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담장에 앉아

by 재쵸

실에서 희미하게 주판 소리가 새어 나왔다. 미닫이 홈의 거슬거슬한 감촉이 문을 열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 같았다. 복도 밖까지 주판 소리가 선명하게 퍼졌다. 진주는 성큼성큼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는 표정과 달리 동그란 이마가 진주알처럼 반짝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음에도 소년은 아래로, 아래로 빠져들었다.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주판알들이 소년의 정신세계 같아서 진주의 잇새로 비웃음이 삐져나왔다.

"담임이 너 과학 경시대회 참가서 내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얇은 은테 안경이 주륵 흘러내렸다. 진주가 소년과 눈이 맞은 순간 든 생각은 '묘하게 짜부라져 비추던 안경 너머에 저런 눈이 있었구나'였다. 소년은 콧잔등에 걸린 안경을 올리지 못한 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허둥대며 주판알을 튕겨대지만 규칙적으로 반복되던 수식에 자꾸만 변수가 끼어들었다.

"난 전달했으니 간다."

진주가 소년에게서 등을 돌렸다. 뒤늦게 소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지만 진주에게 가 닿지는 못했다. 멀어지던 진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교실에는 주판 소리만 존재했다. '벌써 교실을 나가지 못했을 텐데… 아닌가?' 진주가 떠난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지 주판 소리가 묘하게 늘어졌다. 소년이 힐끔 고개를 들었다. 멀어진 발걸음이 다시 소년에게 가까워졌다. 소년은 바짝 몸을 웅크리고 주판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피부로 와닿는 따가운 시선에 소년의 몸이 떨렸다. 진주는 소년이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본 아기 원숭이' 같다고 생각했다. 책상 위로 길게 드리운 그늘이 소년을 집어삼켰건만 진주가 볼 수 있는 건 소년의 단정한 뒤통수뿐이다. 진주는 알고 싶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아까 맞췄던 소년의 눈이 진주를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무지 소년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주의 벌린 입술 사이로 투명한 벽이 가로막은 듯 소리가 형상화되지 못했다. 붕어처럼 입술을 움찔대 봐도 여전히 소년의 이름은 희미했다.


소년은 공기 같았다. 존재한다기보다는 공기처럼 교실을 맴도는 쪽에 가까웠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수석으로 입학한 소년은 시험마다 줄곧 1등을 차지했다. 교탁 앞에, 강당에, 교내 티비에 상을 받기 위해 선 소년은 다른 세계에 사람 같았다. 차분한 갈색 머리칼과 어울리는 생김새는 도수 높은 안경을 썼음에도 돋보였다. 덕분에 소년의 숫기 없는 성격은 신비감으로, 반쯤 넋 빠진 눈빛은 여유로움으로 포장되었다. 쭈뼛대며 한 마디씩 건네어도 답을 못 듣기 부지기수였지만 호감을 한 겹 쓴 눈에는 그런 점마저 특별해 보였다.

평범한 아이들만 소년을 알아본 건 아니었다. 서열 맨 위로 올라가고 싶은 이들에게 소년은 일종의 사다리였다. 장난감처럼 소년을 가지고 놀다 보면 두려움과 경외는 자연히 뒤따를 테니. 소년이 천재 일지는 몰라도 나사 하나 빠진 놈에 불과하기에 밟힌다고 꿈틀 할 리 없었다.

그들은 지나가며 한 번씩 툭툭 소년을 건드렸다. 건드림이 괴롭힘이 되는 내내 소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선망의 대상에서 누구나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괴롭힘은 서열 피라미드를 타고 평범한 아이들에게도 향유 거리가 되었다. 피라미드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노라면 자신은 바닥에 깔리지 않았다는 안도와 우월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피해자답게 굴지 않았으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산뜻한 유희. NPC에게 욕을 한다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듯이 가볍게 즐기기만 하면 됐다.

안전한 장난감은 금세 질리기 마련이었다. 소년 덕에 피라미드 꼭대기에 군림한 이들은 소년의 반응을 뽑아내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었다. 하지만 소년을 동요케 할 수 있는 건 주판뿐이었다. 그들은 주판을 뺏기로 했다. 소년을 둘러싼 그들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교집합을 이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전조 하듯 주판알을 더 빠르게 튕겼다. 약간의 실랑임 끝에 주판은 소년의 손을 떠났다. 긴 적막이 흘렀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소년에게 무리 중 우두머리가 선심 쓰듯 말했다.

"돌려달라고 해봐. 그럼 줄게."

소년이 작게 웅얼대자 우두머리는 과장스럽게 들으려는 시늉을 했다.

"도.. 돌려줘."

우두머리는 대답 대신 주판을 짤랑짤랑 흔들더니 탬버린을 치듯 반대편 손으로 두드렸다. 소년이 팔을 뻗었다. 우두머리가 소년의 뒤에 선 녀석에게 주판을 던졌다. 주판은 소년의 머리 위로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렇게 몇 번이고 주판이 나는 동안 누구도 소년을 돕지 않았다. 반 아이들에게 이 상황은 그저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꽁트 같아 보였다. 녀석들은 소년보다 작고 왜소했으니 소년은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그럼에도 당하고만 있는 건 소년이 실은 괴롭힘을 즐기는 거라고. 그러니 더 재밌는 상황이 펼쳐지기를 모두들 한 마음으로 고대했다.

주판은 소년을 중심에 두고 자전하는 태양처럼 허공을 옮겨 다녔다.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것처럼 주판이 떠오르고 가물 때마다 소년은 어쩔 줄 몰라했다. 소년은 불행한 해바라기였다. 태양이 불씨조차 남기지 않고 타버린다면 해바라기는 어떻게 될까? 주판은 필연적으로 바닥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곧 소년은 그 문제의 답이 될 것이다. 차르르- 주판알들이 싸늘하게 시멘트 바닥에 흩어졌다. 사형 선고라도 들은 듯 소년은 가만히 서 있었다. 살짝 내려간 소년의 안경을 우두머리가 콧잔등까지 끌어내렸다. 처음으로 왜곡 없이 마주 본 텅 빈 눈에 투명한 슬픔이 넘칠 듯 찰랑였다. 소년이 반 전체를 빙 둘러보더니 고개를 떨궜다. 툭- 낙하하는 눈물은 천천히 소년을 적셨다.

