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글렀다
꼼이가 잘 때가 되어 침대에서 편지를 내밀었다. 작은 편지지는 비스듬히 꾹꾹 접힌 채로 아이의 손가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자가 정성스럽게 적혀있다.
‘엄마 사랑해요 조아요 너무너무 엄마 조아요 조은말 써요 화내지 말고 꼭 안아주세요’
자기 전 양치를 하고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며 조금 놀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뽀로로 한편 보는 정도(10-20분)라고 대답하니 스타카토 걸음으로 거실 상까지 호다닥 달려갔었다. 뭘 쓰는 거야? 하는 질문에 “원래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편지를 쓰는 거야 엄마”라고 대답하더니 나에게 쓴 모양이다.
사실 어제저녁부터 몸살기가 돌더니 아침엔 목이 제법 칼칼하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아이가 후두염과 폐렴에 걸려 2주간 병간호를 할 땐 멀쩡하던 몸의 긴장이 풀렸는지 이제야 예고 없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와 비껴 아파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틀어져버린 주말 일정에 심기가 조금 안 좋았다. 아이에게 왜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그럴 거면 너 오늘 아빠랑 놀아. 엄마는 쉬는 날이야.”라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 옆으로 느껴지는 아이의 놀란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이 보였지만 쳐다보지 못했다.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이 말은 남편에게도 아무 동의 없이 아이를 전담시켜버린 꼴이 되었다. 남편은 어제 처가에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법했지만 병간호로 힘들어했던 아내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었다. 심통을 부려 얻은 휴식은 내내 불편한 마음을 동반했다.
생각보다 아이는 아빠와 잘 놀았다. 주로 아빠보단 엄마를 외치는 아이였지만 엄마 곁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한 아이는 유일하게 남은 동아줄을 잡았다. 따갑다고 밀치던 아빠 수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드라운 살결을 부비며 아빠를 다 차지하고야 말았다. 방문을 꼭 닫고 엄마에겐 들키면 안 되는 놀이를 하다가 방에서 나올 땐 내 눈치를 보는 듯했지만 표정만큼은 통쾌하고 우쭐하다. 내가 아이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가 있었다면, 아이도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았겠구나 싶은 순간이다. ‘엄마 빼고’, ‘엄마한텐 비밀로’ 하면서 아빠와 그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었다면 다행이다.
낮잠도 자고 따뜻한 담요 속에서 책도 읽는 엄마를 곁눈질로 체크하며 기분이 좀 나아 보였는지 놀다가 가끔 와서 ‘놀이진행상황’을 알려주고 간다. 그러다 엄마의 부드러운 대답을 듣고 눈이 조금 흔들린다. “엄마도 나중에 나랑 이거 해보자. 지금은 아빠랑 하고 있거든~ 아빠 다음은 엄마야. 또 하자.” 이번에도 아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날 아이는 자신이 정한 거리만큼 나에게 떨어져 있었다. 엄마의 자유시간은 보장해주면서도 엄마가 관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와서 요구하고 질문했다. 그것이 해결되면 다시 아빠 옆으로 갔다. 옮으면 안 되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던 것인데, 하루종일 적정 거리를 지키는 아이의 푸딩 같은 살을 만지지 못하니 내가 더 힘들게 되었다. 아이는 아주 매너 있는 직장동료 같았다. 그 매너에 내가 한 번 더 반해버리고 말았다.
자기 전 엄마는 감기에 걸렸으니 아빠와 붙어 자라고 하며 코가 막혀 등을 지고 누웠다. 안방은 우리 부부가 자는 더블침대와 꼼이가 자는 싱글침대가 붙어있는 구조인데, 내가 싱글침대로 가고, 아이와 남편이 더블침대에서 함께 잤다. 평소와 뭐가 다른가 싶기도 했지만 혼나던 안 혼나던 잘 때는 엄마가 팔을 뻗으면 닿는 사정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꼼이 입장에서는 천지차이였다. 불을 끄면 수다스러워지는 꼼이는 누우면 바로 잠들어 버리는 아빠와 오늘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오늘의 이야기에는 오늘 중 가장 속상한 이야기, 낮에는 이야기해주지 않는 어린이집 이야기, 가볍게 물어볼 수 없는 궁금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질문하고 확인하는 이야기가 포함된다. 이미 자는 아빠 옆에서 엄마~하고 나지막이 부르는 꼼이에게 잘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건조하게 말했더니 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숱하게 저지르는 배신의 행동이기도 하다.
몇 번 더 있던 아이의 부탁을 끝내 거절하고 잠시 후 등 뒤가 조용해짐과 함께 내 시간이 되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아이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리맡에 둔 이어폰을 끼고 마음껏 핸드폰을 봤다. 그렇게 신나게 자유시간을 즐기다 물을 먹으려고 일어나려는데 핸드폰 조명에 아이 얼굴이 보였다. 아이는 감기에 걸린 엄마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로 가까운 거리에서 내 등을 바라보며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잡고자던 팔 또한 내 쪽으로 길게 뻗어있었다. 순간 마음이 저릿했다.
아..! 난 이미 좋은 엄마가 되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