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와 마쟁이의 딸>
"4번, 해.. 더슨. 핸더슨."
늘 8번마만 고집하던 아빠가 처음으로 4번마에 걸었어. 믿을 수 없었어. 언젠가는 8번마가 일확천금을 안겨주리라는 아빠의 강한 믿음은 한 번도 보상받은 적 없었어. 그럼에도 아빠는 8번마를 놓지 못했는데, 내 이야기에 처음으로 4번마를 고른 거야. 아빠 손을 꼭 잡고 마장에 들어섰어. 설렘이 떠다니는 뜨거운 공기에는 형용할 수 없는 생동감과 광기가 가득했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출발 신호가 울려 퍼지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귀를 틀어막았어. 말들이 질주하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흥분에 찬 환호성이 더 선명하게 들렸어. 그날 아빠가 그토록 기대하던 1등을 4번마가 안겨주었어.
처음에는 아빠가 내게 의존했어. 내가 고르는 말들이 전부 우승했거든. 소문이 났는지 다른 아저씨들도 내 별 의미 없는 선택을 간절히 기다리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경마장에만 가면 토할 것 같았어. 귀가 웅웅대서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인데 다들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았어. 3번마를 고른다면 다들 행복해지겠지만 나는 여전히 두통에 시달리라는 예감이 들었어. 그래서 나는 4번마라고 이야기했어. 1등은 3번마였고, 4번마는 꼴찌를 했어. 광기에 휩싸인 영혼들이 나를 집어삼킬 듯 둘러쌌어. 책임이 뭔지도 모르는 내게 책임을 요구했어. 그동안 재미 본 건 쓱 잊고서 말이야.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듬성듬성해서 확실하지는 않아. 아빠가 죽었어. 나는 친척집을 전전해야 했어. 어느 곳을 가도 나는 눈엣가시였고 내가 잠들 시간이면 다들 엄마 욕을 했어. 살인자 때문에 혹덩이가 붙었다면서 말이야. 나는 엄마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어. 언제나 내 기억에는 아빠만 있었거든. 그런데 아빠가 죽은 지금, 엄마는 왜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는 걸까? 생각보다 의문은 쉽게 해결됐어. 어른들은 쉬쉬하지만 또래집단은 아무리 무거운 진실이어도 쉽게 내뱉는 법이니까. 알고 보니 내가 살인자 딸이라고 소문이 났더라고. 엄마가 아빠를 죽였고, 그래서 감옥에 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날 보러 오지 않는 거였어. 어른들은 내가 나타나면 병균이라도 되는 양 제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기 바빴어. 하지만 애들만 있을 때는 진실이 내게 쏟아져내렸지. 살인자 딸이니까 너도 살인자가 될 거야. 너네 엄마는 살인자니까 사형당해야 돼. 감옥에서 나오면 너랑 네 엄마랑 같이 연쇄 살인 저지를 거지? 그런 말들은 날 전율하게 했어. 내게 엄마가 존재하고, 앞으로 함께할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해 줬으니까. 나는 살인자 딸이라는 수식어가 꽤나 마음에 들었어. 마쟁이 딸보다 그럴싸하잖아.
<반짝이는 것들을 모으는 까마귀처럼>
학년이 바뀌어도 난 항상 왕따였어. 나를 둘러싸고 조롱하는 이들은 어찌나 즐거워 보이던지. 내 반응을 끌어내려고 혈안이 된 모습은 마치 마쟁이들처럼 광기가 가득했어. 딱히 괴롭다거나 두렵진 않았어. 하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내버려 둘 것 같지 않더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경마장에 몰려드는 마쟁이들처럼 아이들이 내게로 왔어. 나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돈가스 망치를 꺼내 휘둘렀어. 어찌나 울고 불고 호들갑을 떠는지... 결국 엄마를 모셔와야 했어. 별 것도 아닌 일로 참 피곤하게들 군다 싶었어. 어차피 엄마는 나한테 잘했다 할 텐데. 그런데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는 엄마는 꽤나 심각했어. 교무실에는 정적이 흘렀어. 모두의 신경이 우리에게 향해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어. 엄마가 내 어깨를 그러쥐고 나와 눈을 맞췄어.
"돈가스 망치로 친구를 때리면 어떡하니?"
"친구 아닌데..."
여기저기서 한숨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어. 엄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어. 나는 돈가스 망치를 더 꼭 쥐었어. 선생님이 달라고 해도 안 줬는걸.
"망치 하나밖에 없는 거 알잖니. 대량 주문도 들어왔는데 엄마가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니?"
이번에는 숨을 삼키는 소리들이 들렸어. 나는 손에 힘을 풀었어. 엄마가 돈가스 망치를 가져갔고, 손바닥에 싸늘하게 바람이 닿았어. 엄마가 책상 위에 놓인 커터칼을 집어 들었어. 그리고 드르륵 칼날을 뽑아냈어.
"다음부터는 때리지 말고 위협만 하렴. 이렇게."
형광등 아래 반짝이던 커터칼이 숨었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어. 까마귀가 왜 반짝이는 것들을 소중히 모으는지 알 것 같았어. 일순간에 반짝임이 매몰됐다가 다시 소생하는 순간이 어찌나 경이롭던지, 눈을 뗄 수 없었어. 그 뒤로 나는 숙명처럼 커터칼을 뽑아냈어. 수업을 듣다가, 길을 걷다가, 밥을 먹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도... 드르륵-소리가 날 때면 주변의 소음은 죽은 듯 멎었어. 그리고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어.