"씨발, 싸구려 골동품 갖고 유난 떨고 있어, 정박아 새끼가."

소년의 뒤에 서있던 녀석이 소년을 툭툭 쳤다. 소년은 간질병 환자처럼 발작하기 시작했다. 제 멋대로 떨리는 사지육신을 감당하지 못한 소년은 마침내 픽 쓰러졌다. 그 과정이 화면을 통해 관람하는 것처럼 이질적이어서 모두들 멍하니 바라만 봤다. 너무도 고요해서 모두가 죽음을 흉내 내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선생님 대신 통신문을 안고 진주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은 영원했을지 모른다. 앞문이 열리는 소리에 최면이 풀린 듯 교실은 혼돈에 빠졌다. 겁에 질린 훌쩍임과 죽은 거 아니냐는 웅성거림. 소년은 아름다운 푸른빛을 뿜는 돌이었다. 심심풀이로 가지고 놀던 그 돌이 실은 방사선 물질이었음을 모두가 알게 됐다. 그 뒤로 누구도 소년을 건드리지 않았다.


"주판은 왜 계속 두드리는 거야?"

딱히 대답을 바라고 물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소년에게서 이유를 듣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친근함도 괴롭힘도 주판 앞에서 무용지물이었기에. 공기라는 별명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년, 기억 저편 어딘가에는 소년의 이름이 묻혀있을지도 모르지만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멍청이, 정박아 같은 단어만 맴돌 뿐.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애가 주판을 왜 두드리는지 알아서 뭐 하려고.' 진주는 습관적으로 손톱 옆 살을 긁었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다시 혈색을 되찾았다. 뭐든 똑 부러지게 해내는 진주가 유일하게 고치지 못한 습관이었다. '한동안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정박아한테 멍청함이 옮았나.' 진주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나는 정신병이 있거든."

소년이 진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스꽝스러운 안경 너머 진지함에 진주는 꼼짝없이 사로잡혔다. 소설책에 나오는 미치광이 천재. 소년에게 완벽하게 부합하는 수식어였다. 주변에서 미쳤다고 수군대도 신경 쓰지 않는 면이 닮아서일까? 제대로 본 적 없던 소년의 속눈썹 때문일까? 어쩌면 끝으로 갈수록 불에 탄 듯 꼬부라진 속눈썹 음영 때문인지 몰랐다.

"… 독특해."

진주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소년의 곱슬거리는 속눈썹을 한 올 한 올 눈으로 따라 그렸다. 소년에게 잠시 서렸던 총기가 평소의 흐리멍덩함 뒤로 물러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년이 슬글슬금 고개를 주판으로 향했다. 진주가 소년의 앞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 걸 안 하면 불안해. 미칠 것 같아. 엄마는 주판 때문에 내 머리가 똑똑해진 거라고 하지만.."

소년이 고개를 들더니 불쑥 진주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적으로 움찔한 진주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었다. 교실에는 진주와 소년뿐이지만 소년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사실 나는 미친 게 맞는 것 같아."

소년은 더없이 진지했지만 진주는 맥이 풀렸다. '다들 너를 미쳤다고 생각해.' 진주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지는 않았다. 소년의 반짝이는 눈빛이 위로를 필요로 하는 건지, 호응을 바라는 건지 몰라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시험이 좋거든."

"……."

"다들 시험을 싫어하잖아. 나는.. 좋아. 아무도 내가 쉴 새 없이 손 쓰는 걸 이상하게 보지 않잖아. 비록 주판은 못 쓰지만. 종이를 빼곡히 채우고 계산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불안으로 잠식된 공간을 수식들이 밀어내는 것 같거든. 그러다 보면 언젠간 내가 채운 수식들이 강박을 몰아낼지도 모르잖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지 소년은 다시 고개를 박았다. 점점 빨라지는 주산 소리에 변주처럼 주판알 정렬하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진주는 소년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콧잔등까지 흘러내린 안경 덕에 왜곡 없이 소년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 선이 살아있는 아치형 눈썹, 남자다운 선을 가졌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언뜻 마당 흙먼지 속에서 피어난 아기 강아지가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에 진주의 눈길이 머문 건 끝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었다. 눈물로 온통 얼룩져도 속눈썹 끝만큼은 젖지 않을 것 같았다. 바구니에 예쁜 구슬만 골라 담듯, 소년의 곱슬 속눈썹에 투명한 눈물방울들이 맺힌다면…

"나도 그래. 손톱을 만지지 않으면 불안할 때가 있어."

낯선 손길이 이상한지 소년의 턱이 움찔했다. 그렇게 진주의 손을 치우지도, 다시 고개를 숙이지도 못한 채 주판알을 보려고 애를 썼다. 소년과 눈을 맞춘 건 단 몇 초에 불과했다. '잠깐이지만 온전히 바라봤으면서…' 그럴 수 있으면서 그러지 않는 게 진주는 약이 올랐다. 소년의 턱을 더 들어 올리자 시선이 오가는 높이가 딱 맞았다.

"넌 나와 같아."

소년의 귀가 발갛게 물들었다. 진주가 한 말 때문인지 소년을 놔줄 생각 없는 손길 때문인지 모르지만 순식간에 물드는 색채의 변화가 진주는 마음에 들었다. 주판 소리 위에 손톱 매만지는 소리가 섞여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착착- 주판알 움직이는 소리와 차르르- 주판을 정렬하는 소리, 간혹 생기는 공백을 비집는 손톱 옆 살을 긁는 소리. 말과 말 사이, 입술을 벌리지 않으면 숨 막히게 길어지는 순간을 진주와 소년이 채웠다. 애써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한 다채로운 시간들로.

진주는 그동안 강박을 억눌러왔다. 그렇게 쌓인 의식하지 못할 때면 불쑥 튀어나왔다. 거스러미를 뜯고 또 뜯어 살점이 너덜너덜해지고 손톱 사이에 피가 스며 검붉게 말라붙곤 했었다. 소년을 알고 난 뒤 진주는 강박을 받아들였다. 소년은 정박아로 불리고 공기 취급을 받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소년과 공통점이 있다는 건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소년과 진주의 처지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괄시와 앙시는 다른 듯 무척 닮았기에 그들은 언제나 혼자였다. 진주도 소년처럼 혼자 있는 걸 선호했지만, 처음으로 혼자가 아닌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소년과 함께하는 건 편안했다. 마음껏 강박을 드러낼 수 있어서, 온전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어서. 소년의 속내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진주가 소년을 느끼듯, 소년이 진주를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진주는 바랐다.

