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사라졌다

by 재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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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가 쏟아지는 방'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단편집에 실린 다른 작품은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아빠가 사라졌다. 인형의 집을 구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빠는 매년 내 생일마다 내가 원하는 선물을 안겨줬다.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반드시 가져다 주었다. 작년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공주 인형을 사달라고 했다. 그건 아빠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나보다. 집을 나간 아빠는 며칠이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나는 그동안 선물이 없어도 좋으니 아빠가 어서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그날이 생각난다. 하루 중 해가 가장 강한 시간이라 초가 반이나 녹아 내렸었다. 엄마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더는 아빠를 기다리겠다고 고집 부릴 수 없었다. 엄마와 가정부 언니의 생일 노래가 끝나자 마지못해 초를 불었다. 케이크 위로 알록달록 촛농이 얼룩졌다. 엄마는 고상하지만 심드렁한 투로 들어가자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언니가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엄마를 뒤따랐다. 마당에는 나 혼자 남겨졌다. 공기는 따가울 정도로 건조했고, 찌푸린 눈 사이로 들어온 빛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뜨겁게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아빠가 돌아왔다. 커다란 선물 상자를 옆구리에 안고서.

작년처럼 아빠는 돌아올 것이다. 매일 아빠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빠 없는 생일을 맞았다. 모든 게 작년과 같았다. 제대로 눈도 못 뜰 만큼 강렬한 태양과 커다란 케이크, 선물 꾸러미들. 그리고 내 생일임에도 웃지 않는 엄마와 피로해 보이는 가정부 언니까지. 아직 케이크가 촛농으로 아롱지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위안했다. 하지만 초가 반 이상 녹아 내리자 눈시울이 찡하게 붉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그때 커다란 아이스크림 노점을 끌고 아저씨가 왔다. 태양 아래 모든 게 그림자로 보여서 나지막이 아빠, 하고 불렀다.


아저씨는 우리 집 마당에 아이스크림 가게를 냈다. 낡은 천막을 두른 노점에 허접한 가판대가 전부였지만 꽤 인기가 좋았다. 슈퍼에도 없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싼 가격에 팔았으니까. 게다가 아저씨는 아이들의 ‘밥’이었다. 생떼에 가까운 애원에 아이스크림을 4층까지 쌓아줬고, 꼭지만 남은 콘을 일부러 떨어트려도 바보처럼 또 퍼주기까지 했으니. 자연히 조용했던 우리 집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점령했다. 나는 아저씨가 온 뒤로는 마당에 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당을 지나야 할 때면 아저씨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렇게 무시당하면서도 아저씨는 번번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가지 않겠냐고 어눌하게 물었다. 초코 맛, 딸기 맛, 바닐라 맛… 통에 담긴 모든 맛을 읊을 기세였다. 참을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목소리도, 내게 꽂히는 부러움 어린 시선들도. 도망치듯 마당을 벗어났다. 쾅- 등 뒤로 세게 문이 닫혔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잠시 멎었다가 다시 귓가에 윙윙 맴돌았다.

거실 소파에서 스르르 잠드는 순간이 좋았다. 엄마는 내가 낮잠 자는 걸 싫어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총천연색으로 물든 하늘빛이 거실 창을 투과할 때쯤에야 잠에서 깼다. 감길락 말락 한 눈꺼풀은 두꺼운 솜이불처럼 기분 좋게 무거웠다. 머리맡에서 노을빛에 물든 내 얼굴을 바라보던 엄마가 '더 자려고? 아빠에게 말씀드려야겠다.'라고 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엄마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물론 아빠는 혼내는 시늉만 했지 눈에 깃든 장난기를 숨기지 못했다. 우리 가족만의 가짜 훈육이 절정에 이르면 엄마는 우아하게 아빠를 말렸다. 돌이켜보면 엄마도 다 알면서 모른 체했던 것 같다. 화기애애한 가짜 훈육이 끝날 때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꽤 균형이 맞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아빠는 사라졌고, 그 자리를 아저씨가 비집고 들어왔다. 정삼각형처럼 꼭 맞는 우리 집은 중심축을 잃고 기울었다. 나는 마음껏 낮잠을 잤고 엄마는 클래식 선율에 아이들의 소음을 묻었다.