<이런 사랑은 처음인걸요>
불쑥 나타난 세 그림자가 머리 위로 교집합을 이뤘어. 고개를 들었어. 들쭉날쭉 자란 잔머리 사이로 원숭이들이 보였어. 정면에 있던 원숭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었어. 단전에서부터 숨을 끌어 모으더니 침을 뱉었어. 퉤! 하고 떨어져 나가야 할 가래가 대롱대롱 길게도 늘어졌어. 후후 입바람을 불었지만 원숭이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가래가 떨어지지 않았어. 결국 재빨리 손을 휘적대더니 크게 외쳤어.
"씨발, 뭘 음침하게 쳐다봐!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귀가 막혔냐? 철승이가 일어나래잖아."
"찐따 새끼가, 너 철승이 누군지 모르냐? 어? 일어나 병신 새끼야아악!"
대장 원숭이를 이어 우측, 좌측이 입을 열었어. 좌측 원숭이가 소리를 꽥 지르며 내 책상을 발로 찼는데 그 모습이 스타카토를 연습하는 소프라노 같았어. 나는 슬그머니 커터칼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원숭이들의 정수리는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부숭부숭했어. 아직 청소년인데 벌써 탈모가 시작될 수가 있나? 모근이 덜 생긴 건가? 대장 원숭이가 고개를 쳐들었어. 정면으로 직시한 얼굴은 빠지고 있는 건지, 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정수리만큼이나 보기가 힘들었어.
"야, 앞머리 좀 깎아. 앞은 보이냐? 보기만 해도 속 깝깝하게."
"아니야, 더 길러. 길러서 아예 가려버려. 눈빛 소름 끼치니까."
"오, 락구 관상가네? 얘 살인자 딸이잖아. 그러니까 눈빛이 저렇지."
중앙, 우측, 좌측. 이번에도 말하는 순서가 같았어. 발언권이 서열순으로 있는 것 같았어. 대장 원숭이는 서열 1위니까 '원일', 우측은 '원이', 좌측은 '원삼' 하고 읊조렸어. 어찌나 잘 어울리는 별명인지 삐질삐질 웃음이 삐져나왔어. 원일이가 내 책상을 뒤엎었어. 내 몸도 덩달아 뒤로 떠밀렸어. 뒤에 책상이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나자빠졌을 거야. 책상에 가려졌던 몸이 온전히 드러났어. 시선들은 빠르게 나를 위아래로 훑었어. 원일이가 말했어.
"다리 대박."
원이가 말했어.
"각선미 죽이네. 죽여버리고 싶게. 삐쩍 꼴은 다리에 알타리가 턱!! 웨엑."
원삼이가 말했어.
"너무하네~ 쟤라고 저렇게 태어나고 싶었겠냐? 얼굴도 개빻았는데 몸도.. 나 같으면 자살한다. 크크크.."
나는 말하지 않았어. 대신 커터칼을 길게 뽑아냈어. 원숭이들이 동기화라라도 된 듯 일제히 움찔했어. 생김새도 머리숱도, 키도 비슷해서인지 하나의 유기체 같았어.
"그걸로 어쩌게? 죽이게? 니 애미처럼? 깜찍하네, 내가 여자한테 질 것 같냐?"
"죽고 싶은가 보지. 철승이 여자도 패는데. 클났네? 지금이라도 도망가~"
"크크크. 여자? 락구야, 잘 봐. 키는 멀대같이 큰 데다 삐쩍 말라서 가슴도 없는데? 다리에 알은 거의 글래디에이터 급인데? 저게 여자냐?"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어. 그런데 날뛰는 원숭이들은 꼭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어. 성가셨어. 나는 놈들을 죽이기로 결심했어. 그동안은 위협만으로 충분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첫 살인인데 3명을 상대해야 한다니, 부담감도 들었어. 하지만 엄마가 진짜 살인자가 맞다면, 내게도 절반은 살인자의 피가 흐르는 거잖아. 내게도 재능이 있을 테니 잘 해낼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어. 제멋대로 자라난 앞머리칼이 시야를 가렸어도 표적은 선명했어. 어떤 도구를 사용할지, 어떻게 죽일지 천천히 그려나갔어.
"그만해!"
유리처럼 투명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귀에 꽂혔어. 단숨에 생각에서 끄집어 올려진 나는 주위를 둘러봤어.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었어. 하얀빛을 뿜으며 그 애가 다가왔어. 나도 모르게 '천사...?' 하고 중얼거렸어. 신을 믿지 않는 내가 천사를 찾다니, 웃기는 일이야. 그리고 그런 바보짓을 하게 만든 너는 정말 대단한 존재고. 새하얀 피부와 엔젤링을 쓴 듯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칼, 하늘하늘한 몸과 대비되는 강단 있는 걸음걸이... 너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찬란했어. 통통한 붉은 입술은 석류처럼 탐스러웠어.
"찐따 새끼들아, 시끄러워."
입술 새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어. 단호했고, 강단 있었어. 너는 스스로를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미안, 우리가 좀 그랬지? 조용히 할게."
"아니지, 오해하지 마. 철승이는 잘못 없어. 다 이 새끼 때문에..."