둘 사이에 침묵만 존재한 건 아니었다.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 앞다투어 이야기했고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우스운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침묵이 편한 건 대화가 불편해서가 아님을 진주는 소년을 통해 알게 됐다. 소년과는 애써 노력할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또 하나의 자신처럼 소년의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진주 또한 소년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소년이 처음 강박을 고백했을 때도 그랬다. 소년의 엄마는 항상 최고만을 원했다. 그 아래서 소년은 종종 불안함을 느꼈다. 대부분의 경우 불안은 잠시 머물다 떠났지만 언젠가부터 소년은 불안을 한 꺼풀 덮어썼다.

소년은 엄마를 따라간 주판 학원에서 이름도 생소한 주판을 처음 접했다. 소년이 조심스럽게 주판알을 옮기는 순간 소년의 엄마는 예감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천재가 될 재목이라는 걸. 소년의 엄마는 항상 최고여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주입해왔다. 차곡히 쌓인 엄마의 말 사이사이에 불안이, 초조함이, 강박이 겹겹이 쌓였다. 크루아상 반죽에 층마다 얇게 버터를 깔듯 긴 시간 엄마는 소년을 길들였다. 공들여 빵을 굽듯이. 실패하면 폐기할 수 있는 제빵과 달리 자식은 버릴 수가 없기에. 소년을 향한 애정 어린 잔소리가 켜켜이 쌓이도록, 그것들을 양분으로 아들이 최고가 되도록 엄마는 애썼다.

모순적이게도 소년이 처음 불안과 분리된 곳도 주판 학원이었다. 연습하는 동안은 오직 행위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판이 가져온 평온은 주판을 두드리지 않을 때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소년을 더 괴롭게 했다. 그래서 소년은 주판을 튕겼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었기에.

엄마의 바람대로 소년은 시험에서 1등을 했다. 그 뒤로도 각종 시험과 경시대회에서 1등은 늘 소년의 독차지였다. 이제 소년은 자신이 대체 몇 겹의 껍질을 덧쓰게 된 건지도 몰랐다. 강박은 끈끈하게 눌어붙어 이미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엄마에게는 강박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건강한 욕심'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주판을 놓지 못하는 소년을 자랑스러워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네 위에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탄탄한 미래가 펼쳐지는 거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돼. 내 위에 아무도, 누구도 없어야 살아남는 게 인생이거든."

소년은 종종 엄마가 말한 꼭대기에 대해 상상했다. 소년이 끝까지 오르는 데 성공하면 하늘에서 목을 매달 줄이 선물처럼 내려오기를. '내 위에 아무도 없을 때까지만 버티면… 자유로워질 수 있나요?' 하지만 엄마는 스스로에 취해 소년의 마음속 풍경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소년은 울컥 치미는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엄마를 죽일 듯 노려볼 뿐.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판을 놓지 못해 강박적으로 알을 튕기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게, 진짜 미친놈으로 만들어 놨으면서.' 소년은 정말 미치고 말았다. 주판 없이 숨 쉬는 법을 잊은 게 분명했다.

진주의 사정도 소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주는 좋은 성적표를 안겨줄 때에만 아빠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소년이 과도한 관심에 질식되는 중이라면 진주는 철저한 무관심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진주는 아빠가 원하는 딸이 되기로 했다.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면 갈증이 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아빠의 기준을 통과했을 때 "네가 자랑스럽다."는 그 한 마디, 짧게나마 온전히 진주에게 머물던 시선. 그게 무척 달아서, 찢어지게 목이 탈 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 같았다. 진주는 또다시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봤다.

예상보다 낮은 성적을 받았을 때, 진주는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배회했다. 자신이 손톱을 뜯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퇴근한 아빠가 지친 몸짓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엉거주춤 진주가 다가가자 아빠는 진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성적표를 건네기까지 수천번, 수만 번을 망설였다. 아빠의 시선은 떨리는 진주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너덜너덜한 손끝, 손톱 틈에 피가 낀 진주의 손은 엉망이었다. 성적을 확인한 아빠는 진주에게 다시 성적표를 건넸다. 그게 끝이었다. 아빠가 식사를 하고 뒷정리를 한 뒤 씻으러 갈 때 까지도 진주는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손톱을 뜯는 것도 잊고서. 시공간에 갇힌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 시험에서 진주는 아빠가 원하는 딸이 될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진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로는 갈증을 채울 수 없음을 깨달은 뒤였지만. 진주에게 내리는 칭찬은 더 이상 달지 않았다. 진주는 물방울을 갈구하기보다는 바다가 되기로 했으니까. 이제 강박은 오직 자신에 의해서만 발현되었고, 그건 타인에게 통제되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은 일이었다.

진주와 소년은 강박의 계기와 형태까지 똑 닮았다. 18년을 달리 산 두 사람이 이렇게 반으로 포갠 하나 같을 수 있는지. 마치 데칼코마니 같은 관계가 진주는 경이로웠다. 소년과 이야기하다가도, 침묵을 향유하다가도, 집중하는 소년을 바라보다가도 문득문득 가슴이 벅차올랐다. 돌파구 없는 강박, 순간순간 목줄이 죄여 올 때의 무력감, 졸업만을 기다리면서도 지옥 같은 현실에 매번 느끼는 좌절감, 진주는 그것들로부터 충분히 의연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만히 소년을 보고 있을 때 드는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도 몰라서 곱씹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떠오른 단어는 연민이었다. 스스로에게도 느낀 적 없는 연민을 타인에게 느끼는 자신이 진주는 낯설었다.