햇빛이 옅은 잠 위로 쏟아졌다. 꿈이 달아나려던 차에 어둠이 드리웠다. 찡그린 얼굴이 평온을 되찾았다. 다시 잠에 빠지려는데 등골이 서늘했다. 창 밖에 아저씨가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려고 일렁이는 햇빛을 막고서. 아저씨의 땀에 젖은 남방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노을을 머금은 부스스한 고수머리는 초장 찍은 브로콜리를 연상케 했다. 창가로 성큼성큼 다가가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아저씨가 홱 고개를 돌렸다. 태양이 아저씨의 까만 얼굴을 하얗게 삼켰다. 커튼으로 손을 뻗었다. 아저씨가 다급하게 입을 벌렸다.

"아.. 아.. 아이스크림 먹지 아.. 않을래?"

병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경멸스러운 표정을 감추는 대신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쳤다. 아저씨가 비굴할 정도로 아이스크림을 주려고 안달인 이유를 알았다. 늘 이리저리 방황하던 불안한 시선 끝에는 엄마가 있었으니까. 풍성한 머리칼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우리 엄마가.

엄마는 아름다웠다. 풋사과같이 싱그러운 언니도 엄마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사람들의 눈과 입은 늘 엄마를 찬송했고, 사뿐한 걸음걸이는 보는 것만으로 황송했다. 나는 내 미래의 모습이 엄마이기를 바랐다. 엄마는 누구나 바라지만 역설적으로 누구도 꿈꾸지 못하는 존재였다. 너무 완벽해서 때때로 딸인 내게도 멀게 느껴졌으니까. 게다가 엄마에게는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빈자리를 차지한 아저씨가 엄마를 꿈꾸고 있었다. 자격이 없는 걸 알기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지만 눈빛만은 숨길 생각 없이 솔직했다. 까만 얼굴이 벌겋게 익은 게 뙤약볕 때문이 아니라 엄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문 틈새로 스르르 뱀이 들어오듯 언젠가부터 아저씨가 집 안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재료가 떨어졌다는 같잖은 핑계와 함께였다. 운이 좋으면 엄마와 마주치기도 했다. 굳은살이 촘촘히 잡힌 뭉툭한 손에 우리 집 과일을 들고서는, 엄마를 보고 또 봐도 황홀한지 아예 넋을 빼고 있었다. 과일도, 개미 알 같은 아이들이 점령한 마당도, 그리고 엄마도 모두 우리 거였다. 아빠 거였다. 항상 내가 원하는 걸 선물했던 아빠가 이번 생일에 안겨준 건 흉측한 여왕개미였다. 매일 마당에 바글바글 알을 까는 여왕개미.

아저씨가 엄마에게 넋이 나간 틈을 타 조용히 마당으로 향했다.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노점의 천막과 가판대가 접혀 있었다. 가판대에 빼곡히 적힌 엉터리 맞춤법은 엉망진창이 된 우리 집 같았다. 가판대를 쓰러트리고 마구 짓밟았다. 스케치북을 찢어 만든 허접한 가판대에 잔디 물이 스몄다. 모두 내다 버린다면 아저씨는 사라질 것이고, 나는 생일 선물을 받지 않은 셈이 된다. 그러면 아빠도 돌아올 것이다. 아이스크림 통 뚜껑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등 뒤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바로 옆에서 잔디가 짓이겨지는 것처럼 발걸음이 생생하게 가까워졌다. 툭, 어깨에 닿는 손길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뭐해?”

가정부 언니의 말간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저녁 바람이 땀을 식혔다.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맥이 풀려 비틀거리자 언니가 나를 붙잡았다. 언니의 괜찮냐는 말이 공기처럼 희미하게 전해졌다.

