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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y 30.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4

병적인 미루기 끝에 만든 호주 은행 계좌

  <오자마자 했어야 할 일, 하지만 하지 않은 일>

  호주에 오고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은 계좌 만들기였다. 인터넷으로 신청이 가능하고, 카드 수령까지 늦으면 3주까지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하라고 다들 권유를 했었다. 하지만 나는 호주에 오자마자 호주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혐오하게 됐기에... 당장이라도 한국 돌아가고 싶은데 계좌 따위는 만들어서 뭐 한담, 차일피일 미루었다. 애기와 밥을 먹고 돈을 보내줘야 할 때마다 한국에 있는 애기 동생에게 돈을 보냈다. 나는 호주 돈이 없고, 애기는 한국 통장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애기 동생의 '언니, 왜 맨날 재쵸언니한테 돈이 들어와...?'라는 물음에 그 후로 '용돈'이라고 적어 송금을 했다. 그렇게 돈은 애기가 쓰고 애기의 동생만 경제적 이익을 맛보는 날들이 지속됐다. 무려 3주씩이나. 카드 사용 내역 알림이 떠도 '수수료? 어쩌라고' 다소 재벌스럽게 (하지만 거지인) 넘기며.


  <집세를 꿔서 내는 미친놈이 있다...?>

  살아있는 모든 종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다. 판다는 독립생활을 해야 건강하며, 사자는 암컷 여러 마리가 젊고 건강한 수컷을 공유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사람들 틈에 섞여있다 보면 혼자만의 안전한 은신처로 숨고만 싶어졌다. 불안하고 갑갑하고 우울하고 미칠 것만 같은 심신 미약 상태. 골드 코스트에 있던 며칠을 제외하고 나는 계속 호스텔 생활을 했다. 그래서 좁은 우리 안을 뱅뱅 도는 원숭이처럼 내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하루에 몇 번이고 머리를 부딪히는 관짝 같은 벙커 침대에 누워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집을 찾았다. 그런데 2주 치 보증금을 내야 계약을 할 수 있는데 계좌도 돈도 없었다. 한국 계좌에 있는 돈을 집주인에게 보내려고 하니 수수료만 만원이 들었다. 계좌를 만들어 그 계좌에 당분간 쓸 여윳돈을 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제야 계좌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이 화면을 출력해 은행에 방문하세요!' 나를 마주하는 기본 서체는.

  □호주 계좌에 여윳돈 송금하기

  □그걸로 집세 보내기

  미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나는 애기 찬스를 썼다.


  <오.. 가지가지..>

  어학원이 끝나고 근처 은행에 방문했다. 한국처럼 입구에 안내직원이 있었지만 창구도, 번호표 뽑는 기계도 없었다. 안내 직원에게 문의하니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분명 알아 들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이미 은행에 왔는데 뭔 예약을 또 잡으라는 거여?

  "나 이미 신청 다 했고, 그냥 은행원만 만나면 되는데...?"

  "응, 그러니까 예약 잡아야 된다고."

  안내원은 수기로 된 예약표를 펼쳤다. 그때 깨달았다. 듣던 대로 시스템이 정말 후졌다는 것을. 심지어 예약 가능한 가장 빠른 날짜가 3일 뒤였다. 예약도 30분 단위로만 가능해서 3시 30분이 마지막 시간인데 이미 차 있었다.

  "나 어학원 3시에 끝나는데 3시 15분은 안 될까?"

  "음... 그래. 알겠어."

  안내원은 예약표에 수기로 3:15와 내 이름을 적었다. 음.. 21세기가 맞는가,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래, 비록 시스템은 후졌지만 융통성이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은행원과의 인터뷰>

  호주에 온 이래 외국인과 1:1로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없다'다. 물론 어학원 선생님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설리번 선생님 같았고, 대부분의 호주인들은 그와 다를 테니까. 그래서 혼자 계좌를 만드는 게 몹시도 두려웠다. 분명 하나도 못 알아들을 텐데, 답보 상태로 시간만 흐르면 어쩌나? 그럼 너무 쪽팔리겠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텐데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어쩌라고 정신이 공포를 밀어냈다. 뭐, 못 알아들으면 니 속만 터지지. 난 손님이니까 네가 어떻게든 날 이끌고 계좌를 만들어 줘야지. 꽤나 덤덤해진 마음으로 은행에 입성했다.

  예약을 했다고 하자 직원은 나를 소파로 안내하며 차례가 되면 나를 부를 거라고 했다. 대기하는 동안 계좌를 만들었다는 창을 다시 켜려고 했는데 창이 만료가 돼있었다. 로그인을 다시 하라는데 나는 회원이 아니라서 불가능했다. 한국이었으면 전산에 저장돼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았겠지만, 수기로 예약을 잡는 걸 본 이후로 호주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생겼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나는 지나가는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나 이거 인쇄 못 했는데 어떡해?"