쨍한 햇빛이 사그라들 즈음 진주와 소년은 집으로 향했다. 우르르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나서야 누릴 수 있는 둘 만의 시간. 달에 두 번만 허용된 토요일. 경쾌한 주판 소리가 그들의 공식 테마곡처럼 깔렸다. 진주가 낮은 담장에 올라섰다. 중심을 잡기 위해 팔을 양 옆으로 뻗었다. 맨들하고 부드러운 손톱이 태양 아래 빛났다. 진주는 기분 좋게 손톱 옆 살을 매만졌다. 푸르른 하늘 아래 선 모든 게 찬란했다. 담장 아래 마구 핀 민들레들을 작은 태양으로 착각할 정도로. 문득 진주는 자신이 독립 영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소녀와 소년이 학교를 벗어나 일탈하는 영화. 별다른 내용 없이도 잔잔하게 스며 여운을 남기는 그런 영화. 손톱을 왕복하는 진주의 손놀림이 경쾌했다.

주판 소리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고 그림자처럼 진주를 뒤따랐다. 아스팔트에 벽돌 하나가 빠져있는 게 보였다. 힐끗 뒤를 도니 소년은 여전히 주판에만 고개를 박고 있었다. 소년이 자신과 가까워졌을 때 진주가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반사적으로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온전히 진주를 바라봐주는 순간, 찰나여서 더 귀중한 그 순간, 소년의 얼굴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하얗게 물든 얼굴에서 은빛 안경테만이 그가 소년임을 알렸다. 진주가 얼굴 위치를 맞춰 쏟아지는 햇빛을 가렸다. 그늘 아래 소년의 이목구비가 천천히 아로새겨졌다. 빛에 달아나 애타게 했지만, 진주가 어둠이 되자 조심스레 다가온 소년의 얼굴이 좋았다. 시야에 잔상이 남은 듯 소년은 잔뜩 찌푸린 눈을 의식적으로 깜빡였다. 아득히 멀어지는 주변의 소음은 분명히 실재하지만 더는 실재하지 않았다. 침묵이 청각을 잡아먹어서 뺨을 간질이는 머리칼만이 '바람이 부는구나' 자각하게 했다. 하얗게 익은 민들레 홀씨들이 사뿐히 날아와 홀연히 그들을 지나쳤다. 작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 중 하나가 소년의 콧잔등에 앉았다. 소년이 간지러운 듯 코를 씰룩였다. 덩달아 움직인 안경테가 빛을 반사했다. 정신 차리라는 듯. 그래서 진주는 소년을 밀쳤다. 소년은 뒤로 자빠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침묵이 청각을 토해냈는지 소년의 작은 신음이 진주에게 또렷하게 각인됐다. 진주는 소년을 뒤로하고 다시 담장을 걸었다. 양팔을 벌리고 중심을 잡는데 집중하려 애쓰며. 넘어진 건 소년인데 이상하게 진주의 속이 울렁댔다. 그래서 진주는 소년을 돌아볼 수 없었다.

"제대로 안 보고 걷다가 사고 난다?"

"네가 밀쳐서 그런 거잖아."

"발 밑에 벽돌 있었거든. 걸을 때 만이라도 주판은 좀 내려놔."

"못해… 아마 난 죽을 거야. 미쳐서 자살하겠지. 지금도 미치긴 했지만."

진주가 폴짝 뛰어내렸다. 주판만 보고 걷던 소년이 진주의 등에 부딪혔다. 방금 진주와 몸이 닿은 걸 모르는 건지 개의치 않는 건지, 소년은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소년은 점점 멀어졌고 진주는 남겨졌다. 주차 방지용 고깔이 멀리서도 형형한데 소년은 잘도 걸어가고 있었다. 낮은 담장에서 뛰어내리듯 가뿐하게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진주는 소년에게로 달려가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내가 도와줄게."

"어?"

"강박 고치자."

"그건…."

"가는 길마다 장애물 투성인데 그때마다 부딪히면 너무 아프잖아. 넘어지지 않게, 딱 그 정도만 해보자."

주판알 굴리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녹아들었다. 칙칙한 무성 영화 같은 인생이 청춘을 노래하는 독립 영화로 바뀌었다.

진주는 소년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소년을 고쳐주리라 선언하던 순간이 콕 각인되어 자꾸만 눈앞에 아른댔다. 그럴 때면 진주는 소년이 자신의 머리에 박혔나 싶었고, 토할 듯 가슴까지 울렁대면 소년이 마음에 들어앉은 건가 싶었다. 새끼 강아지처럼 씰룩이던 소년의 코와 순진무구한 눈동자, 흩날리던 민들레 홀씨. 조금만… 어떤 조그만 계기라도 있었더라면 무슨 일이 펼쳐졌을지 모르던 그 순간. 온전히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 적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소년과 엮인 뒤로 잔잔한 진주의 생활에 자꾸만 파동이 일었다. 그럴 때마다 진주는 소년을 밀어내야 했다. 소년은 진주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밀려나고 끌어당겨지는지 꿈에도 모를 테지만. 그럼에도 진주는 어디에 소년을 위치시켜야 할지 여러 갈래의 마음과 사투해야 했다.


후덥 한 날씨에 목 뒤가 뜨끈했다. 진주와 소년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란히 걸었다. 소년은 남은 한 손으로 주판을 굴리려 애쓰다가 여의치 않은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진주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는 소년을 담장으로 이끌었다. 소년은 담장에 주판을 내려놓고 한결 수월하게 주산을 했다. 아이스크림을 든 손도 덩달아 움찔거렸다. '먹을 때는 집중력이 흐려지는구나.' 진주는 소년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머리 위로 구름이 드리웠는지 쨍하게 내리쬐던 빛이 사라졌다. 소년의 결 좋은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였다. 세상에서 명도를 앗아간 듯 그늘 아래 모든 게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소년의 머리칼만은 빛이 났다. '이렇게 짧아도 빛날 수 있구나.' 아이스크림을 오물대는 소년의 입술 또한 촉촉하게 빛났다. 그저 명도만 낮아졌을 뿐인데 담장이 둘만의 피신처처럼 느껴졌다. 진주가 손톱 옆 살을 세게 문질러댔다.

"야."

소년은 아이스크림 먹으며 주판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주진."

그제야 소년은 진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지만 언제나처럼 소년의 시선은 진주 너머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진주는 원했다.

"나 봐."

