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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Jun 11.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6

유치원.. 아니, 어학원 한 달 체험기

  <어학이란 무엇인가>

  어학원에 등록한 뒤 온라인으로 레벨 테스트를 진행했다. 개강 전 주 금요일, OT 참석차 학원에 갔다. 영어를 못 한다고 망신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무색하게 데스크 직원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OT는 30분 정도 진행됐다. 어학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어학원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캠퍼스 안에서는 무조건 영어만 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내가 배정받은 반은 Pre inter로 기초반 바로 윗 단계였다. 이 실력으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따라갈 수나 있을까?


  <고도로 발달한 어학원은 유치원과 다름이 없다>

  어학원 상담을 받을 때 유학원 사장님이 나이를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저 나이 많아요.'라고 답했고, 사장님은 내게 나이는 걱정하지 말라고, 외국은 나이를 묻는 문화도 아니고 케이팝이 워낙 대세라 한국인이라면 무조건 좋아할 거라고 했다.

  남미, 터키계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아시아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반 애들 대부분이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관심을 보였다. 안녕이나 진짜? 오빠~(저한테 왜 그러세요..;;) 같은 짧은 한국어로 내게 말을 걸기도 했다. 한 일본인 친구는 새로 온 나를 몹시 반가워하며 대뜸 나이를 물었다. '오.. 나이 공격..ㅎㅎ' 당황하지 않고 만 나이로 실제 나이보다 두 살 줄여 답했건만 일본인 친구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게 놀라면 내가 너무 무안해지잖니.. 나도 그 친구의 나이를 물었고 그녀는 나와 띠동갑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 반 평균 연령대는 20대 초중반으로, 20대 후반부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평소 나이를 의식하던 편도 아닌데 어린애들 틈바구니에 혼자 껴있으니 머쓱하고 싱숭생숭했다. 수업 시작도 전에 잔뜩 기가 빨린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분위기는 굉장히 자유로웠다. 시간에 맞춰 오는 사람은 거의 없고 출석을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학생도 많아 보였다. (학생 비자는 어학원을 꼭 다녀야 해서 그런 듯했다.) OT때 영어만 써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는 다들 모국어로 떠들어대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때때로 그들의 주의를 끌어야 하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직장인 시절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업은 참여형으로 진행됐다. 방금 배운 영어 표현을 사용해 게임을 하거나 짝을 지어 대화를 해야 했다. 사회성 0에 수렴해 학창 시절이 지옥 같았던 나는 짝을 지어야 할 때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씁쓸한 기분과 함께 기가 쪽-쪽- 빨렸다. 영어를 못 하는 애들끼리 영어로 대화한다는 건 아리송함의 연속이었다. 이게 진짜 도움이 된다고..? 문법 파괴를 넘어서서 단어 내뱉기 수준에 가까운데 의미가 있나? 게다가 태국 억양이 너무 강해서 그마저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유일하게 완벽한 문법과 발음을 구사하는 건 선생님뿐인데 모순적이게도 수업 중 더 많이 들은 영어는 태국, 일본 영어였다.

  가끔 선생님이 연차를 쓸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다른 반과 합동 수업을 했다. 인원이 두 배가 된 만큼 개판력도 두 배가 된다. 평소에는 태국어만 들렸는데 스페인어가 쌍벽을 이루는 것이다. 쉬는 시간은 왜 자꾸 달라고 하는 건지, 다들 어려서 돈 귀한 줄을 모르는 걸까? 나는 내 돈 주고 등록했다고, 얘들아 제발 닥치고 수업 좀 들어라.

  원래 어학원은 언어보다는 친구 사귀고 새로운 환경에 정 붙이는 용도로 다니는 거라던데 내가 여기에 적응을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남들은 정착할 나이에 궤도를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건 무모한 걸 수도 있고, 용감한 걸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여유가 없다면 불가능한 기회인데 왜 감사하긴커녕 힘들기만 한 걸까? 우울하면 안 되는 건데 한 없이 우울했고, 나아져야 맞는 건데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마의 2주>

  유학원 사장님은 첫날에는 어학원이 어땠는지 묻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첫날부터 만족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1주일은 간을 보고 2주쯤 되면 각이 나온다고 했다. 그때까지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아리송하다면 끝까지 별로일 확률이 높다고 했다. 나는 할 일이 생겼다는 데에 의의를 두며 어학원을 다녔다.

  1주일에 한 번씩 승급 시험을 치렀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있던 사람이 나가고, 계속되는 순환의 고리 속 승급하지 못한 사람들은 반을 지킨다. 평소 공부를 전혀 하지 않던 나는 자연스레 고인 물이 되었다. 덕분에 주 4일 꾸준히 보는 반 친구들과 꽤나 친해지게 됐다. 안 되는 영어로 더듬더듬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웠고, 나서는 걸 싫어하던 내게 적극적인 면도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했다. 때로는 개판 분위기에 물들어 쉬는 시간만을 바라기도,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이 친구랑 떠드느라 정신이 팔리기도 했다. 딱 2주쯤 지나서였던 것 같다. 지루함과 현타의 연속이던 어학원에 점점 정이 붙은 게.

본다이비치 카페(분위기 좋고 맛은 별로) / 젤라또 가게(맛보기 여러 번 가능함. 피스타치오 추천, 라임 어쩌구 별로)
본다이비치 맞아요..

  일본 친구와 쉬는 날 바다를 보러 가기도 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외국에서 혼자 체류한다는 것만으로도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태국 친구와는 동년배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부쩍 가까워졌다. 수업 중 어릴 때 했던 게임을 묻는 시간이 있었는데 둘 다 심즈를 즐겨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플레이 방식은 당연히 막장. 불륜, 치정, 살인, 무작위로 애 낳기, 각종 치트키. 잊을 수 없는 Motherlode!

시드니 천문대 / 정국 누들 + 거미....

  방과 후에 어학원 코앞에 있던 정국 아내의 집에 가 '정국 누들'(꼬소한 들기름 불닭 국수 어쩌고)을 만들어 소풍을 가기도 했다. 시드니 천문대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했지만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날 선물 받은 직접 만든 얌운센 도시락

  시간이 지독하게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어학원 끝나는 시점이 다가왔다. 천문대에 소풍을 같이 갔던 또 다른 태국 친구가 마지막이라고 내게 도시락을 선물해 주었다. 얌운센이라는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태국식 냉국수였다. 같이 도시락을 먹으며 감회에 잠겼다. 그간 영어는 딱히 늘지 않았고, 가성비는 떨어졌다. 하지만 마음 붙일 곳이 너무 간절했던 내게 어학원은 규칙적인 일상을 살게 해 주었다. 나이와 국적에 관계없이 다양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언어보다 마음이 통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여길 왜 다니고 있나 싱숭생숭했는데 이제는 작별의 아쉬움으로 싱숭생숭했다. 하지만 감상에 잠겨있을 수는 없었다. 새로운 루틴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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