"그래 그래, 락구 말이 맞아. 우리 원래 안 그래."
원숭이들 조차 네 앞에 굴종했어. 진짜 강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다정함이라는 말이 이해가 갔어.
"그딴 건 관심 없으니까.. 그냥 찌그러져 있어."
"으응, 그럴게. 근데 나 너랑 처음 얘기해 봐. 사실 너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혹시 내 이름 알아?"
"철승아, 누가 널 몰라? 당연히 알지."
"그래, 락구야. 철승이를 누가 모르겠어?"
늑대 한 마리가 시작한 하울링이 늑대 무리 전체로 퍼지듯이, 대장 원숭이가 시작하면 원이를 거쳐 원삼이가 마무리 지었어. 너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어. 한숨에 묻혀 나직하게 흩어지는 씨발은 어찌나 감미롭던지.
"방금 뭐라고 했어? 못 들어서.. 헤헤."
"철승이가 못 들었대. 나도 못 들었고."
"락구야 너도 못 들었니? 나도야."
"부탁이 있는데.."
네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어. 원숭이들의 기대가 일제히 너를 쫓았어.
"닥치던가 뒤져줘."
원숭이들은 닥치지 않았어. 그렇다고 뒤지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너를 쫓았고, 쫓았고, 쫓았어. 내 세계에는 오직 너만 존재했어. 너를 위해 뭐든지 하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 너의 다정함이, 너의 강인함이 나를 생전 처음인 감각으로 이끌었어. 아무래도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은>
네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끝이 똑 떨어지는 칼단발이 찰랑였어. 흰 셔츠 칼라에 머리칼 사각이는 소리가 선명했어. 나는 손 닿는 곳에 네가 있는 것처럼 손끝을 움직였어.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지휘하듯 세심하게 나는 상상 속의 너를 느꼈어. 흩어지는 머리칼 감촉이 애가 타서 허공을 쓸고, 쓸고, 또 쓸었어.
내가 미친 게 아닐까? 네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 이렇게 보고 있어도 자꾸만 범람하는 너에게 깔려 죽을 것 같았어. 숨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머리가 하얗게 물든다 해도 너 때문이라면 황홀할 것 같았어. 너의 모든 걸 알고 싶었어. 네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음식을 못 먹는지, 웃음을 못 참는 순간은 언제인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다. 한편으로는 자꾸만 작고 어두운 상자에 숨고만 싶었어. 사랑이란 어찌나 오묘한지... 너와 눈 맞추고 싶으면서도 그러기 두려웠고, 네 시선이 내게 향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자꾸만 움츠러들었으니까. 난 음침한 루저였어. 그동안 숱하게 들어온 그 말이 처음으로 사무쳤어.
너와 걸맞은 사람이 되어 네게 다가가고 싶었어. 하지만 나같이 음침한 애가 너처럼 될 수는 없겠지. 나만 할 수 있는 일로 네게 도움을 준다면, 조금이라도 너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너는 똑똑하고, 인기 많고, 상냥했어. 이미 완전한 네게 보잘것없는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어. 툭, 등 뒤에 무언가 맞았어. 바닥에 떨어진 흰 쪽지를 주워 들었어.
'끝나고 따라와. 정신교육 마저 해야지?ㅋㅋ'
꼬불꼬불한 악필 옆에 조악한 그림이 있었어. 귀신처럼 늘어트린 머리칼, 길고 삐쭉한 몸이 나를 그린 것 같았어. 그림 속 여자는 과장되게 툭 튀어나온 종아리 알을 칼로 찍히고 있었어. 나는 전율했어. 드디어 널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 같아.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이 위태롭게 깜빡였어. 곧 어둠이 불빛마저 집어삼킬 것만 같았어.
"순순히 따라왔네? 뒤지러 가는 줄도 모르고."
"당연하지, 지깟게 철승이 말을 어떻게 거역하겠어."
"거역 못 하지, 락구도 못 하..."
"야, 너 뭐 하냐?"
대장 원숭이가 원삼이의 말을 끊었어. 원이가 이어서 입을 열자 대장 원숭이는 원이의 정강이를 발로 깠어. 입술을 들썩대던 원삼이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어. 나는 개의치 않고 가방에 쓸만한 물건이 있나 뒤졌어. 작년에 쓰던 교과서와 핑킹가위, 강판, 노끈... 아무래도 너무 준비 없이 따라왔나 봐.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있어. 나는 교복 주머니에서 내 애착 커터칼을 꺼냈어. 드르륵- 길게 칼날을 뽑아냈어. 가로등 불빛이 모스부호를 수신하듯 빠르게 깜빡였어.
"귓구멍이 막혔냐? 뭐 하냐고!"
대장 원숭이의 고함과 동시에 골목에 어둠이 뿌려졌어. 가로등이 다시 켜지기 전에 귀를 찢을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어. 사람을 토하는 고래처럼 가로등이 빛을 뿜어냈어. 빛 아래 선 원일이는 발광 플랑크톤처럼 보였어. 처절한 절규로 모든 빛을 빨아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았지. 오직 떨어져 나온 다리만이 빛을 잃은 채 원일이의 그림자가 되어주었어. 원일이는 비틀대며 주저앉았고. 열쇠고리처럼 매달려있던 원숭이들은 겨우 숨만 쉴 뿐이었어. 칼에서 똑 똑 피가 떨어졌어. 그 소리는 스포이드로 실험용액을 한 방울씩 떨굴 때와 비슷했어. 단조로운 규칙성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지.