“아저씨가 틈만 나면 재료가 떨어졌다고 하는 게 거짓말 같아서, 확인해보려던 참이었어.”

언니가 웃음을 터트리자 풋사과 같은 얼굴은 더욱 싱그러워졌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과즙이 튀듯 주변 공기를 상큼하게 물들였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아저씨는 사모님을 좋아하니까. 너도 아직 애는 애구나.”

“그건 나도 알아. 나는 그저… 마음에 안 들 뿐이야.”

뭐가 그리도 웃긴지 언니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부루퉁 튀어나온 내 입술을 따라 하며 약하게 뺨을 꼬집었다.

“한 번 확인해보자, 그럼.”

드르륵- 경쾌하게 아이스크림 통이 열림과 동시에 쾅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미처 안을 보기 전이었다. 언니의 가늘고 긴 손 위로 뭉툭하고 까만 손이 얹혀 있다. 소리 없이 나타난 아저씨가 우리를 싸늘하게 응시했다. 발끝부터 얼어붙게 하는 소름 끼치는 눈빛이었다. 아저씨는 우유와 과일이 담긴 봉지를 아이스크림 통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췄다.

“오늘은 아이스크림이 다 떨어졌어. …곧 채워 둘게.”

늘 불안하게 방황하던 아저씨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뱀 같은 눈동자가 날 옭아매 옴싹달싹 못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들어가라는 듯 빤히 날 내려봤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숨죽여 걸었다. 닫히는 문 틈새로 아저씨의 뒷모습과 굳은 표정의 언니가 보였다. 탁- 깔끔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숨을 몰아쉬었다.

요리하는 언니의 등이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아저씨는 계단 기둥에 기대 부엌을 보고 있다. 엄마가 아저씨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조금씩 아저씨의 영역이 넓어지는데 모두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칼집이 난 두꺼운 고기와 브로콜리를 곁들인 버섯 요리가 식탁에 올랐다. 언니는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새우가 구원이라도 되는 양 굽는 데 매달렸다. 엄마가 칼질을 하자 고기의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접시에 핏물이 번졌다. 한 점 찍어 입에 넣자 엄마의 주름 하나 없는 고운 얼굴이 구겨졌다.

“좀 질기네. 평소랑 다르게 조리했니?”

언니는 파르르 떨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가 다시 칼질을 했다. 진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엄마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피부와 붉은 피의 대조가 선명했다. 엄마는 접시를 모두 비웠다. 나는 기둥 뒤에 선 아저씨가 신경 쓰여 브로콜리 몇 개를 먹은 게 전부였다. 언니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냈다. 엄마 것은 청사과 맛이었고 내 건 버터 맛이었다. 어느새 아저씨는 사라져 있었다. 급격히 허기가 몰려왔다. 입 안 가득 들어차는 버터향에 긴장이 이완됐다. 엄마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언제나 내 편이었던 아빠도 내 아이스크림 취향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기에 버터 맛이 뭐가 어떻냐고 말하는 대신 먹는 데 열중했다. 혀끝에 감도는 풍성한 버터 향이 무척 달았다.

꿈에서 아빠는 해를 등지고 서 있었다. 눈도 잘 떠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아빠를 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아빠는 빛에 삼켜진 듯, 끝내 볼 수 없었다. '인형의 집은 필요 없어요, 그냥 아빠만 있으면 돼요.' 아무리 입을 벌려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잠에서 깼을 때는 목이 잠겨 있었다. 고요한 방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 쌓여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 방으로 향했다. 언제나 열려 있는 언니 방은 어느 밤이든 나를 반겨줬다. 나는 언니의 졸린 목소리가 좋았다. 내게 내어준 침대 한편은 언니 목소리만큼이나 포근했다. 그런데 언니 방은 잠겨 있었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뒤로도 굳게 잠긴 언니 방은 열리지 않았다. 언니와 같은 밤에 머물지 못하고 돌아가는 날이면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언제 돌아오는 걸까? 기약 없는 그리움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나는 혼자 견뎌야 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됐다. 아직도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만이 아빠가 존재했음을 증명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많은 것이 변했다. 사진 속 꼬맹이는 중학생 때 엄마 키를 제쳤고, 이제는 이 집에서 가장 키가 컸다. 왜소하고 볼품없는 아저씨보다 더.

