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천재 놈들. 그 놈들이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쓸 만한 걸 다 써버렸다. 내가 23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그 작품들은 내 거였을 텐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구자가 되는 건 쉽지 않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예외다. 어릴 적부터 내 조그만 머리에서는 빛나는 생각들이 샘솟았으니까. 반짝임을 갈무리해 정갈하게 배치하고 예쁘게 다듬었다. 하지만 나는 매번 한 발 늦었다.
처음 도전한 장르는 로맨스였다.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사랑의 형태도 제각각이어서 좋았다. 그런데 키스 장면 하나를 쓰려고 해도 물 마시다가, 전쟁 중에, 뱃머리에서… 다양하게도 키스를 해놔서 표절을 피할 길이 없었다. 고심 끝에 손 한 번 잡지 않는 풋풋한 이야기를 썼다. 사랑을 믿지 않는 오만한 양반집 도련님과 총명하지만 쉽게 편견을 갖는 딸 부잣집 둘째는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다. 물레방앗간 앞에서 손끝이 닿을 뻔한 게 유일한 스킨십 장면이었지만 작품에는 긴장이 넘실댔다. 톡톡 튀는 대화와 돌고 돌아 진심이 닿는 과정은 읽는 이의 심장을 부여잡게 만들었다. 장담컨대 전 국민은 가슴을 부여잡을 준비가 돼 있었다. 출간만 됐다면! 하지만 냉정한 출판계가 내게 준 답은 ‘오만과 편견도 안 봤어요?’였다. 그렇게 국민의 심장 건강을 망칠 뻔한 비운의 명작은 서랍 속에 봉인됐다.
안 써본 게 없었다. 갱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꾸미 잡이 배에 오른 중년이 스스로의 한계와 싸우는 ‘아줌마와 바다’, 국제 몰티즈 대회로 향하는 전세기가 추락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몰티즈들이 점차 맹수가 되어가는 ‘몰티즈 대왕’과, 노인대학 출신 수다쟁이가 명랑하게 인생을 개척하는 ‘검정머리 영숙이’까지! 흡혈귀, 추리물, 시간 이동물… 아무도 개척하지 않은 장르는 어디에도 없었다.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판타지!
봉걸은 까막눈 탈출을 위해 늦깎이 학생이 된다. 학기 첫날부터 할아버지가 글도 모른다며 봉걸에게 놀림이 쏟아진다. 봉걸은 '보릿고개도 이겼는데 이쯤이야'라며 꿋꿋이 버틴다. 그런 봉걸에게 혜린과 하준이 손길을 내민다. 그 계기로 봉걸, 혜린, 하준은 삼총사를 결성하고 세대를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봉걸이 입학한 재궁 초등학교는 비밀 마법 학교였다. 첫 마법 수업에서 봉걸은 타고난 재능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뿐만 아니라 가장 악명 높은 과목인 약초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보릿고개를 모두 겪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 다니던 시간들이 뒤늦게 봉걸의 자산이 된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도 그때가 참 좋았는데.' 추억에 잠긴 봉걸이 남몰래 눈물을 훔친다.
평화도 잠시, 악의 세력들이 수시로 학교에 쳐들어온다. 삼총사는 바바리맨, 만취해 노상 방뇨하는 아저씨, 유괴범을 무찔러 학교의 영웅이 된다. 하지만 봉걸에게도 근심이 있었다. 봉걸은 학교에서는 우상이지만 집에서는 72살 어린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부끄러운 존재였다. 가족들은 봉걸이 동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느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된 봉걸은 학교와 집에서의 괴리에 갈피를 못 잡는데… 세대 갈등과 노인 소외, 가정 불화를 마법이라는 비현실적 도구를 이용해 환상적으로 풀어낸 완벽한 한국형 판타지, 내 인생의 역작! 7권을 끝으로 집필을 마쳤고 내내 골머리를 앓던 제목만 정하면 끝이었다. 번개를 맞은 듯 박봉걸과 게르마늄 팔찌가 떠올랐을 때 나는 직감했다. 이건 대박 나지 않을 수가 없다고. 그리고 얼마 뒤 해리포터가 출간됐고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빨간 볼펜으로 공책에 빽빽하게 제인, 헤밍웨이, 윌리엄, 몽고메리, 롤링을 적어 내렸다. 또박또박하던 글씨는 점점 광기에 휩싸였다. 일찍 태어나면 다야? 호미로 밭 매듯 종이를 찍어 갈겼고, 동강 난 볼펜이 잉크를 뿜었다. 눈은 발갛게 물들었고 입에 들어간 잉크는 비릿했다. 나는 명작 파괴자로 다시 태어났다.
⬇'석류가 쏟아지는 방'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뒷 이야기는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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