"뭐야, 씨발."
반사적으로 칼을 고쳐 쥐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어. 어둠에 물들어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불 꺼진 허름한 판자촌에 빛이라곤 너뿐이었으니까. 천천히 네가 가까워졌어. 오렌지색 셀로판지를 덧씌운 듯 색채로 물들었어. 멍하니 너를 보는 시간은 영원 같았어. 깔딱대는 신음도 멀어지고, 진동하던 피비린내도 옅어지고, 칼을 쥔 손도 느슨해지고, 온 감각만이 너를 향해 강하게 생동했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미 상황 파악을 끝내고서 묻는 질문에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 사람을 위해 한 일인데 전혀 기뻐하지 않을 때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아니, 되려 나를, 네 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을 경멸했어. 그동안 겪었던 무수한 조롱과 배척은 네 냉정함 앞에 무엇도 아닐 정도로.
"남의 집 앞에서 더럽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너와 나 사이, 네가 뱉은 말과 이어질 말 사이, 무수한 간극이 존재했어. 찰나에 가까운 그 순간에 영원히 갇혀버릴 것만 같았어. 두렵고 초조한 마음에 바보처럼 고개만 주억댔어.
"꺼져."
"으응.. 가.. 갈게.. 빨리 갈게."
바닥에서 가방을 주워 들고 황급히 걸음을 떼려는데 네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어.
"이거 치우고 가야지."
네가 쳐다도 보지 않고서 원숭이 무리를 가리켰어.
"깨끗하게 해."
조금씩 작아지던 네 뒷모습을 어둠이 완전히 삼켰어. 암흑도 온전히 네 빛을 감추지 못할 테지만 후미진 골목에는 갈랫길이 너무도 많았어. 내 눈은 너를 놓쳤지만 너는 여전히 내 앞에 아른댔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어. 흩뿌려진 숨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를 닮은 달큰함이 느껴졌어. 이 가슴 뻐근한 감각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은데 공포에 질린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어. 네가 구원자가 아님을 깨달은 원숭이들이 벌벌 떨고 있었어. 어쩌겠어, 너는 고작 원숭이 따위나 구원할 존재가 아닌데. 설사 그런데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아. 나는 여자에 정신 팔려 할 일을 팽개치는 부류가 아니거든. 하지만 조금쯤 관대해질 필요는 있었어. 네가 내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니까. 조용히, 깨끗이 치우고, 꺼지기. 나도 참 사랑 앞에 무르다니까. 사랑은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자아를 찾는 거라더니. 난 아무래도 사랑 앞에 너무도 나약한 사랑 병신인가 봐.
"원이야, 내가 자비를 베풀려 해."
".. 끄흑.. 저 원이 아닌데요, 철스.. 흣.. 데요.. 하.. 이철.. 승.."
"네.. 네네.. 얘.. 얘얘.. 얘는 철승이에요."
"마.. 마마.. 맞아요.. 락구 말이 맞아요.. 사.. 사사.. 살려주세요."
분명히 원이를 가리키며 말했는데 원숭이들은 서열순으로 대답했어. 무례한 태도는 개선이 돼도, 입 여는 순서는 바뀌지 않나 봐. 설령 죽음 앞에서라도 말이야.
"걱정 마. 죽이진 않을게. 누구 다리가 더 예쁜지 봐서.. 딱 한 놈만 자른다."
조그만 호두 두 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어. 예쁜 게 유리할지, 예쁘지 않은 게 유리할지 고민하는 듯 보였어. 그리고 원이가 교복 바지를 걷어올리자 원삼이도 허겁지겁 바지를 올리려 했어. 바지는 종아리에 꽉 껴서 옴짝달싹 하지 않았어. 축축한 괴성을 내며 원삼이는 바지를 벗었어. 중앙이 누렇게 물들어 볼톡 튀어나온 삼각팬티에 눈살이 찌푸려졌어.
".. 그냥 죽일까?"
원삼이는 아가미 호흡을 하듯 얼굴의 모든 구멍을 빠끔 댔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다시 추켜올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졌어. 거무튀튀하고 짧퉁한 다리, 큼직하게 박힌 종아리 알이 가로등 불빛 아래 적나라했어. 증기와 함께 시큼함이 올라왔어. 간헐적으로 끄윽하며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어.
와중에 원이는 60년대 핀업걸 포스터 속 여인처럼 한쪽 다리를 치켜들었어. 적당히 혈기가 도는 뽀얀 빛깔, 늘씬하진 않지만 적당한 살집이 야해 보였어. 남자 다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남성성이 없었어. 뭐, 상관없지. 몸에서 분리하면 그냥 다리일 뿐이니까.
나는 아직도 엎드려있는 원삼이를 발 끝으로 툭툭 쳤지만 일어나지 않았어. 원이는 눈알이 희번덕해져서는 원삼이를 억지로 일으켰어.
"야. 너 이름 뭐야?"
".. 모.. 모모.. 모몰라.. 앗.. 몰라요.."