  "호호. 걱정 마~ 여권 가져왔지? 그럼 됐어~"

  다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는데 큼직한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보였다. 우물쭈물 대며 걷는 게 꽤나 어리바리해 보였다. 손님인가? 아빠 양복 훔쳐 입은 것 같네...라는 생각을 하는데 직원이 나를 호명했다. 그 남자가 나랑 같이 걷기 시작했다. 뭐야...? 웬 구석진 곳에 임시로 만든 듯한 공간을 봤을 때 2차로 뭐야...? 싶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자리에 앉아 갑자기 날 응대하기 시작했을 때 3차로 뭐야...? 싶었다. 벽 쪽 간이 의자에 그의 상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우리를 지켜봤다. 실습 평가 현장에 내가 손님 역할로 있다니, 재밌네.

  원래 한 명이 긴장하면 다른 한 명은 여유를 되찾는 법. 그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나보다 더 당황한 상태였으니까. 병아리 실습생은 매뉴얼대로 착실하게 계좌 개설을 진행하며 중간중간 농담도 던졌다. 나는 속으로 '젊은 친구가 참 열심히 하네. 합격.'을 외쳤지만 지켜보는 상사의 표정은 더없이 싸늘했다. 손주뻘 되는 친구에게 저렇게 냉혹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뭐, 일이란 게 그런 거죠... (일을 몇 달 쉬다 보니 더없이 너그러워진 재쵸) 혼자 둬도 괜찮겠다 싶었는지 상사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넌지시 병아리 실습생에게 물었다.

  "저 사람 니 상사야?"

  "�아니, 상사의 상사 같은 거야. 나는 저분을 똑바로 잘 못 쳐다보겠어."

  "왜? 저 사람 볼드모트도 아니잖아."

  "�그래도 긴장돼. 지금도 밥 먹고 바로 온 건데 다음 손님도 괜찮게 지나가길 바라면서 왔어."

  "(내가 와서 얼마나 다행이니...ㅎㅎ) 너 학생이야?"

  "�응. 화, 수 목 3일만 일해."

  볼드모트 같은 상사가 사라져서인지 그는 꽤나 편안해 보였다. 귀엽게 생긴 총각이 잘 웃어주니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젊은 남자 좋아함)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다. 너무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가 흘러가서 대략적으로 적어보자면 이렇다.

  "너 반지의 제왕 좋아할 것 같은데?"

  "�아, 난 그런 것보다는 노트북 좋아해."

  "오. 거기 주인공 되게 예쁘잖아."

  "�맞아. 정말 아름답지. 노트북 봤어?"

  "아니, 나 그 남주인공 얼굴 싫어해."

  남자 얼굴에 단호한 내 태도에 당황한 그는 '그래, 그 사람 얼굴이 좀 그렇지...'라고 본인도 본인이 뭐라고 하는지 모른 채 맞장구를 쳤다. 그 외에 그는 한국에 가보고 싶다는 둥, 한국 여권이랑 호주 여권이랑 색깔이 똑같다는 둥(뭐? 결혼하자고?) 얘기를 했다. 나도 '나도 호주 여권 궁금한데 오늘 들고 왔어야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했는데 그는 단호하게 구글에 쳐보라고 했다. 꼬마 신랑 맞이하기 쉽지 않네..^^�

송금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해놓고 명함 하나 밖에 없다고 사진 찍어가라고 하던 병아리 녀석..

  헤어지기 전, 나는 그에게 곧 휴대폰 번호가 바뀔 예정인데 은행 어플에서 번호를 바꿀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불행하게도 지점에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오, 그건 불행이 아니야 스위리.라고 말하면 잡혀갈 것 같아서 인자하게 웃어 주었다. 인터넷으로 등록한 정보와 실제 정보 일치 여부 확인, 어플 설치 및 계정 연동, 카드 받아볼 주소 재확인만 했는데도 40분이 흘러 있었다. 얼마나 얘기를 많이 한 건지. 어찌 보면 지독한 미루기 덕분에 외국인과 1:1로 회화를 한 셈이다. 덕분에 울렁증도 한 꺼풀 벗어낼 수 있었다.

  사실 그간 병적으로 할 일을 미루는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우울증이 도진 건가, 아님 그냥 내가 태생부터 구제 불능인 쓰레기인가? 다 귀찮다.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냥 죽을까? 왜 살고 있지? 끝없는 염세의 굴레에서 어느 날은 스스로 기어 나오기도, 어느 날은 누군가 내민 손을 잡고 올라오기도 했다.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고, 유약한 내 정신은 고장 난 주유소 풍선처럼 나부꼈다. 앞으로도 내 행동에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를 우울의 늪으로 몰아세우지는 말자고, 힘들더라도 의식적으로 그리하자고. 그 행동에 개연성이 있건, 없건 분명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설령 그저 무의미한 시간낭비였을 지라도 어떤 뜻밖의 재미를 가져올지는 모르는 거니까,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숨어들지 말고, 부딪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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