언젠가 다큐에서 뱀에 관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뱀은 자기보다 몸집이 큰 동물을 먹기 위해 단식을 하며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때 왜 나는 아저씨가 생각났을까? 파블로프의 개처럼 뱀만 떠올리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아저씨와 내 키를 가늠했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아저씨의 아이스크림 가게는 점점 손님이 줄더니 어느 시점부터 아무도 오지 않았다. 더 이상 재료 핑계를 댈 수 없게 된 아저씨는 자주 밖에서 서성였다. 늘 엄마를 향하던 시선이 내게 옮겨온 건 그즈음이었다. 시선이 노골적으로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저씨가 내게 바라는 게 뭔지 맞춰보라는 듯. 낮잠을 자다가도 뱀이 스멀스멀 몸을 스치는 것 같아 자주 깼다. 어김없이 커튼 너머 실루엣이 나를 훑고 있었다. 나는 항상 긴장해야 했다. 언제 집어삼켜질지 몰랐기에.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다. 준비를 마쳤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다시 누워 폭신함을 만끽하려는데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팔에 털이 곤두섰다. 반사적으로 창문을 봤지만 커튼이 쳐져 있었다. 하지만 터질 것 같은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을 만질 수 있다면 아주 작게 뭉치고 싶었다. 주먹만 한 심장에 온 세상이 흔들렸기에. 더 작게, 티끌만큼 뭉쳐서 평온을 찾고 싶었다. 나는 아저씨보다 크다, 내가 아저씨보다 훨씬 더 크다….

"주문이라도 외워?"

문가에 선 아저씨가 여유롭게 나를 내려보았다. 한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일어나 침대 머리로 몸을 물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몸을 옥죄었다. 아저씨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눌한 말투의 주눅 든 아저씨는 이제 없었다. 자각하지 못한 새 생각보다 더 많은 게 변했음을 이제야 알았다.

아저씨가 씩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철렁- 침대 외곽에서 시작된 파동이 전해졌다. 처음으로 아저씨가 건넨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무언의 압박에 한 입 베어 물었다. 혀에 버터 맛이 감돌았다. 아저씨의 가판대에서 버터 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생들에게 수요가 없는 맛이니까. 벌벌 떨리는 손을 들키고 싶지 않아 힘을 주자 와삭- 콘이 부서졌다. 가루가 교복 상의와 치마에 눈처럼 내렸다. 얼굴에 꽂혀 있던 아저씨의 눈길이 가루눈을 따라 옮겨갔다. 가슴에서 허리를 타고 허벅지로, 발끝까지. 아저씨는 때를 살피는 뱀이었다. 나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몸집을 늘리려고 준비 중인 뱀. 결국 나는 천천히, 한 입에 삼켜질 것이다. 애써 웃었지만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가… 감사합니다, 아저씨.”

“채우려면 비워야 하는 법이니까.”

아저씨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아저씨의 눈이 스치는 자리마다 끈적임이 묻어났다. 몸을 숨기고 싶었다. 적어도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만이라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뿐이었다. 입 안을 메운 고소한 버터 향에 질식할 것 같았다. 다 먹은 뒤에도 버터 향은 오랫동안 입 안에 맴돌았다.

