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에는 500년도 더 살았다는
아주 현명하고 꼿꼿한 나무가 있다.
나는 마음이 바빠 계절가고 세월가는 줄 모를 때
종종 그 나무 아래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어제와는 달라진 오늘을
실감하고는 하는데 그중 한 날이 오늘이었다.
근처를 지날 일이 있어 스쳐가다가
문득 내 발앞에 사락 하고 떨어지는
바싹 마른 나뭇잎을 보고 가을이 온줄 을 알았다.
노랗게, 붉게 그리고 나머지는 무슨 이유인지
미처 물들지 못하고 아직 초록빛 그대로인데
오늘보니 나를 기다리다가 그렇게 됐나싶다.
매 계절마다 인사하러가는데 요번 가을은
혹시 늦나싶어 날 기다려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때마침 후룩 떨구는 낙엽 잡으려 깡총뛰며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잡힐 듯 잡히지 않게
코앞으로만 떨어지니 연신 따라뛰는 내꼴이 우습다.
지나가는 지팡이 짚은 할머님이 그렇게
애쓰는 나를보고 빙그레 웃으셨는데 나는
그래서인지 오늘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하늘이 유독 높아 한참을 보려니
눈이 시큰거리길래 나무 아래 쪼르르
기어들어가 쪼그려앉아 나무 그늘새로
다시 한번, 꽤 오래 하늘 한조각 물끄러미 본다.
다시 한번 감사한 하루.
적당히 기분좋은 바람에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곧 멀어져가니 나도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적당히 노릇한 가을에 취하는 낮이다.
쉼없는 생각의 틈새에도
꼭 비집고 들어오는 옛 추억이
떠오르는 계절이고
그 계절을 흐르는 공기에 어쩐지
그리운 이의 살결을 떠올리는
쓸쓸하고도 포근한 계절이다.
그런 계절이 왔노라며
오늘 우리 동네 늙은 나무가 일러줬다.
그런 계절이 또 왔노라며,
정적과 실연하게되는 그런 계절이 왔노라며
그러니 발길 바쁜체 스쳐가지말고
잠깐 앉았다가 이 생각 저 생각 품고 가라고
늙은 나무가 일러줬다.
행운이다, 말하며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지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아이유가 부르는 소격동 듣다가
조금 더 있자고 두세곡쯤 더 듣다가 뒤돌아왔다.
언제든 잡을 수 있는 행운이
쉴새없이 사방을 휘감는 계절이 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날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