그제야 온전하게 진주를 보는 소년의 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왜곡되어도 사랑스러운 두 눈. 진주가 억지로 붙든대도 시선은 흩어지는 주판 소리처럼 떠나갈 것이다.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려 손가락 사이로 차가움이 닿았다. 진주는 미련 없이 아이스크림을 화단에 내던졌다. 그리고 소년에게 입 맞췄다. 소년에게는 사과향이 났다. 합성착향료로 꾸며낸 향은 진짜 사과보다 달콤했다. 아마 소년을 통해 느꼈기 때문일 거라고 진주는 생각했다.

진주가 입을 옴싹 대자 차갑고 끈적이던 소년의 입술이 따뜻하게 물들었다. 진주는 신체 중 입술만 남은 것처럼 감각만을 탐했다. 그래서 소년이 얼음처럼 굳은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입 맞추고 있다 보면 데일듯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퍼질 것 같아 진주는 참던 숨을 토해냈다. 달큰한 감귤 맛 숨결이 소년의 입술에 뿌려졌다. 꿀에 잔뜩 절인 과육이 된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다시 입을 맞춘 진주는 소년의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사과와 감귤을 동시에 먹는다면 이런 맛일까, 진주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소년이 진주를 밀쳤다. 무방비상태의 진주는 담장 너머로 나자빠졌다. 어디 부딪힌 것도 아닌데 머리로 타종을 울린 듯 웅웅- 골이 띵했다. 흔들리는 세상에 홀로 놓인 듯 어지러웠다. 씩씩 숨을 몰아 쉬는 소리가 닿을 듯 말듯했다. 조금씩 주변 풍경이 선명해졌을 때, 진주는 가슴의 냉기를 자각했다. 사과맛 아이스크림이 진주의 교복을 적시고 있었다. 진주가 아이스크림을 화단에 던졌다.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봤다. 억울한 건지 분한 건지 제 감정도 모른 채 씩씩대던 소년은 막상 진주와 눈이 맞자 움찔했다. 하지만 소년의 거친 숨결은 쉽게 정돈되지 않았다. 진주와 소년을 가로막은 담장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넘을 수 있는 높이였다. 하지만 진주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무리 둔감한 소년이라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낮은 담을 방패 삼아 소년은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소년이 벌컥 감정을 뱉어도 진주는 반응이 없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전전긍긍했다. 진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왜 갑자기 그런 짓을 한 건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진주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를 벗어나고 처음 느낀 건 수치심이었다.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게 끔찍했나?' 서운했고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아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러다 진주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소년이 이 상황에 온 정신을 빼앗겼다는 걸. 주판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을 소년은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진주가 최초의 성공을 이룬 것이다. 진주는 소년의 최초이며 어쩌면 최후가 될지 몰랐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한 행동이 최상의 결과를 도출해냈다. 진주가 씨익 웃었다. 소년의 눈에 경계가 깃들었다.

"궁금해서. 너랑 뽀뽀하면 어떨지."

"… 더러워.."

소년은 손등으로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손길이 스쳐간 자리에 피가 묻어날 때까지. 진주가 벌떡 일어나 소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만해. 피나잖아."

"더러워.."

"뭐가 더러운데?"

"네 침을 먹었잖아!"

왈칵 소리를 지른 소년은 주판을 챙겨 떠났다. 소년이 점이 되어 사라지고도 진주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더럽다는 말이 맴돌았다.


"쟤가 너 쳐다보는 거 아냐?"

진실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에는 소년이 있었다. 힐끗힐끗 진주를 훔쳐보던 소년은 진주와 눈이 마주치자 주판에 고개를 박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주판알을 놀려댔다. 진실이 피식 웃더니 다시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음과 모음이 결합했다가 일순간에 붕괴되기를 반복했다. 진주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진실이 휴대폰에 빠져있지 않았다면 아마 미묘한 표정 변화를 들켰을지도 모른다.

"모르겠는데. 쟤가 왜?"

"그냥 느낌이. 아닐 수도 있고. 근데 저게 재밌나? 꼭 지같은 골동품 끼고서 뭐하나 몰라."

진실이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혀를 끌끌 찼다. 소년을 향한 한심함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소년에게 들리지 않을 거리임을 알지만 진주는 힐끗 소년의 눈치를 살폈다. 울컥하는 마음을 잠재워야 했다. '더러워' 자신을 경멸하던 소년을 떠올렸다. 그래, 애초에 진주는 소년을 두둔할 사이가 아니었다. 소년과 엮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그러니 위선자처럼 굴어야 했다. 소년 또한 진주의 위선을 개의치 않을 테니 훗날 그 사실을 알게 돼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본인도 신경 안 쓰는 걸 진주가 신경 쓰는 건지. 소년을 무시해서? 사실 진주도 진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어서? 소년도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고 기대하게 했다가 실망시켜서? 진주는 자꾸만 삐져나오려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꾸역꾸역 억눌렀다. 어차피 소년은 진주에게 관심도 없을 텐데. 억울했다. 순수하게 억울하기만 한 건지 확신할 수 없어서 더 그러했다. 진실을 향해 감정을 타고 가다 보면 그 끝에 소년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지의 감정을 인지 하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진주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주판만 두드리는 소년에게 '너는 내가 안중에도 없니?' 묻고 싶었다. 몇 번의 눈 맞춤 끝에 소년은 다시 본래의 페이스를 찾았다. 안달 난 건 진주 뿐이라는 듯 시선이 떠난 자리에 진주만 덩그러니 남았다. 절대 소년에게 아는 체 않기로 다짐했는데, 확고함도 소년 앞에서는 번번이 무너졌다. 소년은 조금도 진주를 의식하지 않는 걸까? 이리저리 재배치하는 주판알, 저 한 알 만큼의 관심도 진주에게 나눠줄 수 없는 걸까? 소년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라 당장이라도 소년에게 가고 싶었다. 이러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은 마구잡이로 엉킨 실타래처럼 진주의 마음을 헤집었다.