원삼이가 더 심하게 떨어서 간신히 명찰을 읽었어. 이성규. 원삼이의 두꺼비처럼 까뒤집어진 입술로 발음하기에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어. 하지만 원삼이는 계속해서 모른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은 잊히기 마련인가 봐. 아마도 원삼이의 숙명은 평생 남의 이름이나 부르다 제 이름을 잊는 게 아닐까? 스스로도 모르는 이름을 굳이 불러줄 이유는 없지.
"야, 얘한테 니 팔 물려."
원삼이는 어색하게 원이에게 팔을 건넸어. 원이는 냉큼 물었지. 나는 원이의 다리를 잡아챘어. 원이와 원삼이가 뒤로 발라당 넘어졌어. 가로등 아래 칼날이 반짝였어. 원이가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어. 쓱-싹. 순식간에 끝났어. 다리가 잘린 당사자가 눈치 못 챌 만큼 말이야. 원이는 피를 쏟는 다리를 발견하고서야 비명을 지르려 했어. 하지만 짧고 통통한 원이의 팔을 물고 있어서 웅얼거림에 불과했고, 오히려 팔을 물린 원삼이 비명이 더 컸어. 처음보다 더 깔끔한 절단면을 홀린 듯 보다가 산통이 다 깨졌어. 원삼이가 나머지 두 명을 지혈하고, 흔적을 청소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어. 골목에는 피비린내가 울렁울렁 공기 중에 떠다녔어. 꽤나 기분이 산뜻했어. 언제나 음침하다고 배척받던 내게도 잘하는 것 하나쯤 있다 게 얼마나 좋던지. 나는 결심했어. 각선미가 좋은 남자들의 다리를 수집해야겠다고. 엄격히 선별해 자르고, 최상의 상태로 보존하고, 아름답게 포장하고... 마치 종이학 1000마리를 접어 선물하듯, 다리 100개를 모아 그 애에게 고백을 하리라고.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야자를 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요새 분위기 뒤숭숭한 거 몰라서 그래?"
".. 그랬어요?"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었어.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이 이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느껴졌어.
"너는 뉴스도 안 보니? 왜 혼자 튀려고 하니? 너도 걔네처럼 되고 싶니?"
"걔네..?"
입을 벌리고 있는 선생님은 다소 멍청해 보였어. 아무래도 원숭이 무리를 말한 거겠지? 그날 이후 원숭이들이 종적을 감췄거든. 항간에는 여러 소문이 떠돌았어. 연쇄살인마에게 당했다는 둥, 밤길에 몹쓸 짓을 당해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둥, 늙고 보잘것없는 남창들의 종착지인 허름한 유흥업소에서 호객을 하는 걸 봤다는 둥... 진실과 조금씩 벗어난 이야기들이었지만 바로잡아줄 수 없었어. 죽인 것도 아닌데 왜 등교를 안 해서 이 사단을 만든 건지 모르겠어. 야자도 못 빼게.
"대학은 안 가니?"
"네."
"하.. 그래, 니 미랜데. 내 미래도 아니고, 그렇지?"
"그렇죠."
나는 잇몸이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어. 평소에 거의 웃지 않아서인지 안면 근육이 땅겨왔어. 윗입술이 씰룩씰룩 위아래로 떨리는 게 느껴졌어. 선생님은 흠칫 어깨를 떨더니 슬그머니 눈을 피했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한참을 웃는 낯을 선생님께 고정했고, 선생님은 다시는 나와 눈 맞추지 않았어.
야자시간에 그 애를 훔쳐볼 수 없는 건 유감이지만 덕분에 실력은 빨리 늘었어. 작업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 첫 번째는 타깃과의 라포를 쌓는 시간이지. 우선 타깃을 선정해. 다리가 예쁜 남자. 다리가 예뻐야 하는 건 고백에 사용할 소품이니까 그런 거고, 남자여야 하는 건... 그냥. 재밌잖아. 여태까지 날 놀리던 애들 대부분이 남자였는데, 여자인 나보다 자기 다리가 더 얇다는 둥 남자면서 자신의 여성성을 자랑했어. 그래, 내 다리는 삐쭉한 가을 나무처럼 볼품없어. 그렇지만 안목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아무리 긴 바지를 입어도 바짓단에 지는 주름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어. 예쁜 다리가 굳이 그 몸에 붙어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싶은 타깃들을 매의 눈으로 선정했어. 그리고 적절한 장소로 유인해 신속하고 깔끔하게 작업한 뒤에 말끔하게 지혈도 해주지. 말이야 간단하지만 실은 무척 세심한 작업이라고. 제 다리가 잘리는 걸 보면서 미치지 않도록 심리적으로 보듬어주고, 10초 내로 절단부터 지혈까지 끝내지. 그리고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거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면 마치 내가 구원자라도 되는 양 감격까지 하지. 나로 인해 삶의 목적과 희망까지 얻은 듯 보였어. 사실 나도 그들에게 악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고백을 위해 다리가 필요한 거였으니까. 말끔하게 다리만을 취한 건데, 죽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안 죽이니 목숨을 빚진 기분이 드나 봐. 타깃의 앞으로의 삶과 멘털 케어까지 책임졌으니, 뭐 존경받을만한 것 같기도 해.
두 번째는 온전히 혼자 끌어가는 시간이야. 토막 낸 다리를 온전한 상태로 집까지 운반하고, 부패하지 않고 영원히 처음과 같은 상태로 보관해야만 했지. 핏물을 쫙 빼서 건조도 시켜보고, 동물들 박제하듯 다리에도 적용해 보고, 변색을 줄이기 위해 도색도 하며 하나씩 둘씩, 나만의 노하우를 찾아 최적의 상태로 반영구적 보관이 가능하게 했어.
