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8

시드니와 멜버른을 가로지르는

by 재쵸

<시드니에서 시들어가는 가련한 재쵸의 삶>

어학원이 끝나니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이 없었다.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서 자꾸만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삶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왜 이곳에 존재하는가? 생각이 많아질수록 행복과는 멀어졌다. 시드니는 항상 나를 철학적으로 만들었다.

호주에 오기 전, 미리 사람들을 알아두고 영어도 쓸 겸 데이팅 앱을 사용했었다. 그때 거기서 매치된 사람들에게 도시 추천을 해달라 한 적 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사는 도시가 좋다며 빈약한 근거들을 내세웠고,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그중 유일하게 사심 없는 조언을 해준 사람은 멜버른에 여행 온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멜버른은 예술이 발달한 도시라 너처럼 창조적인 사람에게 더 잘 맞을 거야, 시드니에 예술 산업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항상 예술 쪽에서는 멜버른이 앞서 있거든.'

그 당시 나는 호주에만 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궁합이 있듯이, 도시와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어서 나는 매일 생각했다. 시드니가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대체 왜 나는 불행할까? 왜 여기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도 시드니가 싫을까? 일자리를 구하고 친구를 더 사귄다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좋아하게 될 수는 없다는 걸. 진지하게 지역 이동을 고려할 때가 왔다.


<멜버른에 사는 사람들>

멜버른행 표를 샀다. 하루에 커피 두 잔 마시기, 사람들 만나기가 계획의 전부였다. 멜버른에 아는 사람이 세 명 있다. 셋 다 만난 적은 없기에 실제로 만나면 어떨지 기대가 됐다.

한 명은 데이팅 앱에서 만난 호주 남자로, 한때는 개인 메신저로 옮겨 꾸준히 얘기했지만 어떤 계기로 시들해졌다. 심지어 멜버른에 간다고 알린 뒤에도 명확히 약속을 잡지 않았다. '이 새끼는 뭐 어쩌자는 걸까?' 애매모호하고 의뭉스러운 태도를 보일 때마다 폭행 욕구가 치솟았다. 그래도 만나는 봐야지.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되는 성격이라 못 만난 채로 돌아간다면 후회할 것 같았으니까.

두 번째는 데이팅 앱에서 알게 된 일본인 친구로, (레즈 x) 커피가 좋아 멜버른으로 워홀을 왔다. 시드니에 온 직후 연타로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서 이 친구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 친구는 멜버른은 커피의 도시이니 놀러 와서 진짜 커피를 맛보라고 했었다.

세 번 째는 한국인 워홀러로, 몇 달 전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가 힘들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나는 워홀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있었기에 별로 와닿지가 않았었다. 그리고 호주에 온 이후 다시 그 글을 읽었는데 어찌나 내 얘기 같던지. 나는 글쓴이와 댓글을 주고받았고, 멜버른에 놀러 오면 같이 커피를 마시자고 약속했었다.

뭘 믿고 감히 날 거절(?)하는지 의아한 호주 남자와 커피와 워홀 외에 큰 공통점은 없는 일본인 친구, 안 지 가장 얼마 안 된 한국인 워홀러, 전부 다 만날 수 있을까? 이 중 누구를 만나게 될까?


<멜버른을 가로질러 온>

아직 멜버른에 간다고 말하지 않은 시점에 바리스타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곧 시드니에 3일간 여행 갈 건데 만날 수 있냐고. 마침 그 친구가 시드니에 도착하는 날이 내가 멜버른으로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타이밍이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우리는 만나기도 전에 시드니에서도 보고 멜버른에서 다시 보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사실 워홀러, 커피 외에 겹치는 관심사가 없어서 만남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봤는데도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둘 다 영어가 유창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어의 유창성만이 소통의 전부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을 안고 지내는 게 타지 생활이니까, 그거 하나만으로도 서로가 꽤나 가깝게 느껴졌다.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15.jpg Paramount Coffe Project. 대체 햄버거에 김을 왜 넣지...? 돈 아까워서 먹으려다가 나중에 김 다 빼고 먹음.

