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공기가 차다.
오래된 나의 친구.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딱히 무언가 뛰어난 면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이상하게 본인 가슴을 공허해지도록 만드는 유일한
대상이라며 이따금 제 섬으로 들어가 올라앉는다.
친구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낮추고
귀를 기울이다보면 문득 바람소리가 나는 듯 하다.
흥 흥
그 친구 가슴 팍 어딘가에 그려진 까만 구멍에
움직이는 그림종이같은 바람이 끌려들어갔다가
끌려나오는 듯한 그런 억지스런 소리가 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은 있다.
시간을 붙잡아 나만 멈추게 만드는 사람,
내가 나를 멈추게 하곤 곧 사랑이라고 정한
그런 질척한 마음 공간에 들여놓은 사람이
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더니 어떻게된일인지
옛생각을 떠올리는 주기가 초단위에서
분단위로, 그리고 시단위로, 또 일단위,
월단위로 점점 늘어져가더니
언젠가부터는 그를 떠올리는 빈도수가
거의 0에 수렴하게 되어 그 사람이 사는 공간은
흡사 시들어 죽은 마음이나 다름없어졌다.
양옆 누구들 만큼이나 뜨겁고 뜨겁게
사랑하고 절절하게 드러내며 애닳아했는데
어쩐지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이 꼭 요즘은
실체없는 그림자처럼 느껴지더란 말이다.
언제든 손내밀면 닿을 수 있는 대상이었을 때에도,
도저히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 파악 안되는
먼 사람이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활활타던 그는 꼭 미지근한 어묵 국물 한 컵처럼
식어서 영 내키지않다가 언젠가부터 방바닥 구석에
축 늘어진 머리카락 한올이 되어버렸다.
굳이 치우자면 투명테이프던 휴지던
손에 돌돌 말아 치우겠지만 치우자니 아쉽고
또 놔두고 굴러다니도록 두자니
내 몸에서 나왔더래도 영 거슬리고 흉물스러운 게
정이 가지않는 그런 것 말이다.
내 사랑이 그처럼 사물화된 것이 옳거나
그르거나하는 것을 제아무도 확언할수 없겠으나
때때로 마음에 까만 구멍 그리고 다니는 저 친구를
만나고나면 나조차도 또 한번 가만히 방안을 들여다보게된다.
평상시에는 그리도 감흥없던 한올이
어째서 그럴 때는 더욱 짙고 감각적으로 보이는지.
그렇게 핸드폰 불빛만이 유일하게 둥그렇던
까만 방안에 들어와 그 한올을 이리저리
후후 입으로 불어대며 뒤집어가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목이말라 목을 좀 축이고자 물병 찾으려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탁 켰더니
잠시 눈이 실컷 부시다가 익숙해지니
방바닥의 머리카락 한올은 그저 별것없는
사람털 한올로 보이는데
한참 그 생각에 빠져 턱을 괴던 순간
'아'
하고 별맛없는 신음소리가 낮게 터져나왔다.
나는 그때 결론을 내리길,
'사람이 첫사랑에 미련을 갖는 이유가
첫실패라서구나.
일단은 자신만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두운 방안에 혼자 앉아있는 것과 같으니
실체없는 것도 어쨌든 꽤 돈독한 위로가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결국은 빠진 머리카락 한올없어도 잘 살아갈 것을
연연한다며 이따금 제 시계를 멈춰버리는 것이
꼭 어두운 방안에 들어앉아 어제 틀린 문제를
곱씹으며 되새기는 수험생같이 느껴지던 것이다.
결국 다시는 입을 수 없을만큼 작아져버린
교복단추를 잘못 끼우고는 위풍당당 학교를 가서
무안하도록 놀림을 받았던 모두가
어린 날의 첫 실수와 실패에 이끌리듯 자꾸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 다시 끼워지지않을
단추를 만지작 만지작 거리는 상상을
하는 것은 밝은 낮보다는 아무래도 까만 밤,
어두운 방안에서 이루는 게 더 또렷하고 생생했겠지.
'그래서 내 첫사랑도 늘 어두운 밤이면
그 사이 청명한 달빛처럼 유독
밝게 빛났던 것이다' 했다.
그 밤은 해가 중천인 한낮에도,
백야가 떠나지않는 한밤에도 찾아왔을 것이고
나도 그도 자꾸만 혼자서 어두웠을 것이다.
그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지만 비로소
완벽해질 것 같은 내 인생에 유일하게 완성시키지
못한 아른한 시간으로 남은
감정의 '결정체' 일테니까.
그것을 원하는대로 끼워야지만 내 인생에
오점이 남지않을 것 같으니 그저 덮어놓고
연연하게 되는 것이다.
용감하게 패를 뒤집어서
빈 껍데기인지 알맹이인지
확인해보면 될일인데도
불을 끄면 그것에 어떤 날은 기대게되니
외로워서 도저히 치워버릴 수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들 그렇게
외로움과 고독함을 착시하여 본인 삶을
채워넣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만든 환각에 들어앉아 환영을 보며
무성의 흑백 영화를 보듯 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싶다.
아름다움이라고 누군가 소리치던 것을 보고
그저 너풀거리는 낙엽인줄 알면서도 나도 갖겠다고
달려들다가 그렇게 환각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환시에 빠져 세상 모든 곳에서 중독적인 일상을
보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싶다.
중독되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힘든,
그러나 꼿꼿이 살아내고픈,
우리는 모두들 끝끝내 미숙한 존재니까.
나는 나와 누군가의 미스매칭이
나의 실패나 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휘청대면 휘청대는대로
꼿꼿하면 꼿꼿한대로
휘면 휘는대로, 굽어지면 굽어지는대로
완성이기 때문이다.
뭐,
어차피 모든 것을 완성할 수 없는 삶.
자의식 과잉이면 또 어떠랴.
내 첫사랑은 어차피 지나갔고 지나간 것은
내가 보냈던 그가 보냈던 무한의 우주속에
실체없이 나풀대는 찰나이다.
다음에는
마주앉은 친구의 술잔에 버드나무 이파리나
하나 띄워줘야겠다.
술만 마시면 습관처럼 만들어대던 환시에
오늘은 너무 빠르게 잠식되지 말고
내일 당장 내야할 공과금과 내일모레 기한만기인
빌려온 책 내용이나 다시 한번 찬찬히 얘기하자고.
이루지 못한 애절하고 절절한 첫사랑 타령하려면
옆테이블 곁눈질이나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찬찬히 마시자고.
친구야 바람이 차다.
말도 예쁜 첫사랑치고는 너무 밤중에만
찾아오는 감정인것을 깨닫고 정신 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