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실망하는 순간
아이에게 저지른 많은 배신에 대하여 생각한다.
이렇게 차갑게 말하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순간들, 듣지 않은 말에 어- 대답하며 핸드폰을 봤던 순간들, 그러면서 아이에게는 대답을 안 한다며 다그쳤던 일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버벅거리는 아이에게 똑바로 말하라고 짜증 냈던 순간들, 저녁 반찬이 부실하여 잘 먹지 않는 아이에게 왜 이리 안 먹냐며 꾸짖었던 순간들, 딴생각하다 바빠진 등원 시간에 되려 아이에게 빨리하라며 재촉한 일들, 화는 내가 내고 있으면서 아이에게 진정하라고 꾸짖었던 일들, 걱정할 것이 아닌데 괜히 큰일이 날 것처럼 말했던 일들, 남아있는 일 생각에 빨리 좀 자라며 아이에게 짜증 냈던 일들, 산타할아버지 이름을 빌려 착한 아이를 강요했던 일들. 처음엔 하나, 둘씩 셀 수 있었는데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이 모두가 내가 아이를 향해 저지른 배신이다. 이런 나의 배신이 아이의 마음속에 남아 비뚤어진 나를 닮아가는 것 같다. 닮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을 그대로 따라 한다면 그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
언젠가 자기 전 나란히 누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꼼이야, 엄마가 꼼이한테 혹시 상처 준 적 있어?” 꼼이는 “응” 하고 대답했다. 예상했음에도 고민 없는 확신에 찬 대답에 나는 미안하다고 바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말 한마디로 풀어질 상처들도 아닌데 괜히 물어봤다는 잠깐의 후회가 들었다. 막상 대답하려니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좋을지 머뭇거리다가 너무 늦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해.” 다른 미사여구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려다 내가 초라해질 것 같아서 그만뒀다. 가해자는 할 말이 없다.
꼼이는 그런 내 대답을 들은 건지 만 건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잠이든 꼼이는 아침에 내가 깨우는 소리에 눈도 뜨지 않은 채 더듬더듬 내 두 손을 자기 양쪽 볼에 받치더니 빙그레 웃으며 깨어났다. 방 안이 갑자기 꽃 피는 봄으로 변했다. 나는 아이에게 상처를 줬는데 아이는 나에게 겨울에도 봄을 선물한다.
오늘 아침,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하며 지퍼를 올려주려고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꼼이가 문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엄마, 엄마는 왜 약속을 안 지켜? 화를 줄인다고 약속해놓고 화를 점점 많이 내잖아.”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 연막작전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정말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는지 모르겠다. 마음속에 속상함이 쌓이면 가끔 이렇게 나를 꾸짖을 때도 있다.
나는 변명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미안해. 엄마도 화를 줄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항복의 깃발을 든다. 아이를 이길 수가 없다. 사과하는 나는 마치 초등학생 정도로 작아진 느낌이 든다. 말투마저 초딩의 사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못난 나는 인정하는 척하면서 “너도 엄마가 하지 말라는 일을 좀 신경 써서 안 하는 건 어때?” 한 마디 더 하자 아이는 전투력을 상실하고 심드렁한 채로 거실로 가 태블릿을 켰다. 아이가 나에게 실망하는 순간이다. 실망하는 순간, 아이의 엄마라는 세계에서 더 이상 기대하지 못하는 포기영역이 생기는 것 같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나는 아이에게 태블릿을 지금 왜 키냐는 말도 못 한 채 눈길을 거둔다.
내가 우리 엄마에게서 포기한 부분을 생각해 본다. 딸로서 절대 기대하지 못하는 영역이 우리 엄마에게도 있었다. 그 영역은 지금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로서 변해야 하는 시점이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