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쵸족의 후예

by 재쵸

너는 자긍심 강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나쵸족의 후예라는 걸 잊지 마.


외부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신비로운 곳, 치즈랜드. 치즈랜드는 오래전부터 나쵸족과 페퍼족, 소수 부족인 재쵸족의 보금자리였다. 나쵸족은 치즈랜드를 다스렸고 페퍼족은 나쵸족을 섬겼다. 재쵸족도 나쵸족을 섬기고 싶어 했지만 그들은 분수를 아는 종족이기에 현재의 자리에 만족했다. 멀리서 나쵸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족했으니까. 재쵸족이 처음 치즈랜드에 왔을 때, 인간을 닮아 불길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나쵸 족장의 자비로 재쵸족은 치즈랜드에 정착할 수 있었다. 나쵸족과 페퍼족, 재쵸족은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을 이뤘고 그 덕에 치즈랜드는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치즈랜드에는 대대로 내려온 불문율이 있었다. 나쵸족에 여자가 귀하다는 것과 나쵸족과 페퍼족의 후계자가 동시에 잉태된 적 없다는 것.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나쵸족과 페퍼족에게 후계자라는 선물이 찾아왔다. 겹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잔치가 크게 열렸다. 모든 부족원이 모여 모닥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페퍼족의 눈먼 노파가 불꽃을 향해 다가왔다. 노파는 젊을 적부터 생각 없이 말을 뱉어서 부족원들에게 욕을 먹기가 일쑤였다. 입만 열면 욕을 먹으니 침묵하게 됐고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다. 신세대가 구세대가 되고 노파를 모르는 부족원이 훨씬 많아졌다. 신세대들에게 노파는 '침묵의 예언자'로 불렸다. 그리고 누가 부여한 건지는 몰라도 노파에게는 완벽한 서사도 있었다. 예전에 노파가 천기누설을 일삼다 천벌을 받았다고, 그래서 속죄하기 위해 말을 하지 않는 거라고. 가만히 서있던 노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쵸 족장의 꼬리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저 노파가 사람 소리를 하는 것만은 막아야 돼.' 하지만 나쵸 족장보다 노파가 더 빨랐다.

"이번에 태어날 나쵸족 후계자는 여자 아이다."

여기저기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뜻밖의 덕담에 나쵸 족장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막말은 본능과도 같아서 아무리 긴 수행을 해도 불쑥 기침처럼 튀어나오는 법이다.

"그 아이가 태어나 치즈랜드의 평화가 깨지고 나쵸족과 페퍼족은 명맥이 끊길 것이다."

순식간에 열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노파는 막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치고 빠지기 기술을 가졌다. 마치 채찍질처럼 방심한 틈에 휘둘러 당한 자를 멍하게 만들었고, 내가 맞았구나 자각했을 때면 이미 때린 자는 떠난 뒤였다. 나쵸 족장이 부들부들 떨며 반격할 만한 문구를 찾는 사이에 노파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채찍이 지나간 자리는 얼얼했고 얼마나 핥아야 고통이 옅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쵸 족장은 다음에 꼭 먹이고 만다며 으르릉, 이빨을 드러냈다.


나쵸족과 페퍼족의 후예가 태어났다. 노파의 말대로 나쵸족의 후예는 여자아이였다. 나쵸 족장은 양가감정을 느꼈다. 손이 귀한 여자아이임이 기쁜 것 반, 노파가 찍어 맞춰 분한 것 반. 부족원들도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 노파의 두 번째 예언은 끔찍하고 두려웠으니까.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탄생 잔치를 성대하게 열었다. 아무도 노파를 부르지 않았으나 노파는 언제 온 건지 수제 황태포를 주워 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세대들은 두려움과 경외 어린 눈으로 노파를 바라봤다. 처먹지 마! 처먹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나쵸 족장은 간신히 억눌렀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나쵸족과 페퍼족의 후예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 특유의 종종걸음으로 나란히 걷는 두 후계자는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나쵸족의 후예 나쵸와 페퍼족의 후예 페퍼, 그들의 외모는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분위기는 상반됐다. 큰 머리와 근엄한 눈빛을 가진 나쵸는 어리지만 위엄 있었다. 그에 반해 페퍼는 "호롱 호롱-" 요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나쵸 족장 앞에 서서 쓰다듬으라는 듯 고개를 박았다. 노파 때문에 뒤집어진 나쵸 족장의 속이 사르르 풀리는 듯했다. 이 아이들이 컸을 때 치즈랜드의 미래가 기대됐다. 페퍼의 애교와 나쵸의 듬직함이라면 분명 치즈랜드는 더 행복해지리라.


달빛이 쏟아지는 밤, 족장은 나쵸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멀리서 들리던 ‘호롱 호롱’ 소리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페퍼가 겅중겅중 경망스럽게 나쵸 주위를 뛰어다녔다. 비록 페퍼는 신하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를 최고의 신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나쵸를 보필하기 위해 졸졸 따라다녔다. 페퍼를 무시하고 냄새 맡기에 집중하던 나쵸가 언덕이 나오자 꼭대기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고개를 쳐들고 달빛을 받으며 선 위풍당당한 모습은 그야말로 나쵸족의 후예였다.

"너는 자긍심 강하지만 고독한 삶을 살게 되겠지. 하지만 네가 나쵸족의 후예라는 걸 잊지 마."

나쵸 족장의 눈가가 찡해졌다. 새벽 감성에 젖어 뱉은 말이 들릴 리가 없건만 나쵸는 족장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쵸 족장은 괜스레 부끄러워 헛기침을 했다. 어느새 언덕배기에 도착한 페퍼가 호롱 호롱 나쵸 주위를 뱅뱅 돌았다. 나쵸는 윗입술을 씰룩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노파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태어나 치즈랜드의 평화가 깨지고 나쵸족과 페퍼족은 명맥이 끊길 것이다.' 나쵸 족장은 노파의 말을 지우려 '단순한 막말일 뿐이야.'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노파의 목소리는 아른아른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노파의 두 번째 예언이 적중한 날, 부족원들의 보금자리는 이지러졌고 혼비백산한 비명들이 이리저리 얽혔다. 나쵸 족장은 나쵸와 페퍼에게 100까지 다 세기 전에 풀 속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나쵸가 듬직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페퍼는 호롱 하며 고개를 박았다. 나쵸 족장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깽- 하는 비명이 들렸다. 나쵸는 사내의 옆구리에 낀 채 버둥댔고 페퍼도 반대쪽 옆구리에서 호롱거렸다. 멀어지는 페퍼의 목소리와 함께 나쵸족의 후예, 유일한 여자아이는 사라졌다.



⬇'석류가 쏟아지는 방'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뒷 이야기는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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