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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음내림 Sep 04. 2015

이른 새벽의 이불 킥

쪽팔려! 아직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성인들은 말한다.


어렸을 적엔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명언집 등에

나오는 성인들의 아포리즘을 볼 때마다

코웃음을 쳤었다.



나는 이렇게 나를 잘 아는데

이 동서양의 성현들은 옛날 사람들이라 그런지

역시 체면 차릴 줄만 알지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했나보다싶어


나는 그 성현들만큼 성숙한 사고를 하고 있구나 내심 자부심도 갖곤 했다.




그래서 내 방 벽에는

온갖 낙서와 그림들로 가득하다.

'I love peace'라는 오글거리는 문장부터

맘에 들었던 아포리즘들...




나는 나름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고

생각도 깊은 편이 아니냐며

늘 언쟁이 있을 때마다 나를 옳은 사람으로 두고 나에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직 생각이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운이 따라주는 건지

자신감이 넘쳐서 맡는 일을 뭐든 척척 해나갔다.


그래서 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비판을 들어도

그 사람이 연장자이건 동갑내기 친구이건

동생이건 간에 늘 새겨듣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보면

내가 어리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손가락질하며

'저거 저거 저거 저래서 쓰겠어?' 했던

그 '저거'가 내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뭐랄까 내가 좋아하는 초코민트

구슬아이스크림을 눈으로 열심히 쳐다보다가

아이스크림 스푼에 꽉 차게 담아

입에 떠 넣기 전에는

빈틈이 없을 듯 풍부한 맛을 기대하지만

막상 입에 넣어 씹어버리면

느껴지는, 상상에 못 미치는 한 귀퉁이의 아쉬움이랄까..... 허무함이랄까



그런 아쉬움인지 허무함인지 모를

감정들이 나를 자꾸 자극한다.



'콕, 콕'




뭐지? 내가 알던 소녀 같고 여리고 착하고 정의롭고 굳세고 지조 있고

온갖 맛깔스럽고 그럴듯한 수식어는

다 나를 지칭하는 것 같았던

거기에다가 재능에 비해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던 내가 거품이었나 싶은 마음.



그리고 심지어 그 재능들이

나에게만 거창한 재능이지 않았나 싶은,

사실은 요령이 가장 큰 재능이지 않았을까 싶은...





자기애였는지 자만심이었는지 모를

포장지로 나를 꼼꼼하게 감싸고서는

사방에 거울이 달린 나만의 공간에

나를 스스로 가두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안쪽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그로 인해 폐쇄된 스스로가 그 어디에서도 판단기준이 잡을 수 없어

무책임하게 '나만의 나'를 이날 이때까지 성장시켜온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니 두려움이


조금씩 스멀스멀 차올랐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고

마치 인터넷에 나오는 시답잖은 유머처럼

통용되는 이 한마디가 나에겐

요즘 가장 심각한 주제다.




난 누굴까, 내가 누구지?

나는 어떤 사람이지?



그나저나 이제 와서 이런 고민을 한다니 그렇다면

여태껏 내가 알아온 나는 도대체 누구지?

나는 어떻게 살아온 거지?




세상에 이것만큼 무서운 일이 있을까?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니...

그런데 정말이다.




내가 좋아하던 게 뭔지는 알겠는데

그걸 진짜로 좋아했는지

아니면 보여주기 위해 좋아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무서운가 보다.



나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존재의 근원이나 현재 나의 삶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등이 떠올라 생각을 정리하려 펜을 잡았다.



펜을 잡으면 글이라도 써야 하는

나는 그래서 어제 내 방 벽 한편에

또 그림을 그렸다.



총 12칸의 계단 모양을 그리고

계단에 올라서 있는 꼬마 여자애를 그리기로 했다.




총 12칸. 우리 세대는 100세 시대.

나는 식습관이 훌륭하지 않으니 1살 깎고

나는 생활 습관이 게으른 편이니 1살 더 깎고,

생각이 많아 늘 고민하는 편이니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로 1살 더 깎고,



왠지 이런저런 사소한 잡다한 일들로 수명을 깎아먹을 것 같아 1살을 더 깎았더니 96세.




한 칸당 8살.  

총 12칸.





세상에, 나는 세 번째 칸 위에 서있었다.

12칸 중에 3번째 칸에 서 있었다.



겨우 3번째 칸에 섰다니.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쫓기듯 살았던 걸까

왜 나의 그토록 소중한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정작 중요한 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이렇게 많을까?





어느 순간부터 사색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친구들에게 말로 풀어내면

친구들은 왜 이렇게 감성적이냐며

피식피식 웃는다.


그런데, 우리들이 힘껏 쌓아온 추억들 속에

우리는 즐거움도 잔뜩 있지만

나름의 철학과 나름의 정서도

꾹 꾹 담겨있지 않았었나?





어른이 된 건지 거꾸로

아이가 되어가고 있는 건지,





우리는 그 당시에 분명히 저마다의

사상과 감성을 가지고 절대

나만의 길을 가는 독보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었다.


서로의 꿈을 힘주어 말하고

때로는 손을 맞잡고 꼭 훌륭한 어른이 되자고

절대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나름대로

진지하게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했었다.





