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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Jun 18.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8

시드니와 멜버른을 가로지르는

  <시드니에서 시들어가는 가련한 재쵸의 삶>

  어학원이 끝나니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이 없었다.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서 자꾸만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삶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왜 이곳에 존재하는가? 생각이 많아질수록 행복과는 멀어졌다. 시드니는 항상 나를 철학적으로 만들었다.

  호주에 오기 전, 미리 사람들을 알아두고 영어도 쓸 겸 데이팅 앱을 사용했었다. 그때 거기서 매치된 사람들에게 도시 추천을 해달라 한 적 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사는 도시가 좋다며 빈약한 근거들을 내세웠고,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그중 유일하게 사심 없는 조언을 해준 사람은 멜버른에 여행 온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멜버른은 예술이 발달한 도시라 너처럼 창조적인 사람에게 더 잘 맞을 거야, 시드니에 예술 산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항상 예술 쪽에서는 멜버른이 앞서 있거든.'

  그 당시 나는 호주에만 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궁합이 있듯이, 도시와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어서 나는 매일 생각했다. 시드니가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대체 왜 나는 불행할까? 왜 여기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시드니가 싫을까? 일자리를 구하고 친구를 더 사귄다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좋아하게 될 수는 없다는 걸. 진지하게 지역 이동을 고려할 때가 왔다.


  <멜버른에 사는 사람들>

  멜버른행 표를 샀다. 하루에 커피 두 잔 마시기, 사람들 만나기가 계획의 전부였다. 멜버른에 아는 사람이 세 명 있다. 셋 다 만난 적은 없기에 실제로 만나면 어떨지 기대가 됐다.

  한 명은 데이팅 앱에서 만난 호주 남자로, 한때는 개인 메신저로 옮겨 꾸준히 얘기했지만 어떤 계기로 시들해졌다. 심지어 멜버른에 간다고 알린 뒤에도 명확히 약속을 잡지 않았다. '이 새끼는 뭐 어쩌자는 걸까?' 애매모호하고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마다 폭행 욕구가 치솟았다. 그래도 만나는 봐야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되는 성격이라 못 만난 채로 돌아간다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두 번째는 데이팅 앱에서 알게 된 일본인 친구로, (레즈 x) 커피가 좋아 멜버른으로 워홀을 왔다. 시드니에 온 직후 연타로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서 이 친구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 친구는 멜버른은 커피의 도시이니 놀러 와서 진짜 커피를 맛보라고 했었다.

  세 번 째는 한국인 워홀러로, 몇 달 전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가 힘들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나는 워홀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있었기에 별로 와닿지가 않았었다. 그리고 호주에 온 이후 다시 그 글을 읽었는데 어찌나 내 얘기 같던지. 나는 글쓴이와 댓글을 주고받았고, 멜버른에 놀러 오면 같이 커피를 마시자고 약속했었다.

  뭘 믿고 감히 날 거절(?)하는지 의아한 호주 남자와 커피와 워홀 외에 큰 공통점은 없는 일본인 친구, 안 지 가장 얼마 안 된 한국인 워홀러, 전부 다 만날 수 있을까? 이 중 누구를 만나게 될까?


  <멜버른을 가로질러 온>

  아직 멜버른에 간다고 말하지 않은 시점에 바리스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시드니에 3일간 여행 갈 건데 만날 수 있냐고. 마침 그 친구가 시드니에 도착하는 날이 내가 멜버른으로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타이밍이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우리는 만나기도 전에 시드니에서도 보고 멜버른에서 다시 보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사실 워홀러, 커피 외에 겹치는 관심사가 없어서 만남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봤는데도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 다 영어가 유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어의 유창성만이 소통의 전부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을 안고 지내는 게 타지 생활이니까, 그거 하나만으로도 서로가 꽤나 가깝게 느껴졌다.

Paramount Coffe Project. 대체 햄버거에 김을 왜 넣지...? 돈 아까워서 먹으려다가 나중에 김 다 빼고 먹음.

   카페를 나온 바리스타에게 어딜 가고 싶냐고 물었고, 바리스타는 체크인을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바리스타는 백팩 하나를 메고 왔다.) 이게 짐의 전부라고? 내 반응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나도 의문에 빠졌다.

  가는 길에 바리스타는 계속 '오, 여기 멜버른 같다.^^'라고 말해 번번이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멜버른이 시드니 같으면 내가 멜버른에 가는 이유가 없어지잖아. 하지만 그는 뚝심 있게 '멜버른이랑 거의 똑같은데 멜버른이 더 작아.^^'라고 말해주었다.

오페라 하우스 / 하버 브릿지

  체크인 후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를 보러 갔다. (원래는 보타닉 가든에서 쉬다가 석양이 질 때쯤 오페라 하우스 방면으로 걸어오려 했는데, 입장 시간 지났다고 경찰이 막고 있었다.) 갈매기 무리를 뚫으며 바리스타는 '멜버른이랑 다르네. 멜버른에는 피죤이 죤많문.^^'라고 전혀 달갑지 않은 정보를 주었다. 오페라 하우스 사진 몇 장 찍고서 우리는 윈야드에 있는 펍으로 향했다.

The Royal Geroge 생선버거와 치킨텐더 / 전에 유학원 사장님이랑 먹었던 치킨버거와 뇨끼. 뇨끼 대추천!

  나는 바리스타에게 '데이팅 앱 계속 쓰니?' 물었고, 바리스타는 '그닥..^^'이라 답했다. 표정에서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1명의 괜찮은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발견한다는 보장 없음) 수 없이 많은 함정들을 봐야 하고, 그전에 모든 의욕을 잃는 어플. 바리스타는 내게도 같은 질문을 했고 나는 멜번남 사진을 보여줬다.

  '쏘쏘. 벗 헤어 이즈 곤... 순...'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건 더 직설적이고 잔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바리스타는 웃는 얼굴로 혹평을 하고는 그래도 만나는 보라고 권유했다.

그냥 도시 야경..

  바리스타의 숙소로 가는 길이 비비드 축제 장소였다. 육교에서 한참을 분수쇼를 보고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멜버른에서 보기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바리스타는 시드니행 표를 사고 가장 먼저 내게 연락을 했다. 시드니에 안지 오래된 친한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다른 친구가 이 날을 먼저 골랐더라면 우리는 시드니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하루빨리 멜버른에 갔어도 마찬가지고. 서로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인연이 아닐까?


  <하라는 데이트는 안 하고!>

  데이팅 앱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여자였다. 워홀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 바로 첫 만남을 가졌고, 그 뒤로 또 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 애가 '오늘 퇴근 후에 서울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서 저희 본가 가실래요? 거기서 자고 다음 날 놀아요.'라고 제안을 했다. 딱 한 번 본 사이에 이런 제안을? 좀 이상한 사람 같다. 그렇다면 거절할 수 없지! 나는 그날 고속버스를 타고 친구의 본가에 내려가 친구 어머니와 셋이 치킨을 먹었다. 늦게까지 이야기하고서도 다음 날에도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었다. 호주를 떠나기 전까지 세 번 만났을 뿐이지만, 오랜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전에는 만남에 세월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오랜 인연과 관계가 정리됐을 때 더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때로는 10년 지기 보다 안지 하루 된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진실된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에 충실하는 게 중요하다고. 가벼운 속성의 앱에서 진실된 사람과 진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캐나다 친구를 통해서 변한 가치관을 바리스타가 다시금 확신하게 해 주었다. 만남의 깊이와 세월이 비례하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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