안목, 절단 기술, 상황 판단, 라포 형성, 다리 박제... 모두 정말 쉬웠어. 딱 하나만 빼고. 운반이 가장 골칫거리였거든. 아직 고등학생이라 면허가 없었으니까. 심지어 난 큰 키 때문에 꽤나 띄는데 길쭉한 다리를 이고 지고 가야 했으니까. 이 부분은 운이 따라줬다고 설명해야겠네. 물론 내가 물색한 장소에서 적절한 시기에 빠르고 완벽하게 작업을 했기에 운이 작용한 거지만. 100족 모으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너무 쉬워서 나중에는 발로도 절단을 할 정도였다니까. 아, 내가 말 안 했나? 나 천재라고.
<용기가 없어서>
난 사랑에는 젬병인가 봐. 인사라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눈 마주치는 것조차 왜 이리 어려운지. 아마 네가 태양처럼 찬란하기 때문이겠지? 너는 그저 있을 뿐인데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 계속 바라보고 싶어도 눈이 멀 것 같아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아무리 음침한 나일지라도 네 옆에 서면 빛에 물들고 말 거야. 물론 그럴 용기가 없어서 아직도 다리다발을 건네지 못했지만. 사실 준비는 애초에 끝났어. 핑계를 대고 있었을 뿐이지. 더 괜찮은 다리로 메우겠다며 포장을 풀어헤치고, 패디큐어를 칠해도 봤다가 문신을 해보기도 했지. 손으로 하는 일이어도 절단술과 미술은 영 다르더라고. 그렇게 다리는 100족이었다가 92족으로 97족이 됐다가... 네 앞에서 쭈그러드는 용기처럼 다리다발은 줄고 늘기를 반복했어. 다리를 다시 모으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말도 못 붙이고 졸업할 게 뻔했어. 내가 감히 네게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꽃다발을 품에 안고 이 무리 저 무리로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는 아이들은 꿀을 나르는 벌들 같았어. 들뜬 공기를 타고 떠다니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나만을 비껴갔어. 손수레에 붉은 노끈으로 단단히 고정한 초대형 스티로폼 상자만이 내 옆을 지켰어. 바보 같지. 졸업날까지 고백을 못 할 줄이야.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기회니까 일단 다리다발을 들고 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그른 것 같아. 네 주변에는 벌들이 너무도 많았어. 네 시선이 내게로 향할 일도 없는데 자꾸만 숨고 싶은 마음, 쪼그라드는 나 자신. 어쩌겠어, 태양 앞에 모든 건 그림자에 불과한 걸. 그러니 고백을 하지 못한대도 당연해. 슬픈 일도 아냐. 태양을 가지려다가는 녹아내릴 테니까. 나는 그저 지금처럼 멀리서 흠모하는 걸로 충분해. 다리를 모으며 네게 고백할 헛된 꿈을 꾸었지만 그마저도 내겐 행복이었어. 언감생심 고백보다는 딱 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어. 네 SNS를 통해 모든 사진을 저장하고, 네 모든 정보를 다 파악했지만... 오늘은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날이니까. 영원히 추억할 수 있게 함께 사진을 찍고 싶었어. 자리에서 일어났어. 손수레를 끌며 네게로 다가갔어. 네 향기에 한껏 취해있던 벌들이 흠칫하며 홍해처럼 반으로 갈라졌어. 네 친한 친구가 입모양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말했어.
"므야. 너 보는 그 그튼드."
수군대는 소리가 너와 나를 포위하듯 번져갔어. 눈빛 대박, 소름 끼친다, 음침하다 따위의 익숙한 말들은 날 평온하게 했어. 천천히 네 시선이 내게 향했어. 우와. 이게 얼마만인지. 골목길에서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나를 보던 네가 겹쳐졌어. 네가 머금은 따뜻한 빛깔과 상반되는 경멸 어린 눈빛. 너무도 짜릿해 더욱 나를 경멸해주기를 바랐던 것도 같아. 너는 경멸조차 귀했으니까. 그래서 네게 천시당하는 순간보다 좋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너는 참 싸늘했어. 만지면 버석할 것같이 무미건조한 얼굴은 어찌나... 황홀하던지. 낚싯대에 꿰인 생선처럼 그저 입만 벙긋댔어.
"뭘 봐?"
".. 아...... 나.. 나.. 나는.."
"음침하게 쳐다보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너는 무수한 무수리들을 이끌고 떠났어. 아마도 그게 네가 내게 건 마지막이 되겠지. 다시는 너와 근거리에 마주 설 일도, 네가 내게 일말의 관심조차 줄 일도 아마 없을 거야. 너와 나는 엄연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녹아내릴 때까지 태양에 다가가지조차 못할 테니까. 나는 네가 떠난 뒤에야 사진이라는 단어를 겨우 내뱉는 그런 애니까. 바보처럼 계속 되뇌고 되뇌었어. 아빠에게 처음으로 경주마를 골라줬던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어. 그때보다 더 어눌하고 풋내기 같은 웅얼거림은 조금씩 분명해졌어. 두근, 두근, 두근. 누군가 심장을 꺼내기라도 한 듯 아주 크게 심장 소리가 들렸어. 벅찬 가슴을 부여 쥐었어. 내 사랑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직감은 내게 희망을 줬어. 삶의 목적을 주고 방향을 제시했어. 우선은 네게 걸맞은 사람이 되기로 했어. 얼마가 걸리더라도.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내 마음을 고백하기로 결심했어. 내 사랑은 인내심이 많거든.