깊은 새벽의 아기자기한 감성이 가득 담긴,

빼곡한 글과 더불어 마음 역시 가득 적힌 편지를

정성껏 꾹 꾹 눌러 적어서

다음날 동이 트고 내가 등교를 하면


조금이라도 자신이 전 날 새벽에 느꼈던

순수한 감성이 달아날까 부리나케 자신의 편지를 전해주던 그들은 그런 친구들이었다.





가을은 가을대로 가을을 타고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늘 분위기에 취해

늘 서정적인 문장을 입에 달고 살던,


다 그렇게 열정적이고

꿈과 사색이 가득했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의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순수함을 갈망하는

내가 어리석은 걸 지도.





나는... 조금 뒤처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느꼈던 그날의 공기와

그날의 바람 그날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미 차갑게 굳어있었던,

나만 못 보는 풍경 들이었던 걸까?





내 방 벽 한 칸에 그려진 계단 위

단발머리 소녀는 고작 세 걸음을 내딛고

인생을 반넘게 산 듯 무엇을 이루지 못한 것 같은 조급함에 발을 동동거리고,



그 소녀를 바라보는 나는 그 소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치열하게 궁금해하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보다 더 섬세하고

눈물도 많고 감성적이던 내 친구들은


도리어 나보고 왜 이렇게 감성적이냐며

피식피식 웃다가 그들이 내게 안겨주었던

아름다운 그 시절 친구들의 마음이 담긴

새벽편지를 보여주면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자신의 지난 감성을 부정하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하얀 종이 위에 갇혀버린

그 소녀들의 예쁜 마음이 귀하고 아쉬워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가장 좋아하던

과자통에 곱게 접어서 보관해 두었던 것들인데



"버리라"며 채근하는 그 순간 왠지 나도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되어서 다시 조용히 편지를 빼앗아 접어들고는 가져왔던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밀어 넣는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어

친구들의 여렸던 마음을 추억하고자

신나는 마음으로 들고 나왔더니 다시 꺼내놓고 감상하기도 전에 한소리 들은 것만 같아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혼을 내는 어른 앞에서 쭈뼛대는 것처럼 나는 기가 팍 죽고 만다.




나는 도무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좀처럼 피부 가깝게 와 닿지를 않는다.





혹시 나만 멈추어 뒤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다른 거 다 빼고 내가 스스로 그린

'내 모습'이라는 자화상을 들여다봤을 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나는 나를 어떻게 그려보고 싶은 거지?




애초에 사람들이 모두 변해가는데 나 홀로

나만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

겁이 나지 않을 수는 있는 걸까?



오늘도 거울이 사면에 달린

내 마음속 공간에 들어가 우두커니 앉아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까지

눈에 힘 꽉 주고 관찰하고 있는데



이게 나인지, 저게 나인지,

나는 분명히 나를 보고 있는데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혼란스럽고 헤매이게 된다.



내 감정을 속이며 거짓말을 해왔던

순간들이 견고하게 쌓여

이렇게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건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건지


한 뼘 안에 나와 내가 있는데

그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진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이렇게 한없이

복잡해지는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내 인생의 통제자로, 동반자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이렇게 모든 것이 철학 문제처럼

심오하고 뜻이 깊은데


발 닿는 대로,

되는대로 단순하고 쉽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마저


일일이 뜯어보고 지웠다 쓰며

치열하게 고민하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인생이란 살면

살수록 재밌는 것 같다.


인생 공부가 가장 재미있다는 아는 분의

얘기가 어제오늘처럼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세월이 가는 속도와 맞추어 성장하지 못해

다 커버린 아이로 남겨진 나의 곁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더 공허하지만

묵직하게 느껴진다.



나는 늘 끊임없는 발견이 나를 기다리고,

끊임없는 공부와 그 속에서 더욱 

세분화되어져 가는 사람으로,

작게는 그저 내가 더욱 의식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사과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세포들 가운데

다수의 세포들이 무너지면

사과가 썩어 동그랗던 전체의

통일감이 무너져버리듯

썩어 주저앉은 그 귀퉁이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긴 한 걸까?



동심을 잃지 않는 게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어렵다는 말.

내가 "그 말을 지킨 것 같다"며 정말 힘들었다는듯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동심을 잃은 것이 아닐까?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는 내 인생에

무엇하나 버겁지 않은 생각들로

빈틈없이 채워가며 오늘도 꽤

여러 가지 좋은 생각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래도 가끔은

여전히 이불을 걷어차게 된다.

모든 순간이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느냐며

내게 습관적으로 다짐하듯 되묻는 내가

부끄러웠던 과거의 어떤 생각을 하면 마치 반사작용처럼 이불속에 내 다리를 힘차게 뻗는다.



코를 찡그리고 두 주먹을 꼭 쥐고

왠지 모르게 그렇게 된다.



이 글을 마친 지금도

나는 벌써 이불을 '벙벙' 걷어찰

얼굴 붉어지는 예쁜 추억이 두어 개는

더 생각이 났다.



이른 새벽의 이불 킥은

내 나이 몇이 되면 없어질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방안을 가득 채우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된 지금 이 시간

나는 걷어찰 이불이 꽤나 묵직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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