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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Jun 05.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5

시드니에서 (내 인생도 좀) 구해줘 홈즈!

  <아무리 좋아도 호스텔은 호스텔>

  아니, 이런 호스텔이라면 평생 살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때때로 2층에서 내 침대로 물건이 떨어졌고, 관짝 같은 벙커에 머리를 족히 30번은 넘게 부딪혔다. 7시만 돼도 누군가 방 불을 껐고, 노트북 좀 썼다고 방에서 나가달라고 퇴장 조치를 받았다. 방은 더없이 정숙한데 공용 공간은 인싸들이 점령해 보기만 해도 기가 쪽쪽 빨렸다. 아직도 캐리어를 풀지 못한 데다 짐 일부는 내게, 일부는 애기네 집에 있어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야 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고 가슴은 돌로 짓누르는 듯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이대로 있다가 터져버릴 것 같아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갔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슬리퍼를 신은 채 무작정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발악을 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고, 나는 다시 관짝 같은 호스텔로 돌아가야 했다. 호스텔에 있는 내내 실직 가장을 체험하는 것 같았다.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나왔는데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어 막막한, 넘치는 시간이 막연한 상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건 내게 조용한 고문과 같았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었다.


  <시드니에서 (내 인생 좀) 구해줘 홈즈!>

  시드니에 집을 구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검트리(Gumtree)와 플랫 메이츠(Flatmates), 그리고 한인을 대상으로 한 '호주나라'. 검트리와 플랫메이츠는 매물이 더 다양하지만 문의에 답이 오지 않거나 너무 늦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호주나라는 매물은 적었지만 답변도 빠르고 영어로 소통할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나는 호주나라를 통해 집을 알아봤다. 위치와 본드비(보증금), 최소 거주 기간을 확인하고 인스펙션(집 보러 가는 것)을 잡았다.

  인스펙션을 가기로 한 날, 갑자기 날씨가 몹시 추워졌다. 나는 애기와 함께 첫 번째 집으로 향했다. 역에서 내려 5~7분 거리에 있는 집이었고, 유닛(한국으로 치면 오피스텔)이라 공동 비밀번호를 쳐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집에 들어갔을 때 받은 첫인상은 '아늑하다'였다. 거실에 소파와 의자, 조명 등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고 부엌과 식탁도 깔끔했다. 현관 앞에 작은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내 방은 2층에 있었다. 방이 작아서 2층 침대가 놓여 있었고, 수납용 벽장도 1.5인용에 가까워서 간이 수납장이 놓여 있었다. 2층에 있는 욕실은 큰 편이었고 세탁기, 건조기도 시간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딱히 규칙이 없는 데다 생활 패턴도 다들 달라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집주인은 계약을 할 거냐고 물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벙커 침대를 또 써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집 보고 바로 계약 여부를 결정하는 게 맞나? 싶어 답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집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넘쳐서 마음에 들면 보통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새 집이 나가 계약을 할 수 없을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12인의 성나게 하는 사람들>

  두 번째 집까지 족히 10분은 걸은 것 같았다. 역세권은 물 건너갔네. 굳이 보러 가야 하나? 가로등 하나 없는 길, 캄캄한 하늘에는 별들이 무수했다. 집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뭘 위해 한국에서 살던 집보다 구린 집을 더 비싼 돈 주고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가? 배수진을 치고 온 덕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답 없는 노빠꾸 인생이었다.

  예상외로 집주인은 남자였다. 집에 들어가니 벽 곳곳에 경고문과 규칙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규칙을 어기면 벌금이 있다고도 명시되어 있었다. 치우지 않은 음식 찌꺼기가 떨어진 부엌, 전반적으로 위생을 찾아볼 수가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도 독방이니까 첫 번째 집보다는 편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는 바로 박살 났다. 응집된 퀴퀴한 홀아비 냄새가 문을 열자마자 내게 달려들었다. 손바닥만 한 방은 감옥을 연상케 했다. 파란색 침구의 한 부분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나 혼자 산다 '고름 베개'처럼...

  욕실은 1층과 2층에 각각 하나씩 있는데 2층이 여성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입주해 있는 12명 모두가 남자여서 2층을 남자들이 쓰고 있었다. 입주하게 되면 2층 욕실을 혼자 쓰게 되나요?라고 묻자 아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성비가 비슷하게 맞춰지면 그때 2층을 여성용으로 바꾸겠다면서. 남자만 11명이 있는 집에 여자 한 명이 있다 한들 어떤 여자가 들어와 살겠어요? 영원히 그 집은 12명의 남자들만 살겠죠.


  <시드니 집 구하기 난이도 극악, 인정합니다>

  두 번째 집을 본 뒤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첫 번째 집주인에게 계약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고작 이틀 지났는데 벌써 집이 나갔다고 했다. 또다시 호주 나라 뒤지기가 시작됐다. 그러다 6월 말까지 독방 단기 거주 공고를 발견했다. 가장 최소 거주기간이 짧은 집, 금방이라도 시드니를 뜨고 싶은 내게 적합한 공고였다. 나는 그날 바로 인스펙션을 갔다.

  역에서 10분 거리랬는데 아직도 목적지까지 한참이 남았다. 인적 없는 길에 어떤 남자만 나랑 계속 방향이 같았다. 그러다 그 남자도 어느샌가 무단 횡단을 해서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횡단보도 없는 4차선 도로의 향연, 무단 횡단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20분 이상을 걷고서야 집에 도착했다. 아까 나랑 같이 걷던 남자가 그 집에 있었다. 아까 남자가 무단횡단해서 사라진 곳이 안 치이고 무단 횡단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구나, 싶었다.

  집은 채광이 좋아서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집주인이 별채에 살아서 주기적으로 관리를 한다고 했다. 방도 혼자 살기에 적당한 크기였고 창문도 커다래서 환기도 문제없어 보였다. 이 방 주인을 제외하고 모두 남자였지만 두 번째 집처럼 공포감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느낌이 좋았다. 또 집 알아보기도 귀찮고, 더 괜찮은 집이 있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냥 계약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언젠가 차에 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는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목숨 걸고 무단 횡단을 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세 번째 집도 계약하지 않았다.


  <인생은 재쵸처럼>

  세 번째 집으로부터 다른 계약자를 구했다는 연락이 왔다. 어차피 거기 입주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진짜 다른 집을 알아봐야만 했다. 그간 한 거라곤 소원 일기에 '쾌적하고 괜찮은 집 빨리 구하기' 적은 게 다였다. 어디서 나한테 딱 맞는 괜찮은 집 딱 나타나면 안 되나? 인생 좀 날로 먹고 싶다. 인스펙션 지겹다...  나는 꾸역꾸역 호주 나라를 뒤져 두 곳과 인스펙션을 잡았다. 그리고 이미 망한 듯한 내 현실을 잊기 위해 글을 썼다. 그때 문자가 왔다.

  '혹시 아직도 집 구하시나요?'

  첫 번째 집주인이었다. 계약자가 계약을 취소해서 방 계약할 의사가 있냐고 물었다. 호스텔에서 지내는 동안 나만의 공간이 아주 간절했다. 캐리어도 풀고 필요한 물건을 바로바로 쓰고 싶었다. 7시만 되면 강제로 정숙해야 하는 암묵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좌절뿐이던 내 위로 한 줄기 빛이 쏟아졌다. 밑도 끝도 없는 근자감이 기분을 고조시켰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은 날 위해 날로 먹을 수 있게 밥상을 차리고 있었구나. 드디어 내게도 집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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