<10년 만의 초대>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옛 성인들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니까. 나는 진심으로 다리를 수집하는 일이 즐거웠어. 재능까지 겸했으니 부와 명성이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지. 나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다리를 보관할 냉장고도 무수히 많아. 내 아름다운 작품들을 세간에 공개할 수 없다는 게 유감이지만... 나름대로 암암리에 꽤나 수요가 있어. 그게 지금의 이 호화로운 삶을 내게 안겨주었고.
사실 나는 사치에는 관심이 없어. 길을 잃을 것 같이 커다란 저택은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아. 국내에 몇 대 없는 최고급 외제차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면허 없던 학생 때도 다리 운반을 잘했으니까, 꼭 좋은 차가 필요하지도 않아. 냉장고와 내 수집품 외에는 그다지 욕심이 없어. 그런 내가 왜 이렇게 부를 드러내냐면... 알잖아, 너 때문인 거. 넌 언제나 좋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너한테 잘 보이려면 이 정도는 돼야 했어.
부자가 돼서 좋은 점이 하나 있어. 조그만 휴대폰에 갇힌 너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 벽면 가득 찬 대형 전광판에 해사하게 웃는 네 위로 그림을 집중하며 바라보는 네가 덧씌워졌어. 작업을 하지 않을 때면 항상 구석에 웅크려 시시각각 변하는 너를 봤어. 음침하게. 과시하는 문화란 참 좋은 거야. 네 일상, 네 명품, 네 친구들, 네 문화생활, 네 직장... 흥신소는 쓸 필요도 없지. 말갛고 천사 같은 얼굴로 입만 열면 욕을 하던 너는 우아하고 지적인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었지. 어떻게 너를 향한 마음을 10년을 억눌렀을까 믿어지지 않다가도 너니까 이렇게 오래 좋아할 수 있었던 거겠지. 인내심 많은 내 사랑도 이제는 결말을 바랐어.
너만을 위한 전시를 열기로 했어. 처음에는 어떻게 꾸며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 중국집 출입문에 달린 발처럼 다리를 주렁주렁 매달까? 그대로 되돌아갈 게 분명했지. 고추를 새끼줄에 매달아 진짜 아들이 오길 바랐듯이 나도 거세를 해볼까? 하지만 그런 거무튀튀하고 쪼글대는 작은 것들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너에게 꼭 맞는 그런 전시여야 했어. 품격 있지만 지루하지 않고 신선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컨셉을 정하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어. 동선에 맞게 다리를 감각적으로 배치했어. 조명은 어둡게, 바닥에서는 은은한 안개가 흩뿌려지도록 장치했지. 입구에서부터 나는 향기는 오묘하고 감각적이지. 시원하지만 알싸하고 단향이 섞인 듯 하지만 매캐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향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공간마다 다른 향들이 또다시 후각을 사로잡지. 공간마다 벽지 색을 다르게 칠해 구분감을 줬어. 중간중간 사각 조형물을 무심하게 배치해 쉴 수 있게 했지. 반짝이가 끊임없이 흩뿌려지는 가시덤불처럼 얼기설기 설킨 다리무덤의 방, 탭댄스화를 신고 재즈 선율에 맞춰 발 박수를 치는 짝이 맞지 않는 두 다리의 방, 원기둥 형태의 커다란 수족관에는 수와 족들이 헤엄치고, 옥상 수영장에는 죽은 다리들이 춤을 췄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디오 예술은 가장 깊은 방 안에 설치했지. 네가 여기까지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구독자가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었어. 연락을 했지만 닿을지는 모르겠어. 물론 그걸 대비해 음침한 계획들을 많이 짜놨으니 상관은 없었어. 그런데 예상외로 네가 바로 내 쪽지를 읽었어. 믿어지지 않겠지만 답장이 바로 왔어. '여전히 음침하네, 넌. 꿈에 나올까 무섭게.' 그래서 온다는 건지 안 온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물었다가 괜히 네가 사라질 것 같아서 기분 좋은 감각만 만끽하기로 했어. 음침하길 잘했어, 네가 날 기억해 주다니.
계단을 올라 거실 홀 2층 난간에 올라갔다가 현관까지 한달음에 내려왔다가 구석에서 심호흡을 했다가 다시 계단을 오르기를 반복했어. 너를 기다리는 시간 내내 터질 것 같은 심장에 이리저리 휘둘렸어. 종이 울렸어. 누군가 심장을 뜯어내 바닥에 세게 내던진 것 같아 그대로 굳었어. 기다리는 것보다 너를 마주하는 것이 더 용기가 필요한 일임을 알았어. 호들호들 떨리는 다리로 어떻게 현관까지 걸어갔는지 몰라.
