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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쵸 May 12. 2023

이렇게 워홀 가면 안 된다 표본의 개노답 워홀기 1

이 거지 같은 섬에 버려지다니이이

  <호주 입국기:진실의 방이냐 추방이냐>

  내게는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긴장하는 병이 있다. 그래서인지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는데 틀려서 다시 종이를 받아서 적는데 틀린 걸 따라 적어서 또 틀렸다. 총 세 장을 틀리게 쓰고 ^^... 그래서 원래 두꺼운 펜으로 쓴 것 마냥 글씨를 덧칠해 수습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호주 입국 심사는 엄격하기 때문에 신고서에 조금이라도 오류가 있으면 추방을 당할 수 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나 영어도 못하는데 진실의 방으로 끌려가면 어떡하지, 피어나는 N의 상상을 잠재우려 애쓰다 보니 호주에 도착했다.

  한국은 대면 입국 심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모두들 기계에서 여권 스캔으로 빠른 입국 처리를 했는데, 내 여권은 인식이 되지 않았다. 공항 직원이 해봐도 안 돼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대면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참고로 나는 입국 신고서에서 두 가지나 '예'에 체크를 했다. (1. 의약품 2. 흙이 묻은 물건(신발 등))

  입국 심사관은 말없이 신고서에 낙서 같은 것을 끼적였다. 그게 끝이었다. 짐을 찾고 금지 물품을 소지한 사람들을 위한 2차 심사대로 향했다. 그런데 검사관도 신고서를 대충 확인하고는 그냥 가라고 했다. 말 안 걸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앞으로 여기서 영어 쓰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나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여기가 지옥이에요>

  숙소는 시드니 도심 한복판에 있는 센트럴 Yha로 잡았다. 얼리 체크인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짐만 맡기고 슬슬 걸으며 구경하는데 처음 왔는데 익숙한 이 느낌, 마치 동남아 같았다. 기분이 착 가라앉았는데 그 이유가 명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다. 시드니가 매력적이지 않아서인지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올만한 가치가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인지.

  호주에서의 첫끼로 인도네시아 음식을 택했다. 15불에 닭다리 하나, 밥 한 공기가 나왔다. 같이 나온 양념은 향신료 맛이 강해서 손도 못 댔고, 맛은 평범했다. 한국에서 이 돈으로 먹을 수 있는 더 맛있는 음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수한 음식들이 스쳐가는 동안 머릿속엔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체크인을 하고 나서 내 멘탈은 깊은 수심 아래로 처박혔다. 고시원에 방문한 정몽준처럼 멘탈이 나간 나는 공용 샤워실에서 다시 한번 절망에 빠졌다. 여행에서 숙소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기에 여관이나 무슨무슨'장'에 묵은 적도 있다. 하지만 여태껏 이렇게 더럽고 관리를 안 하는 곳은 없었다. 한국에서 살던 집은 얼마나 쾌적했던가. 내 취향에 맞게 하나씩 모았던 세간살이들, 안온한 일상을 위해 3년에 걸쳐 만든 내 요새... 월세를 일할 계산해도 거지 같은 호스텔이 더 비쌌다. 사는 게 재미없다고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오다니, 30대에 왜 갑자기 미쳐서 이런 짓을 했을까? 후회와 분노가 마구 뒤엉켰지만 탓할 사람도 없었다. 내 선택이니까.

  시드니 천문대 앞 잔디밭에서 가이드와 함께 노을 지는 풍경을 봤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 브리지(당시에는 뭔지도 몰라서 웬 다리가 있네... 했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곳이었다. 여러 색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졌고, 우리는 애기를 만나러 자리를 옮겼다.

  나도 가이드와 안 지 두 달 밖에 안 됐는데 셋이 만나도 안 어색할까? 걱정이 무색하게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장기간 해외 살이를 하는 애기를 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보다니, 그리고 앞으로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게다가 가이드도 해외 이주를 꿈꾸고 있기에 애기와 이야기가 잘 통했다. 둘이 해외 살이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동안 나는 조용히 수렁으로 가라앉았다. 살다 보면 현실에 벽에 부딪혀서 지치고 포기하고 싶어질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이럴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기분이 개박살 났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애기와 함께 시드니 도심을 구경하면서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여봐도. 범람하는 후회와 두려움에서 나는 한 없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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