교실에는 둘만 남았지만 소년은 아직도 집에 갈 채비를 하지 않았다. 진주는 거스러미 하나 없는 손가락을 손톱으로 문질러댔다. 소년과 어긋난 이후로 내내 잠 못 이루던 밤들이 떠올랐다. 답답한 가슴에 한숨이 켜켜이 쌓여 토해내지 않으면 터질 것만 같던 밤. 억지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면 섬광처럼 나타나는 소년이 얄미워 눈물이 찔끔 나던 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으니 캄캄함 뿐이라, 또 찔끔- 눈물을 닦아야 했던 밤. 진주에게 소년은 건너편 창가에서 비추는 유리 같았다. 태양 못지않게 강렬해 눈을 멀게 하지만 빛나는 순간은 찰나인 유리. 장난의 진원지를 찾으려면 오래간 눈을 혹사시켜야만 하는, 한 번 의식하면 신경을 끌 수도 없는, 보고 있지 않아도 눈이 아릿아릿한 그런 존재였다. 불면보다 진주를 더 괴롭게 한 건… 소년 또한 진주처럼 잠 못 이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수히 고민했는지, 진주가 보고 싶기는 했는지.

진주가 일어섰다. 끼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밀렸다.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던 주판의 움직임이 멎었다. 진주가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진주 쪽은 절대 쳐다보지 않으면서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얘기 좀 해."

소년이 진주를 버려두고 교실을 나섰다. 독이 바짝 오른 진주가 그 뒤를 쫓았다. 소년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복도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렸다. 황새를 쫓는 뱁새가 된 것처럼 다리를 아무리 찢어도 소년의 한 걸음에 비할 수가 없었다. 진주는 계속해서 소년을 불렀지만 소년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소년과 비슷하게 계단 앞에 도착했다. 진주는 소년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소년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얘기 좀 하자니까!"

"… 싫어."

계단을 내려가던 소년이 멈칫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주가 다시 소년을 잡으려 했지만 교복이 손끝에 잡힐 듯 빠져나갔다.

"멋대로 그런 건 미안해. 그런데 난 후회 안 해!"

소년이 계단 한가운데 우뚝 섰다. 진주를 돌아보았고, 진주는 소년을 붙잡았다. 하지만 미처 멈추지 못한 다리는 관성을 따라 날갯짓하듯 아래로 향했다. 이러다 같이 넘어지겠다 싶어 진주는 소년의 팔을 놓았지만 소년이 진주를 붙잡았다. 그렇게 둘은 하나 되어 계단을 굴렀다. 점점 속도가 붙었지만 진주에게는 시간을 느리게 감은 것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는 끝이 날 계단이지만 너무 아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소년과 고통만 존재하는 지금, 원래 하나여야 했을 두 영혼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으니까. 영원과도 같던 시간은 벽에 부딪힘으로 끝났다. 통증 때문인지 진주를 짓누르는 소년의 무게 때문인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 으음."

소년이 낮게 신음하자 진주의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다. 처음 느끼는 묘한 감각, 간지럽고 이상해서 자꾸만 집중하게 됐다. 숨결이 내린 곳에 신경이 쏠릴수록 통증은 점점 무뎌졌다. 따뜻하면서도 습기가 서릴 듯 축축했고 소름 돋을 만큼 서늘했다가 다시 진주를 데웠다. 은은하게 시작해 종래에는 태울 듯 뜨거워질 게 분명한 감각. 진주는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지만 이대로 소년과 붙어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제까지의 진주의 삶은 눈밭에 누워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조난자와 같았다. 하지만 소년과 엮인 이후로 몸을 털고 일어났고, 별을 관측해 방향을 가늠했다. 진주가 조난자라면 소년은 미지였다. 그리고 이제 조난자는 미지를 찾아 그 앞에 선 것이다. 진주가 손끝으로 소년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었다.

소년이 상체를 일으켰다. 손바닥을 통해 바닥의 냉기가 전해졌다. 안경은 어디 갔는지 찌푸린 눈이 여과 없이 드러났고 콧잔등이 긁혀 있었다. 서리가 낀 듯 뿌연 풍경 속에서 두리번댔지만 안경을 찾기에 역부족이었다. 소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래에서 어떤 떨림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이 진주가 있음을. 진주가 우왕좌왕하는 소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했다. 체온도, 손길도. 시야가 흐려서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괜찮아."

그 순간만큼은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생전 처음 조우한 미지에 왈칵 든 두려움은 곧 파도에 휩쓸려 멀리, 저 멀리로. 흐릿한 시야로 진주와 시선이 얽혔다. 따뜻한 눈빛이 위로가 되어 미지는 물결치듯 일렁였다. 관성처럼, 당연하게도 소년은 진주에게 끌렸다. 가까워졌다. 어둠에 시야가 물들자 호흡이 섞이는 소리도 멀어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축축한 입맞춤. 소년은 자신이 이미 미지에 발 들였음을 직감했다. 인공적인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곳, 마치 돔 안에 들어온 것처럼 지평선이 넓게 펼쳐진 그곳에 셀 수 없을 만큼 빼곡한 별들이 박혀 있다.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어 마치 우주에 온 듯한 풍경. 과학관 천체투영관에서 본 별자리보다도 더 벅찬 황홀경에 소년이 몸을 맡겼다.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여전히 진주는 흐릿했다. 하지만 진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 건 알 수 있었다. 문득 소년은 자신이 타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세계가 자신을 덮칠까, 별들이 쏟아져 내릴까 두려웠다. 소년에게 본능에 가까워지는 건 죄악을 탐하는 것과 같았기에. 하지만 오싹할 정도로 짜릿해서 참을 수 없을 만큼 원했다.


그날 소년은 진주를 두고 떠났다. 정확히는 떠나기 위해 애를 썼다. 앞이 보이지 않아 허둥대는 소년에게 진주가 어색하게 일어나 안경을 건넸고, 안경을 낚아챈 소년은 떠났다. 그 뒤로 둘은 대치 상태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자꾸 진주는 소년에게 달려가고 싶은 건지.

결국 진주는 진실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해답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실은 잠시 놀랄 뿐,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쟨 널 안 좋아해. 자존심 챙기고 싶음 너도 신경 꺼."

"저번엔 나 쳐다보는 것 같다며."

"의미 부여하지 마. 저 병신이 왜 그런 건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언뜻 보이는 진실의 휴대폰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볼 수 없는 낱말들이 즐비했다. 진실이 전송을 눌렀다. 바다로 편지를 담은 유리병을 던지는 것 같았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이 정말 있는 걸까? 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쇳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진실이 진주를 올려봤다.

"병신이라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휴대폰이나 미친 듯이 해대는 너나, 골동품이나 두들겨대는 쟤나.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강박처럼 뭔가 해대는 건 똑같아!"

