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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Dec 01. 2019

제1화 여행을 가고 싶었던 건강한 청년이었다

구체적이고 단단한 인간, 줄리엔

뉴질랜드 은행 점장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에 따라 가족은 여러 도시를 이사하며 살았다. 줄리엔은 가족의 막내딸이다. 아무도 그가 멀리 유럽까지 와서 정착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22살에 솔로몬 아일랜드로 떠난 줄리엔은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단순한 이유로 외교부에 지원을 했다. ‘Desire to travel’ 여행을 하고 싶다는 열망, 그거 하나였다. 22살의 줄리엔은 본인의 바람을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첫 직장에 출근을 했지만 너무 적은 월급을 받아 들고는 실망을 했다. 도대체 여행 경비를 저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몇 달 동안 벌어들인 돈은 생활비로 마감하고 통장에 남아있는 액수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경비가 모이지 않는데 언젠가 떠날지도 모르는 요원한 여행 계획을 붙들고 있는 건 맥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외교부 기술직에 지원하는 방법이었다. 마음속으로 기대했다. ‘여행을 다닐 수 있겠지!’

여행을 하고 싶다는 소소한 그의 열망이 커리어도 함께 열어주었다. 뉴질랜드 외교부에 합격을 했고 곧이어 근무지가 정해졌다. 그곳이 바로 솔로몬 아일랜드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안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옆 나라이다. 첫 근무처는 외교 공관이었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오세아니아 안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 집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불과 몇 시간 거리의 이웃나라였지만 엄마는 딸을 타지로 떠나보내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줄리엔이 혹시라도 솔로몬 아일랜드에서 흑인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어떡하냐고 언니들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물론 줄리엔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된 사실이다.

많은 일들이 순조롭게 돌아갔다. 엄마의 걱정과는 정반대로 곧이어 그는 날개를 단 듯 더 멀리 떠나게 되었다. 젊고 당찬 청년이었던 줄리엔은 솔로몬 아일랜드에서 2년 동안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본국인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2개월 후 스위스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본격적인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뉴질랜드 유엔 대표부에서 근무했어. 외교 대사의 비서직을 하기도 했고. 수없이 많은 국가 기밀문서들을 다루기도 했지. 아, 물론 자세히는 말해줄 수 없어.”

스태프들에게 보안 통제가 걸려있는 기밀문서들은 외교관들 중에서도 몇몇의 관련자에게만 열람을 허락한다. 대사의 행정비서로 지근거리에서 긴밀하게 일해온 그는 역시나 기본기 트레이닝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입이 무겁고 남의 험담을 안 한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줄리엔은 내게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그때가 1980년대 중반이니.

“와, 너무 근사하잖아요. 결국 ‘여행에 대한 선망’이 당신을 이렇게 멀리멀리 보내 놓은 거네요? 괜찮았어요? 타지에서 겪을 모험에 대한 걱정도 없이? 진짜 용감했다. 그때가 22살.. ”  

연도를 계산하느라 눈알을 굴리고 있는 나를 향해 줄리엔이 말했다.
“그래 보여? 재밌는 일이네. 나는 내가 용감하거나 모험심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지금껏 한 번도 없는데.”


내가 현재까지 보아온 그의 모습이다. 어느 순간에도 어김없이 담백하다. 그가 지나온 궤적을 묻고 자세한 좌표를 계속 알아가고 싶어서 질문을 하는 나를 향해 담담하게 자신의 스토리를 풀어놓는 줄리엔, 잠시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줄리엔이 외교부에서 근무한 지 6년째가 되는 해였다. 출장을 다닐 일이 많았다. 그 사이 파트너와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았고 곧 결혼을 했다. 스위스에서 만난 아이리쉬 청년이었다. 외교 대사는 줄리엔의 유능함을 일찌감치 알아봤고 호흡이 잘 맞는 스태프였기 때문에 그와 다음 근무지를 함께 옮겨가는 것이 이미 확실시된 상황이었다. 그 이후에는 줄리엔이 다시 본국인 뉴질랜드로 발령을 받을 차례였다. 순환 근무를 하는 외교부의 시스템이었다.

“외교부를 그만뒀어.”
“네? 아니, 왜요?”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재차 묻던 나는 무척이나 건조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내가 근무지를 옮기면 남편이 나를 따라나서야 하는데, 거부당했어. 자기는 전업주부를 할 생각도 없고, 뉴질랜드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고 하잖아.”


의아해하는 내 심경과는 별개로 그의 말투는 건조했다. 긴 바짓단을 수선할 때 쓱싹쓱싹 가위로 잘라내는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과장하는 법이 없는 줄리엔은 우리들의 구원투수이다. 실수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온갖 팀의 동료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인사과든 재정부서이든 문의를 받았을 때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서툰 질문자가 설명을 납득하지 못하고 재차 질문할 경우 비슷한 대답을 주기 일쑤다. “그 층에 줄리엔이 이 사안을 잘 알아요. 그쪽에서 설명을 들으면 이해가 더 쉬울 거예요.” 그 누구도 패닉이 걸린 줄리엔을 발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항상 노련하게 호들갑 떨지 않고 조용히 일을 처리해서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주장이 명확하다.

모범적이고 유능한 줄리엔이 왜 커리어를 중단했어야 하는지 나는 슬슬 화가 나서 얼굴을 알지도 못하는 그의 남편을 마음속으로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일단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나는 지금 줄리엔을 인터뷰하겠다고 청하고서 그의 스토리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줄리엔과 함께 입사한 동료들은 그동안 로마, 방콕 등으로 발령을 받아 떠났다.

