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쵸 Jun 16.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7

Gloomy Birthday:생명이 부여됨과 동시에 죽음이 예정된 삶

  <늘 그렇듯 반갑지 않은 날>

  내게 생일은 이유 없이 우울한 날이다. 왠지 이 날만큼은 행복해야 할 것 같아서 평소랑 똑같은 지루한 날인데도 그게 생일이라면 우울감이 드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도 생일을 알리지 않는다. 축하받기도 싫고,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가면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으니까.

  호주에 온 이후로 나는 깊은 물속으로 한 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요한 심연에서 발버둥도 못 치고 조용히 죽어가는 벅찬 하루의 연속. 터질듯한 가슴은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은데 세상은 평화로웠다. 부러운 마음으로 우울에 잠겨 세상을 바라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왜 삶에는 엔딩이 없을까? 죽음을 택할 의욕도 없는 사람에게는 끝이 허용되지 않는 걸까? 무엇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왜 꾸역꾸역 살 수밖에 없는 걸까?

  한국을 떠나기 전 해외에서 맞이하는 생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분명 그날만큼은 무척 특별하고 즐거운 일로 가득할 거라고 낙관에 빠졌었다. 친구들과 시끌벅적한 시간을 보낼 수도, 혹은 로맨스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초조함과 불안한 하루하루가 흘러 생일이 코 앞에 다가왔다. 껄끄러운 그 하루를 통으로 도려내고만 싶었다. 하필이면 주말이라 지독하게 긴 시간을 뭘 하며 보내야 할지 몰랐다.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 모른 채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문 닫힌 관 속에 갇힌 듯 나를 억누르는 벙커 침대 아래서 나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울한 어쩌면 행복한>

  어쩌면 내 바람대로 흘러갔을지도 몰랐을 날이었다. 평소처럼 우울하게 누구도 내 생일인지 모른 채. 애기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어쩌면 조금은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일인지 모른 체 그냥 만나자고 하는 목소리에서 모든 걸 읽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날이 뭐라고 타인의 시간을 뺏을 자격이 있나? 그러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은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났다. 혼자가 되고 싶으면서도 실은 혼자임을 못 견디는 모순, 나약하고 의존적인 쓰레기 같은 나. 기분 좋은 몽글몽글함이 우울보다 빠르게 나를 가라앉게 했다. 고맙지만 죽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 걸까? 그냥 죽고 싶은 걸까?