10년 만에 처음 마주한 네 얼굴에는 은은한 짜증이 서려있었어. 언덕 참 엿같네라고 중얼대고는 내게 '비켜'라고 인사말을 건넸어.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물렸어. 한눈에 담기지 않는 거실 전경에 너는 조금 놀란 눈치였어. 끝날 데 없이 고개를 꺾어야 천장이 보일 만큼 층고가 높은 집은 한국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드니까. 다리를 엮어 만든 샹들리에가 어두운 실내에 빛 조각들을 흩뿌렸어. 그제야 내가 어떻게 널 맞이할지 계획을 세워놨다는 게 기억났어. 나는 황급히 계단을 올라 2층 난간에 섰어. 나는 다리로 만든 스탠드 마이크를 쥐었어. 마이크를 움직일 때마다 다리는 마치 윤슬처럼 빛났어. 비치는 스타킹을 신기고 그 위에 곱게 간 다이아 가루를 발랐거든.
"환영해."
너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어. 정확히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조롱에 가까웠지. 가슴이 일렁댔어.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가슴이 세차게 일렁댔어. 마치 너를 처음 좋아하게 됐던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여긴 어디야?"
굽 낮은 단화의 또각대는 소리가 가까워졌어.
"내.. 내 집이야. 신발은 벗어줘."
"여기가 집이라고?"
"응.. 좀 꾸며봤어. 너 보여주려고.."
네 묘한 표정 너머 감정을 읽기란 내게 역부족이었어. 나는 우당탕탕 계단을 내려가 네 앞에 무릎을 굽혔어. 너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게 발을 맡겼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오만함조차 내겐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어. 나는 너를 허공에 매달린 다리들의 방으로 안내했어. 네가 다리로 손을 뻗었고 이내 흠칫 놀라 다시 거두었어.
"이거 진짜야?"
"응."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네 토끼 같은 앞니가 나를 일깨웠어. 10년 전의 너와 지금의 너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골목길에서 다리가 잘린 같은 반 애를 무심히 지나쳤던 건 그저 수험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걸 말이야.
"역겨워."
"미.. 미안. 마.. 많이 놀랐어?"
"아니. 놀랍진 않아."
두 번째 방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너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어. 너는 짝이 맞지 않는 두 다리가 발 박수로 재즈를 연주하는 장면에도, 죽은 다리의 싱크로나이즈에도 심드렁했어. 직업이 큐레이터라서 일의 연장이라고 느끼는 걸까? 일반적으로는 취미가 일이 되면 재미가 사라진다고들 하니까. 하지만 의아하게도 너는 나와 마지막 방까지 왔어. 오직 조그만 텔레비전만 덩그러니 있는 비디오의 방에.
"여긴 좀 평범..."
네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티비가 켜졌어. 네 목소리에 반응하게 설정을 해뒀거든. 다리가 L을 만들고 잘리고, O를 만들고 잘리고, V를 만들고 잘리고, E를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만들고 잘리고. 애잔할 만큼 처절한 비명을 장엄한 피아노 연주곡이 몰아냈어. 나는 네게 다리 부케를 건넸어. 이 고백을 하기 위해 필요했던 10년 치의 마음을 가득 담아.
"사..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소명을 가지고 있대. 그런데 자기 소명이 뭔지도 모른 채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래. 난.. 알아. 내 소명은 너야."
"설마.. 입에 담기도 싫은데... 맞아?"
"으응.. 널 조.."
"닥쳐."
나는 다리다발로 입을 가렸어. 너는 알쏭달쏭한 표정이었지만 부케도 내 마음도 받아줄 생각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어. 한동안 말이 없던 네가 입을 열었어.
"이 집은 자가야?"
"어? 응.."
"대출은?"
"없어."
"너 부자야? 부내랑은 거리가.. 아니, 어떻게?"
"다.. 다리 수집이 꽤 돈이 돼."
"너 같은 인간들이 더 있나 보네. 말세다."
"그렇지.. 그건 그래."
"근데 돈도 많으면서 이 꼴을 하고 고백을 하니? 머리는 푸석푸석해서 앞머리는 눈 다 가리고.. 끝도 들쭉날쭉.."
"너는 가스라이팅도 잘하는구나. 처.. 천사 같은 얼굴로 막말하니까.. 나.. 납득이 가."
"사실을 말한 거거든. 요샌 뭐만 하면 가스라이팅이래.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나는 안 좋아. 너같이 돈 쓸 줄도 모르는 애가 부자가 돼서.. 하.. 출근하기도 싫고 짜증 나."
".. 내.. 내내.. 내 돈이 다 니 거야! 네가 소.. 속물이고, 허영 덩어리라서..! 너한테 잘 보이려고 모은 돈이니까 다.. 다.. 니거야!"
네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어. 너무 저돌적이었나? 어느 부분이 잘못 됐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우물쭈물 대는데 네가 피식 웃었어.
"그래, 나 속물이야. 네 돈은 좋아해도 널 좋아할 일... 아마 없을걸?"
"사.. 상관없어. 네가 주는 거면.. 뭐든 조.. 좋으니까. 멸시조차도 황홀해.. 좋아.. 그냥.. 다.."
피아노 소리가 물러난 자리를 다시 비명 소리가 채웠어. 네가 티비를 껐어. 조금쯤은 다정함이 깃든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어. 네 입에서 흘러나올 말이 모질고 날카롭더라도 나는 얼마든지 삼킬 준비가 됐으니까.
"거지 같은 다리들 좀 버려. 구역질 나."
"응!"
10년 만의 고백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Happy en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