울렁대는 속 때문에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서려는데 가정부 언니와 아저씨의 말소리가 들렸다. 언성이 점점 높아지더니 둔탁한 소리가 크게 났다. 비명 소리가 집을 울렸다. 몇 년 전 언니가 아이스크림 통을 연 날, 요리하는 내내 덜덜 떨던 게 떠올랐다. 지금 내 모습이 그때 언니의 모습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마와 카디건 주머니를 더듬었다. 가방을 벗어 떨리는 손으로 지퍼를 열었다. 차곡차곡 정리된 가방 속을 마구 헤집다 거꾸로 들고 털었다. 쏟아진 물건 틈에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아저씨가 나타났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더없이 차가웠다. 나도 따라 웃으려 애썼지만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게 실룩였다. 아저씨가 다시 언니 방으로 들어갔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내리치는 소리에 마음이 급했다. 1,1,2. 버튼 세 개만 누르면 되는데 자꾸 엉뚱한 숫자가 눌렸다. 아저씨는 중간중간 방에서 나와 나를 감시했다. 몽둥이질과 비명 소리가 끊겼다 들리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완전히 비명이 멎었다. 구해달라고 쓰고 싶은데 손은 내 통제를 벗어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뭐해?”

어느새 돌아온 아저씨가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었다.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웃어야 한다고 본능이 말했다. 아저씨는 그런 내가 재밌어 미치겠다는 듯 킬킬 웃어댔다. 바보같이 왜 문자를 못 보냈을까. 오타투성이어도 전송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안방에서 엄마가 나왔다. 아저씨를 보자 엄마의 우아한 얼굴이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아저씨가 껄렁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뭘 그렇게 찌푸리시나? 인상 좀 펴지?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길라.”

아저씨의 희롱에도 엄마는 동요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없는 사람 취급했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입 안에는 아직 버터 잔향이 남아 있었다. 아저씨의 눈이 싸하게 얼어붙었고, 입꼬리에 웃음이 사라지려 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지금이 남은 우리 가족을 살릴 마지막 기회였기에. 아저씨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가슴팍에 머리를 부볐다. 아빠가 삐칠 때면 지금처럼 애교를 부렸다. 그럼 아빠의 근엄한 얼굴은 바로 무너져 내렸다. 아빠가 없으니 다시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저씨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보다 훌쩍 큰 나는 땅에 머리를 처박은 기린처럼 우스꽝스러워 보일 테지만, 계속해서 개처럼 아양을 떨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엄마만이 이 쇼에 동참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처음으로 날 향해 솔직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꼽지만 참는다는 듯, 다 아는 네가 고생이 많다는 듯. 그리고 내 머리칼에서 손을 떼고 엄마에게 말했다.

“꺼져줄 테니 그동안 일한 돈이나 주쇼.”

아저씨는 어느 날 갑자기 마당을 차지했다. 우리 집의 모든 걸 바꾸고 무너트렸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를 똑바로 응시했지만 일렁이는 광기에 주춤하며 물러섰다. 나는 숨죽인 채 그저 바랄 뿐이다. 이 순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비록 아저씨가 떠난 폐허에 반쪽뿐인 가족만 남을지라도. 다행히 엄마는 방에서 현금 다발을 들고 나왔다. 아저씨가 피식 바람 빠진 풍선 소리를 냈다.

“장난질 그만 하고. 더 줘야지? 얘기가 다르잖아?”

엄마의 눈동자에서 타오른 작은 불꽃이 질끈 감은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엄마는 섬섬옥수 같은 손을 가슴에 얹고 호흡을 골랐다. 심장의 요동이 전해지는지 손이 더 심하게 떨렸다. 결국 엄마는 방에서 돈을 있는대로 챙겨 나왔다. 아저씨가 킬킬 웃으며 돈다발을 능숙하게 셌다. 하나, 둘, 셋… 여덟.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추고 몇 장을 더 셌다. …열넷, 열다섯. 용돈이라는 말과 함께 만 원짜리 열다섯 장을 내게 건넸다.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아저씨가 날 향해 웃어줬다. 그 웃음은 ‘넌 영원히 몰라야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잘 지내라. 잘 지내쇼.”

아저씨는 휘파람을 불며 집을 나섰다. 아빠가 돌아왔던 날처럼 햇볕이 강하게 쏟아졌다. 화창하고 평화로운 풍경으로 걸어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은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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