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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y 10.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0

준비편

  원래 이 글의 제목은 '영어울렁증 집순이의 얼렁뚱땅 호주 워홀'이었다. 고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더없이 경쾌한 제목에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4월 26일 출국해 호주에 온 지 2주째, 살면서 앞길이 막막하다고 느낀 적은 많지만 이보다 더할 순 없으리. 매일 아침 이 시련은 나를 강하게 하리라 스스로에게 가스라이팅을 해봐도 심장 옥죄는 갑갑함은 도무지 가시지가 않았다. 계속 글을 쓰고 싶었지만 핵인싸 호스텔의 공용 공간은 너무 기가 빨렸고, 벙커침대는 눕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그러다 오늘 캐리어에서 울 애기(앞으로 계속 등장할 인물)가 몰래 챙겨준 손바닥만 한 돗자리를 발견했다. 마침내 호스텔 복도에 앉아 울분의 글을 써 내려갈 수 있게 됐다.


  <나는 누구인가?>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해외 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영어를 잘하고 싶었지만 노력은 하고 싶지 않았다. 4년 전 뉴욕 여행을 갔을 때도 영어 때문에 곤욕을 치렀지만 뚝심 있게 공부를 하지 않았다. 망치로 머리를 맞았더니 영어 능통자가 되었다는 아주 오래전 읽은 기사를 떠올리며 벼락 맞고 영어를 잘하게 되지 않을까 망상에 젖었다. 공부를 하기가 벼락에 맞는 것보다 더 싫었다는 뜻이다. 그때라도 시작했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텐데. 캐나다에 교환 학생을 갔던 친구가 영주권을 받고 호주로 새로운 도전을 하러 떠날 때까지 나는 친구를 부러워하기만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핑계는 많았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막연한 환상만 갖고서 떠나기에는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으니까. 나는 개인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인데 해외에서는 그렇게 생활할 수가 없다는 점이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였다. 집세는 더 많이 드는데 지금보다 더 좋은 집에 살지도 못할 게 뻔했다. 지금은 소박한 월급으로나마 나와 내 개 두 마리쯤은 건사할 수 있지만 타지에서는 나 하나 먹고살기도 벅찰 것 같았다. 게다가 개들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더 떠날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다. 워홀을 가지 않을 이유는 무수히 많았지만 가야 하는 이유는 없었다.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자하는 열망이 강한 사람이다.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혼도 아니다. 결혼을 한다면 가부장적 문화에 물들지 않은 외국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외국에 나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싫었다. 국내에서 국내에 살지 않는 외국인과 운명적으로 만나거나 단기 해외여행을 가서 만나겠다는 정신승리만 3년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건 개 같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걸. 이 모순은 절대 운명이란 이름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정신병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숨 막히는 달리 할 것도 없는데 집에도 못 가는 숨 막히는 명절 분위기였다. 사장은 최저월급을 주며 온갖 생색과 쓰레기짓을 일삼았고 연령대도 높아 맘 맞는 동료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 내가 바라던 삶이 이런 거였나? 하루 절반을 여기서 이 새끼들과 보내다 갑자기 차에 치이거나 벼락을 맞는다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나는 지루한 평화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죽어도 여기서 찾을 수 없으리라. 나는 이렇게 사느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떠나자 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떠나기에 앞서 준비할 것들>

  1. 국제운전면허

  2. 공인인증서 연장

  3. 불필요한 것들 해지하거나 최소 요금제로 바꾸기(휴대폰 요금 등)

  4. 퇴직금(1년을 채우고 퇴사할 예정이었으나, 당장 행복해지기 위해 미국여행을 떠나느라 1년을 못 채웠다)

  5. 한의원에서 돌출 점 빼기

  6. 살 빼기

  7. 캐리어 구매

  8. 브라질리언 레이저 제모 (???)

