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가 쏟아지는 방'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단편집에 실린 다른 작품은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물이 끓기 시작한다. 아내가 냄비 바닥에 가라앉은 소금을 휘휘 섞는다. 나는 뿌옇게 소용돌이치는 냄비 안을 보며 외투에 느릿느릿 팔을 꿴다. 소용돌이가 잔잔하게 물속으로 퍼진다. 괜스레 밑단을 만지작대다 아래에서부터 단추를 잠근다. 한 칸씩 밀려 잠근 건지 윗 단추가 남는다.
“민물장어 세 마리만 사다 줘.”
매일 의식처럼 치르는 아내의 요리에는 민물장어가 필요하다. 내가 민물장어를 사오면 아내는 주저 없이 냄비에 넣고 뚜껑을 닫는다. 넘치는 생명력이 한참을 요동치지만 결국 냄비는 잠잠해진다. 아내는 민물장어 세 마리를 그 자리에서 해치운다. 무인도에 표류된 사람이 뱀을 산 채로 뜯어먹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이 의식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민물장어를 먹어야 한다. 아내에게 나는 민물장어 제공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도 못한 채 문을 나선다.
수년간 밥을 먹고 숨을 쉬듯 걸어온 길이 내 발을 가야 할 곳으로 절로 이끈다. 문득 아내가 처음 민물장어에 집착을 보인 날이 떠오른다. 사방을 돌아다녔지만 허탕만 치다가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겨우 민물장어를 구할 수 있었다. 그 가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 연휴에도 영업을 했다. 그런데 오늘, 내려간 셔터에 '임시 휴업' 안내가 붙어있다. 멍하니 글귀를 바라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눈앞이 막막해진다.
여기는 어디일까? 겨우 민물장어를 구했는데 내가 지금 선 곳이 어딘지 모르겠다. 낯선 건물, 낯선 풍경. 늘 정해진 길만 걸어온 탓에 생소한 풍경 앞에 머리가 하얗게 물든다. 어느 방향으로 발을 디뎌야 할지 몰라 한 걸음 내딛지도 못한 채 주위를 둘러볼 뿐이다.
인도에 서있는데도 차들이 바로 옆을 스치듯 지나쳐간다. 공사장 소음에 먹먹해진 귀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교복을 입은 두 학생이 내 앞에 서있다. 여기서 A 고등학교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눈만 끔뻑거리는 내게 묻는다. A 고등학교는 내가 사는 곳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어쩌다 이 먼 곳까지 와서 그 학교를 찾는 걸까? 그것도 길을 잃은 내게. 똘망똘망한 두 쌍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쭉 직진해서 걷다가 신호등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고, 계속 걷다 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때 왼쪽 길로 들어서면 슈퍼가 하나 나오고, 그 슈퍼를 끼고 돌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 길로 가보기라도 한 양 상세하게. 이상하게도 설명을 할수록 확신이 들고, 얘기를 마칠 때 쯤에는 스스로를 한 번도 길을 잃은 적 없는 사람처럼 느꼈다.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귓가를 스치는 오토바이 굉음이 신호라도 된 듯 그들을 쫓는다.
한 명이 주로 이야기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이 쨍하니 내리쬐는 햇볕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처럼 보인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 마치 살아 있는 인물화가 이 액자, 저 액자로 옮겨 다니는 것 같다.
그들은 번번이 내가 가르쳐준 길에서 벗어난다. 그럴 때마다 엉터리로 떠든 내 설명을 복기하며 의아해한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주고받으며 다시 목적지로 향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늘 나를 지나친, 그리고 내가 지나쳐간 이들 중 저런 발걸음을 가진 이가 있었나. 일상의 무기력이 다리를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걸음걸음 떼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사람이나 발이 땅에 붙자마자 새 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문득 여태껏 나는 어떻게 세상을 디뎠을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내 발목에는 그동안 아내가 먹어온 민물장어들이 칭칭 감겨있는 게 아닐까.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발목에는 아무것도 감겨있지 않다.
한 명이 사탕을 까서 다른 한 명의 입에 넣어준다. 사탕이 들어오기 전만 해도 웃고 있던 얼굴이 일그러진다. 솔잎 맛이라고 투정을 부리자 사탕을 넣어준 쪽이 자지러지게 웃는다. 덩달아 내 입가에도 웃음이 번진다. 주책 맞게 그들에게 다가가 나도 하나 달라고 하고 싶기까지 하다. 뒤따른 거리만큼 그들과 가까워진 것 같은데 손에 든 비닐봉지 안에서는 민물장어가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직은 괜찮다. 갓 잡아온 것처럼 힘이 넘치니까, 조금 지체돼도 괜찮을 거라고.
그들은 계속 걷는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웃고 공감하며 때로는 그들을 따라 한다. 그들이 본 꽃은 내가 본 꽃이고, 그들과 함께 본 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여러 번 바뀌었다. 100년이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집을 나온 지 한 시간이 채 안 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전의 삶보다 그들의 뒤를 쫓는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슈퍼를 끼고 돌자, A 고등학교가 나온다. 그들은 그 아저씨가 엄청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줬다며 웃어넘긴다.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한동안 확인하지 않은 비닐봉지 안은 잠잠하다. 한 마리는 배를 뒤집은채 죽었고 나머지는 기운이 다 빠져 요동칠 힘도 없는 상태다. 그제야 아내 생각이 났다. 발걸음을 채근하는데 그동안 모르고 지나친 주위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통닭집이던 곳이 어느새 중국집으로 바뀌어 있다. ‘짜장 1500원, 옛날 그 맛, 옛날 그 가격’ 촌스러운 간판 아래 서로의 다리를 의자 삼아 학생들이 앉아 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는 손님으로 꽉 차 있지만, 기다림이 지루하지도 않은지 학생들은 연신 웃음을 터트린다. 나는 짬뽕 두 그릇을 포장하고, 죽은 민물 장어는 공원 연못에 풀어준 뒤 집으로 향한다.
아내는 나를 곁눈질하며 “민물장어는?” 하고 묻는다. 내가 말없이 봉지를 건네자 아내는 봉지 안을 확인한다.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민물장어를 보고 마뜩잖은 눈을 한다. 하는 수 없다는 듯 맨손으로 민물장어를 움켜쥐고 냄비에 넣는다. 뜨거운 물에 던져진 민물장어가 거세게 요동친다. 아내가 재빨리 뚜껑을 덮는다. 나는 아내에게 같이 짬뽕을 먹지 않겠냐고 묻지만 아내는 말없이 냄비만 볼 뿐이다. 냄비 속 민물장어들이 요동치고, 짬뽕은 불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