시선이 집중됐다. 졸지에 말로 한 대 맞은 진실이 헛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다들 소년을 모자란 애로 생각하는 건 사실이고, 굳이 화를 내봤자 진주만 이상해질 뿐인데.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필요에 의한 건조한 관계를 유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많다 해도 진주는 소년을 욕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소년의 턱을 움켜쥔 순간부터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오지 않은 교실은 어수선했다. 진주가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은 신문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숫자를 적으랴 지우랴 정신이 없는지 "네가 종례 해라." 한마디를 하고 다시 스도쿠에 빠졌다. 교실로 돌아온 진주가 대신 종례를 했다. 아이들이 우르르 문으로 향했다. 동시에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진주에게 다가갔다. 교실 앞 뒷문에 꽉꽉 몰린 인파가 일순 정지했다.

"미안해."

숨죽여 바라보는 흥미진진한 시선들. 괜히 오르지 않아도 될 입방아에 올라 소년과 정박아 커플로 묶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주는 흥미에 목마른 눈들 보다, 눈치 보느라 주판알을 몰래 튕기는 소년에게 더 눈이 갔다. 그래서 소년과 마주 서는 쪽을 택했다.

"뭐가 미안한데?"

진주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진부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미디어에 의한 학습인지, 원래 이렇게 답하도록 인류의 유전 체계에 새겨진 건지 알 수 없지만 진주도 전형적인 대답을 했다. '오오오-' 지켜보는 이들의 추임새에도 소년은 오직 진주의 눈치만 살폈다.

"10일 전에 네가 나한테 음… 했을 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세고 있던 건 자신만이 아니었구나. 진주가 은근슬쩍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모든 걸 왜곡하는 안경을 썼음에도 진주는 그 너머 진짜 소년이 보였다. 교실은 서로의 숨소리가 의식될 정도로 고요했다. 온전히 소년과 마주하자 시간을 되감아 함께 담장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흩날리던 짧은 머리칼이 아른대고, 소년의 입술에 묻은 사과향이 입가에 맴돌았다. 귀가 뜨끈하게 달아올라서 진주는 소년의 손목을 낚아챘다. 따라오는 시선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둘은 달리고 있었다.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발맞춰 내려갔다. 낡고 때탄 대리석 계단이 뽀얗고 맨들한 건반으로 바뀌었다. 왼 발, 오른발, 춤추듯 건반 밟는 소리가 한 사람인 것처럼 꼭 맞았다.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 같아 소년과 진주가 마주 웃었다.

체육 비품 창고 안. 소년과 진주는 문에 기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창살이 촘촘한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은 바닥을 줄무늬로 물들였다. 공기 중을 유유히 떠다니는 먼지가 반짝였다. 진주가 구석에 풀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소년은 기침을 하면서도 진주 옆에 앉았다. 진주가 소년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소년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암묵적 허락에 진주가 소년의 손을 뒤집어서 깍지를 꼈다.

"강박증 고칠게. 노력할 거야. 자꾸만 너한테 나쁜 행동만 하게 되니까.. 고치고 싶어 졌어. 그때…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아직도 내가 더러워?"

사과맛 입맞춤을 했을 때처럼 가까워진 거리.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도리질했다.

"이번엔 도망 안 갈 거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진주에게는 암묵적 허락으로 해석되었다. 입 안 가득 메우는 사과향도 없는데 이상하게 달았다. 말캉한 입술, 달큰한 숨결, 소심하게 굴러가는 주판알 소리까지. 모든 게 감각을 녹아내리게 했다. 진주도 몰입할수록 손톱을 더 세게 문질렀다. 서로의 강박까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임을 진주는 확신했다. 그래서 진주도 소년처럼 개의치 않기로 했다. 진주가 소년이 머무는 교실 내 서열 최하위에 편입되더라도, 스치듯 진주를 향한 빈정거림이 따라다닐 지라도, 정박아 커플이라 싸잡아 불리더라도 상관없었다. 소년도 미쳤고 진주도 미쳤으니까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런대로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진주와 소년을 향한 관심은 생각보다 시시하게 사그라들었다. 폐쇄 병동처럼 숨 막히는 학교에서는 늘 새로운 화젯거리를 찾기 마련이니까. 소년과 진주는 강박을 고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갓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의 장난에 불과했다. 주판으로 연주를 하라고 시키거나 손 대신 다른 감각에 집중하자며 소년에게 입을 맞추거나. 뽀얀 먼지가 홀씨처럼 피어나는 창고에서 소년의 무릎을 베고 있노라면, 주판 소리는 소년이 부르는 자장가 같았다. 그 소리에 평온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러다 소년처럼 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들면 주판 소리의 부재에 마음을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만큼 소년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진주는 가볍게 넘겼다. 강박은 그들에게 공감대였고 치료는 연애의 소재에 불과했으니까.


시곗바늘이 몇 바퀴 돌었을까, 자리에 놓인 신문은 몇 번이고 읽어 내용을 외울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스도쿠란 아래 테트리스하듯 끼워 넣은 기사는 구색에 가까웠다. 진주가 슬쩍 뒷장을 들췄지만 모두 스도쿠가 실린 지면이었다. 자리에 앉아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적막을 메우는 게 초침 소리가 아니라 주판 소리라면 지루하지 않았을 텐데.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다가 반대로도 돌리고 잠시 눈을 붙였지만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진주는 스도쿠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으로 풀다가 나중에는 연필로 답까지 적었다. 오래 기다렸는데 이쯤은 괜찮겠지.

한 장 한 장, 넘기다 결국 마지막 장까지 왔다. 처음이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쉽게 풀었다는 게 뿌듯했다. 선생님이 스도쿠만 붙잡고 있던 게 좋아해서가 아니라 못 해서가 아닐까? 이렇게 쉬운데. 진주는 바닥에 놓인 서류 가방을 잠시 바라보다가 교무실을 나섰다.

교실로 가는 길에 진실과 마주쳤다. 진주가 진실을 쏘아붙인 뒤로 처음이었다. 늘상 휴대폰만 보고 다니는 진실이 하필 지금 딱 고개 들게 뭔가. 진주는 잠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했다.

"안녕?"