  9. 등등


  <실제 준비 편>

  국제운전면허나 공인인증서 연장, 점 빼기 등은 바로 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제모도 출국 전까지 할 수 있는 최다 횟수를 끊고 이틀 전에 끊어둔 횟수를 모두 사용했다. 떠나기 직전에 처리해야 하는 것들을 마음의 짐으로 안은 채로 사람들을 미친 듯이 만났다. 출국을 코 앞에 두고 울릉도, 독도 여행도 갔다 왔다. 떠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고민했던 것이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할지였다. 명확한 목표가 없이 떠나는 워홀이기에 1년을 채우지 않을 수도, 정착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남기고 가는 게 현명함을 알았다. 하지만 집을 비워둔다는 게여간 찜찜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집을 정리하기로 결정했고 하나씩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가전은 모두 팔았고 가구 및 각종 세간살이는 대부분 나눔 했다. 자취 시작할 때 구색 갖춘다고 4인용 그릇 세트를 산 나답게 짐들이 어마무시하게 많았다.

  그렇게 대망의 출국일이 왔다. 당연하게도 나는 집을 다 비우지 못했다. 게다가 세탁기를 너무 빨리 팔아서 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원래는 전날 코인 세탁방에서 미리 빨아두려고 했는데 그날 술 마시느라...^^......... 정신없이 집을 비우고, 개들 산책도 하고, 묵은 빨래도 돌리고, 관리 사무소 가고, 휴대폰 요금이나 공과금 등도 처리하고, 좋아하던 호수 공원 근처 식당에서 밥도 먹고, 추억이 많은 카페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와 디저트도 먹고, 스케일링도 했다. 마음이 급한 와중에 건조기 돌린 세탁물이 너무 축축해서 기계 두 대에 나눠 한 번 더 돌려야 했다. 부랴부랴 이미 29kg에 육박한 캐리어에 세탁물을 넣으려고 보니까 팬티를 망에 넣은 채로 돌려서 여전히 축축했다. 공항에 갈 시간이 임박했고 이미 멍충비용으로 코인 세탁방에 쓸데없이 많이 지출했기에 팬티를 다 버려야 했다...^^... 가서 사지 뭐,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나는 아직도 팬티를 못 샀고, 한 번 입고 버리려고 챙겨 온 불편하고 야한 팬티로 2주째 연명 중이다.

  그렇게 얼레벌레 준비를 마치니 공항 갈 시간이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개들과 인사를 했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는 까만 두 눈이 빨리 떠나고만 싶던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떠나기 전까지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명분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으면서 개들은 안에도 없었다. 집에 있을 때만이라도 개들과 충만한 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당시에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고. 그 안일한 생각과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순간들이 덜컥 후회가 되어 심장이 내려앉게 했다. 소중한 걸 코 앞에 두고 가치를 몰라본 멍청한 우화들이 떠올랐다. 아마 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집을 나섰다.

  친구 차를 얻어 타고 가는 길, 중간에 주유소에 정차를 했다. 어떤 아저씨가 쌍욕을 해댔다. 단순히 미친놈인지 아니면 누구에게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1년간은 저런 공격적인 개매너 아저씨들을 안 볼 수 있으니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은 자꾸만 이게 맞나? 스스로에게 확인을 하고 있었다.

  인천으로 향하는 창 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고, 비교적 덤덤했는데 결국 눈물이 터졌다. 이제 앞으로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혼자 헤쳐나가야 했다. 지루한 평화가 죽음과 같다고 생각했던 게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개들이 보고 싶어도 그저 사진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과 시차는 나지 않아도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소중한 사람들과 소통도 줄어들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직장에 다녀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내가 포기한 게 꽤나 많았음을 나는 떠나는 날이 돼서야 알았다.

  출국장을 통과하며 호주에 6개월째 살고 있는 친구(앞서 언급된 애기)에게 연락을 했다. 인생이 이렇게 흘러올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토록 해외 살이를 꿈꾸긴 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결국 못 떠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충동적으로 갑자기 막차를 타게 되다니. 그러자 애기는 같이 우물 밖으로 나가보자고 했다. 맞는 말이다. 버린 만큼 새로운 것들로 채울 수 있기에 나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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