  <어찌 됐건 축하해>

  하이드파크에서 만난 애기는 내게 생일 축하와 함께 선물을 건넸다. 패딩이었다. 일전에 애기는 호주에서 파는 옷은 비싼데 질이 나쁘니 따뜻한 옷을 많이 챙겨 오라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보온보다는 심미성 위주로 옷을 챙겼고 혹독한 시드니의 추위 속에서 호들호들 떨어야만 했다. 전에 애기가 입은 패딩을 보고 지나가듯 '예쁘네, 나도 따라 사야지.'라고 말했었는데 그 패딩을 사 온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편지가 좋았다. 선물보다는 편지지라는 말에 단 한 번도 공감한 적 없었다. 어떤 마음이 담겨도 종이는 종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심 나는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려 줄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 편지는 죽고 싶을 때,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끝나지 않는다는 게 절망스러울 때 내게 힘이 되어주었다. 내게는 무조건적인 응원이 절실했으니까.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를 향해 걸어갔다. 길거리는 시위로 인해 복잡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딱히 알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평생 살 곳도 아니고, 내 나라도 아니니까. 혹여 내가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문다 하더라도 이 사회에 제대로 섞여들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임을 순간순간 실감하게 되겠지. 하긴, 당장이라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당에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의미에서 방관할 수 있다는 건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페라 하우스 앞 야외 식당에는 갈매기(깡패)가 진을 치고 있었다. 갈매기로부터 안전한 구역과 야외석이 중 우리는 야외석을 택했다. 분위기, 사진을 위해서.. 추위? 갈매기? 이겨내야지..! 우리는 치킨과 피자, 감자튀김, 음료를 시켰고, 애기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사진을 찍으려고 구도를 잡는데 깡패새끼가 식탁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와중에 음식을 지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가려거든 곱게 꺼질 것이지 멍청한 새대가리는 음료수를 발로 쳤고, 피자 위로 레몬 에이드가 쏟아졌다. ㅗ^^...ㅗ 그래도 다행인 건 대부분의 서구음식이 그러하듯 너무 짜서 레모네이드에 젖어도 맛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음식은 평범했고 가격은 싸가지 없이 비쌌지만 우리는 석양이 질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세계적인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식사를 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는 것, 타지에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 행복해야 하는 이유가 넘쳐나는데 기저에 깊이 깔린 우울은 그마저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생명이 부여됨과 동시에 죽음이 예정된 게 삶이기에 언제나 '끝'을 바라왔다. 어쩌면 나는 평생을 눅진하게 들러붙은 우울을 떼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타고나길 긍정적인 사람이 있듯이 염세적이고 불행한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꽤나 찬 밤공기에 애기가 준 패딩은 무척이나 포근했다. 걸을 때마다 거지 같은 섬 소리가 절로 나오던 혹독한 호주의 겨울을 잊게 할 만큼.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3시가 넘으면 커피를 마시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나라. 우리는 걷고 또 걸어 달링하버까지 갔다. 겨우 찾은 야간 영업을 하는 카페는 사람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하는 수 없이 밀크티 카페에 갔다. 선물도, 편지도, 시간도, 식사도 모두 애기가 썼는데 고작 이런 곳에 와야 함에 화가 났다. 맛은 기본이고 분위기가 중요한데 한국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갈 전형적인 저가형 체인점 카페가 웬 말인가. 그래도 애기는 음료가 맛있다고 좋아했다. 나는 안도했지만 한편으로는 '거지 같은 섬,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네.'라고 생각했다.

  애기는 내게 마지막으로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고 했다. 생일 축하 노래를 우쿨렐레 연주와 함께 들려주고 싶다고. 그래서 나를 만나기 전에 사람이 없을 만한 장소들을 미리 물색하기까지 했다고 했다. 우리는 영업 종료 시간이 임박한 쇼핑몰로 향했다. 인적 드문 구석에 앉아 애기의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곡이 끝난 뒤 애기는 내게 진짜로 들려주고 싶은 노래는 따로 있다고 했다. 겨울 아이. 애기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에게 헌정된 이 노래 때문에 겨울생인 사람들이 부러웠다고 했다. 그런데 호주는 계절이 반대니까 봄에 태어난 우리도 이곳에서만큼은 겨울 아이라고, 그래서 이 노래를 들려줄 수 있다고. 나는 이 노래를 좋아하지도 않고 겨울생인 사람이 부러웠던 적도 없지만 별 거 없는 날을 특별한 날로 바꿔주는 애기의 말이 좋았다. 봄 아이가 겨울 아이가 되듯,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헌정곡의 주인공이 될 수도, 이곳에 머무르고 싶은 이유를 만들 수도 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아서 희망에 들떴다가도 누군가 발목을 끌어당긴 듯 수렁에 처박히곤 했지만. 내겐 행복해야 할 이유도 감사할 것들도 많았다. 더없이 우울할 뻔한 생일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주려 애쓰는 친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말이다. 이러다가 또 손바닥 뒤집듯이 죽고 싶어 지리라는 걸 안다. 스스로가 무가치해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울이 희석된 미래에 바라봤을 때 오늘은 좋은 순간만을 모아둔 앨범 같을 것 또한 안다. 그러니 기분 좋은 감각만을 안고 잠에 들어야지. 선물을 너무도 많이 받은 생일이니까.

이전 07화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6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