카페를 나온 바리스타에게 어딜 가고 싶냐고 물었고, 바리스타는 체크인을 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바리스타는 백팩 하나를 메고 왔다.) 이게 짐의 전부라고? 내 반응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나도 의문에 빠졌다.

가는 길에 바리스타는 계속 '오, 여기 멜버른 같다.^^'라고 말해 번번이 내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멜버른이 시드니 같으면 내가 멜버른에 가는 이유가 없어지잖아. 하지만 그는 뚝심 있게 '멜버른이랑 거의 똑같은데 멜버른이 더 작아.^^'라고 말해주었다.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02.jpg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05.jpg
오페라 하우스 / 하버 브릿지

체크인 후 우리는 오페라 하우스를 보러 갔다. (원래는 보타닉 가든에서 쉬다가 석양이 질 때쯤 오페라 하우스 방면으로 걸어오려 했는데, 입장 시간 지났다고 경찰이 막고 있었다.) 갈매기 무리를 뚫으며 바리스타는 '멜버른이랑 다르네. 멜버른에는 피죤이 죤많문.^^'라고 전혀 달갑지 않은 정보를 주었다. 오페라 하우스 사진 몇 장 찍고서 우리는 윈야드에 있는 펍으로 향했다.

KakaoTalk_20230618_175708485.jpg
KakaoTalk_20230618_180326668.jpg
The Royal Geroge 생선버거와 치킨텐더 / 전에 유학원 사장님이랑 먹었던 치킨버거와 뇨끼. 뇨끼 대추천!

나는 바리스타에게 '데이팅 앱 계속 쓰니?' 물었고, 바리스타는 '그닥..^^'이라 답했다. 표정에서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1명의 괜찮은 사람을 발견하기 위해(발견한다는 보장 없음) 수 없이 많은 함정들을 봐야 하고, 그전에 모든 의욕을 잃는 어플. 바리스타는 내게도 같은 질문을 했고 나는 멜번남 사진을 보여줬다.

'쏘쏘. 벗 헤어 이즈 곤... 순...'

영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건 더 직설적이고 잔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바리스타는 웃는 얼굴로 혹평을 하고는 그래도 만나는 보라고 권유했다.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06.jpg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09.jpg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10.jpg
KakaoTalk_20230618_175708485_12.jpg 그냥 도시 야경..

바리스타의 숙소로 가는 길이 비비드 축제 장소였다. 육교에서 한참을 분수쇼를 보고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다시 멜버른에서 보기를 기약하며 헤어졌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바리스타는 시드니행 표를 사고 가장 먼저 내게 연락을 했다. 시드니에 안지 오래된 친한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다른 친구가 이 날을 먼저 골랐더라면 우리는 시드니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하루빨리 멜버른에 갔어도 마찬가지고. 서로 약간의 의지만 있다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게 인연이 아닐까?


<하라는 데이트는 안 하고!>

데이팅 앱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여자였다. 워홀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어서 바로 첫 만남을 가졌고, 그 뒤로 또 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 애가 '오늘 퇴근 후에 서울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서 저희 본가 가실래요? 거기서 자고 다음 날 놀아요.'라고 제안을 했다. 딱 한 번 본 사이에 이런 제안을? 좀 이상한 사람 같다. 그렇다면 거절할 수 없지! 나는 그날 고속버스를 타고 친구의 본가에 내려가 친구 어머니와 셋이 치킨을 먹었다. 늦게까지 이야기하고서도 다음 날에도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아있었다. 호주를 떠나기 전까지 세 번 만났을 뿐이지만, 오랜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전에는 만남에 세월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오랜 인연과 관계가 정리됐을 때 더는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때로는 10년 지기 보다 안지 하루 된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진실된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에 충실하는 게 중요하다고. 가벼운 속성의 앱에서 진실된 사람과 진짜 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캐나다 친구를 통해서 변한 가치관을 바리스타가 다시금 확신하게 해 주었다. 만남의 깊이와 세월이 비례하지 않다고.

keyword
이전 08화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