, 하는 말을 했다.
어느 날 미하엘라가 엄마의 무덤 앞에 꽃을 놓아드리기 위해 묘지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저쪽에서 산책을 하던 사람이 미하엘라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고 한다. “저, 혹시 동생이 있지 않으세요? 제가 저쪽 길에 있는 상점에서 당신이랑 똑같이 생긴 여성을 봤거든요.” 하는 이야기에 미하엘라는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아, 매우 가능성이 있는 일이네요.”
미하엘라는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농담을 했다. “내가 모르는 배 다른 동생들이 여기저기서 흩어져 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 내 부친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 이제 다 알잖아. 하하”
어쩌면 비극으로 비칠 수 있을 자신과 엄마의 서사를 농담으로 웃어 보일 수 있는 그의 내공을 마주하며 나는 그와 함께 웃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한 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오랜 이야기를 아픔 없이 꺼낼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을 믿었고, 자신의 목소리를 거두지 않았던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미하엘라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술관 카페를 걸어 나오는 길,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 말이야, 네가 나한테 어떤 선물을 했는지 아마 모를 거야.”
“응? 그게 무슨 얘기야?”
“돌아가신 뒤 오랫동안 가슴속에만 깊이 넣어놨던 우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촘촘하게 나누며 나는 이제 엄마를 제대로 추모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다시 곱씹으면서 내게 감동이 밀려왔어.”
“그게 정말이야? 이 얘기해줘서 내가 더 고마워. 네가 드러내기 힘든 이야기를 내가 자꾸만 구체적으로 묻고 또 물으면서 말해달라고 졸랐을까 봐 마음에 걸렸거든. 정말 다행이다. 오늘 받은 울림이 컸어, 다행히 우리 둘에게 모두.”
그리곤 나는 까치발을 올려 키 큰 미하엘라를 안아주었다.
— 그날 이후 —
인터뷰를 정리하기 시작한 어느 날, 때마침 출근길 회사 출입문 앞에서 미하엘라와 마주쳤다. 그때 나는 미하엘라에게 허락을 구했다. 지난번에 물어보지 않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글의 말미에 엄마의 본명을 적어도 되겠느냐고. “물론이지.”
흔쾌히 동의를 표시한 미하엘라는 엄마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내게 말해주었다. 엄마의 본명은 ‘나다 Nada’, 모국어로 ‘희망 Hope’라는 뜻이라고. “희망! 역시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두 손을 꼭 맞잡고 감동에 빠져있는 내게 그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애리, 우리 곧 너의 ‘나다 Nada’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너에게도 ‘Nada’가 있잖아. 너를 이만큼 멋지게 만들어 준 사람, 너도 누군가의 힘으로 이겨냈을거야.”
“미하엘라 넌 참 감동이야.”
그렇다. 내게도 ‘나다’가 있다. 미하엘라와 나, 우리의 품 안에 작은 희망을 소중하게 넣어준 인물들을 생각하자니 벌써부터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