“결국 내가 외교부를 그만두고 가족이 스위스에 정착하기로 결정을 했어. 전업주부의 생활이 시작되었지. 아이들이 세 살, 다섯 살이 되고 이듬해에 셋째를 출산했어. 따뜻한 가정을 경영하고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 나의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아이들의 유년 시절을 애틋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어. 그렇게 한 시절이 흘렀어. 그런데 뭔가 빈 구석이 느껴지는 거야. 어른들의 세계에서 방출당했다는 기분이랄까. 아이들과 너무나 행복하지만 나는 어딘가 모르게 고립되어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어.”

한없이 행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깊은 좌절을 맛보았다고 했다. 출산 후 겪었던 산후우울증 증세는 아니었다. 이 세상에 유용하지 못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아 속이 텅 빈 시간들을 경험했다. 분명 성실하게 살고 있어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성장 곡선이 특정 지점에서 멈춘 것 같았다. 허무함에 빠진 어느 자아에게 느닷없이 우울한 마음이 드는 순간들은 그 감정이 짧든 길든 매우 힘들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예뻤고, 동시에 불어닥치는 힘든 마음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알 수 없었다. 벗어날 방도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지식도 없으면서 괜히 어설프게 의견 내지 마.” 남편은 가끔씩 줄리엔에게 핀잔을 주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11살, 9살, 3살이 되었을 때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절대적인 손길이 필요한 시간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일주일에 4일을 출근할 수 있는 자리를 용케 찾았다. 그렇게 국제기구 인사과에 비정규직으로 채용이 되었다. 서류 작업이 많은 연금팀이었다. 워킹맘 동료들이 유난히 많은 인사과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아이가 아플 때나, 부모가 학교에 참석해야 할 때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다. 곧 보험팀에서 경험을 쌓은 뒤 장학금을 집행하는 팀으로 옮기게 된다. 줄리엔의 보스는 그녀보다 10년 위의 워킹맘이었다. 누구보다 이해심 많은 인생 선배였다.

“자녀들이 참 축복받았네요. 충분히 엄마의 돌봄을 받은 이후에 갑작스럽지 않게 다시 천천히 분리될 수 있는 시간과 물리적인 환경이 가능했다니. 매우 이상적인 방식으로 일자리로 돌아왔네요.”
“우리 아이들은 그런 면에서는 운이 좋았지. 하지만 나는 같은 상황에 놓인 후배들에게 조언할 기회가 있다면, 자신의 커리어를 중단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어. 삶의 동기부여는 개인에게 중요한 일이고,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나 상호작용은 꽤 절대적이거든.”

일과 양육을 동시에 감당하면서 한때는 벅차기도 했다. 하교하는 아이들을 서둘러 픽업해서 집에 데려다 놓고 회사로 다시 급하게 뛰어와야 했던 날도 있었고 때로는 아픈 아이를 억지로 학교 교실에 들여보내야 하기도 했지만 하루하루가 신선했다. 매일 자신이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직장에서 갈등이 있다거나 여러 모양새의 스트레스를 받는 날도 당연히 있었다. 점차 새로운 일을 배워가며 작은 성취를 하나씩 해내는 날도 늘어갔다. 여느 직장인처럼 감정 그래프가 엎치락뒤치락하며 건강한 직장 생활은 지속되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보기 시작했다. 줄리엔을 향해 자꾸 반복적으로 지적했다. “당신 증상을 보아하니 갱년기 폐경이야, 당신은 지금 상태가 매우 안 좋다고. 감정 기복도 너무 심하고, 폐경이 분명해. 병원 좀 가봐.”
그럴 리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존재에게서 똑같은 얘기를 계속해서 들으니 어느 시점에는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인가? 내가 폐경일 수도 있는 건가?’

산부인과를 찾았다. 담당의는 그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당신은 아주 건강해요. 굳이 진찰하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다고요.” 검진 결과는 정상수치였다. 호르몬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직 만 40세가 되지도 않은 줄리엔을 두고 남편은 계속해서 그녀의 여성성과 관련된 언저리 영역을 뱅뱅 돌며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 마음이 상하는 발언들이었다. 가끔씩은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표현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배배 꼬아가며 반복했다.

“진짜로 의심이 들어서 산부인과에 갔다고요?” 나는 남편의 비열한 접근방식에 이미 신경이 곤두서서 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집요하게 눈썹을 찡그리며 듣고 있던 차였다. 그 와중에 줄리엔이 남편의 반복적인 지적에 그만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고 병원에 갔다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월경을 정기적으로 하는 30대 여성이 어떻게 내 몸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수 있나. 갱년기라니. 옆에 있는 남자의 심리 조종은 그만큼 끈질기고 유해했다. ‘당신은 지금 비정상이야.’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은 어느 날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 너무 뚱뚱해서 보기 안 좋아. 싫어. 매력 떨어져.”
옆에서 떠드는 부정성은 시시때때로 틈을 노리며 그녀의 자존감에 상처를 만들었다.

일자리를 얻고, 수입이 생기고,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는 줄리엔의 모습을 보고 남편은 심사가 뒤틀렸다. 자기만의 스케줄이 생기고 든든한 개인 영역이 생긴 줄리엔은 이전과 행동이 달라졌음이 틀림없다. 당차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서서히 충전시키고 있는 그녀는 더 이상 남편의 지시를 군말 없이 따르던 아내가 아니었다. 지배 성향이 강한 남자는 그걸 못 견뎌했다. 줄리엔은 그때 깨달았다. 왜 그동안 자신이 불쑥 우울감과 허망함을 느껴왔는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다.
‘지금껏 내가 현관문 신발 매트 취급당하며 살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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