진주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띠롱-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진실의 눈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휴대폰에 정신 팔린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진실은 진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휴대폰을 쥔 손을 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안녕."

"이제 가는 거야?"

"응. 두고 간 게 있어서. 너는 정박.. 미안. 걔랑 같이 가는 거지?"

"그러려고."

"그땐 미안했어. 둘이 그런 사이인 줄도 몰랐네. 잘 어울려, 둘이."

"고마워, 잘 가."

"너도."

소년과 잘 어울린다는 말은 욕으로 통용되었지만 진주는 진실이 그런 의도로 말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만약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껄끄러운 관계 치고 산뜻한 대화를 끝으로 진주와 진실은 서로를 지나쳤다. 관계의 마지막임을 알았지만 둘 중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교실이 가까워지자 착착 주판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일하게 진주를 편하게 하는 소리. 문을 열자 열중하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진주의 동그란 이마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늘따라 집중해서 하네, 나 온 줄도 모르고."

그제야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진주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진짜 강박 고쳐야지?"

"응. 알아."

진주는 으음- 허밍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장난스럽게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안 해본 게 뭐가 있을까, 그동안 강박을 고치기 위한 시도들을 되짚었다. 진지함이라고는 없는 회피에 가까운 일탈들. 문득 여태껏 한 번도 한 적 없는, 그리고 가장 본질에 가까워지는 방법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주판 금지야. 대신 내가 쳐줄게. 소리라도 들으면 좀 나을 거야."

소년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양보할 생각이 없는지 주판알 굴리는 속도는 일정했다. 슬쩍 오기가 고개를 들었다. 창고에서는 진주 때문에 강박이 고치고 싶어졌다더니. 좋아하는 사이에 주판알 잠깐 튕겨본다는 것도 안 되나. 진주가 소년에게서 주판을 가져갔다. 빠르게 움직이던 소년의 손이 허공을 방황했다. 진주가 주판알 하나를 굴렸다. 소년이 손을 뻗었다. 진주가 잽싸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냥 안 할래. 오늘은 고치는 거 쉬고 싶어. 불안해.. 돌려줘."

소년은 파리한 안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소년은 진주를 따라왔었다. 마지못해서든, 애써 못 이기는 척하면서든. 그랬기에 진주는 소년의 주판을 최우선 하는 면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소년에게 진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게 어딨어. 고치기로 했잖아. 혹시 알아? 지금 5분 참으면 내일은 10분, 그다음은 한 시간, 점점 늘어날지?"

선심 쓰듯 주판을 안겨주고 그냥 넘어갈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고개 든 오기는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게 했다. 소년의 표정을 볼 수록 진주는 가슴이 따끔따끔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진주는 소년에게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빠르게 걷다가 종래에는 교실을 빡빡하게 메운 책걸상을 피해 요리조리 뛰기 시작했다. 소년은 진주를 잡으려 했지만 발목이 진흙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다리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간간히 진주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소년은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더 열심히 주판을 튕겨야만 했다. 그건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의 배려였다.

주판알을 튕기던 어설픈 소리는 차차 경쾌하게 나름의 가락을 탔다. 익숙하다 못해 능숙한 손놀림에 진주 스스로도 놀라웠다. 단순히 알을 굴리는 수준을 넘어 치는 대로 머릿속에 수식이 떠올랐으니까. 차례로 쌓여가는 수식들이 마음속 불안을 밀어내고 빈자리에 박혔다. 공백 없이 빽빽하게 자리한 수식 위로 새 수식이 겹쳐지고 덧씌워짐에 진주는 어떤 황홀감을 느꼈다. 그 사이 소년이 가까스로 진주와 가까워졌다. 미처 앞을 보지 못한 진주가 교탁에 세게 부딪혔다. 주판이 허공을 날았다. 쾅- 주판이 부서지는 소리는 일종의 선고였다. 주판알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소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자신을 지나쳐가는 주판알들의 행방을 쫓아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진주를 지나쳤다. 멈추지 않고 바닥을 굴러 다니는 주판알들을 떨리는 손으로 주웠다. 한 알도 놓칠 수 없어 소년은 개처럼 교실을 기었다. 진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몰랐고, 어쩌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진주는 손톱 옆 살을 마구 문질러댔다.

소년은 티비장 아래에 미처 보지 못한 주판알을 발견했다. 교복 무릎 한쪽에 피가 스몄지만 소년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어둠 속 희미한 나무구슬로 팔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뭉친 먼지가 신기루처럼 멀어졌다. 소년은 간절히 기도하며 조심스레 손가락을 움직였다. 닿을 듯 말 듯 애태우던 주판알은 어둠에 완전히 삼켜졌다. 숨을 몰아쉬던 소년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진주도 넘어지면서 다리에서 피가 났지만 무릎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새하얗게 질린 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진주가 소년의 머리칼을 쓸며 괜찮다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마치 자신에게 되뇌듯이.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진주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울고 있었다. 따끔따끔한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가슴을 짓눌러봐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새 진주도 소년처럼 창백해져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같이 아프다는 게 이런 걸까? 평소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표현이지만 그것만큼 진주를 정확히 묘사할 말은 없었다. 하나로 이어져 고통까지 전이되는, 이런 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

소년이 쥐고 있던 주판알들이 도르륵- 손에서 빠져나갔다. 가늘게 숨을 몰아쉬던 소년은 허공에 셈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진주도 통증에 굴복한 듯 소년 위로 엎어졌다. 손톱 사이에 검은 피가 고였음에도 진주는 아직 거스러미가 남은 것 같았다. '깨끗하게 떼어내야 하는데…' 힘겹게 움직인 손가락 너머 주판알들이 별처럼 펼쳐져 있었다. 마치 진주의 손끝에서 피어난 우주처럼. 소년과 딱 붙어있으면서도 진주는 소년을 떠올렸다. 진주가 만든 별들에 휘둘리던 소년을.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너머 웅성거림이 가까워지는 동안 진주는 소년을, 선생님을, 진실을 떠올렸다. 그 끝에 자신이 있었다. 진실을 향한 외침은 스스로를 향한 항변에 불과했음을. 더 없는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는 겨우겨우 숨을 쉬었다. 파도처럼 몰려온 미지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렇지만 난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고백 위로 미지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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