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hmaninoff - Symphony No. 2 in E Minor, Op. 27: III. Adagio
이건 지미의 첫사랑 이야기다. 이야기는 우편물실에서 시작된다.
도장 찍는 소리와 서류를 분류하는 소리, 사람과 사무용품의 합주가 우편물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항상 비슷한 시간에 목에 빳빳하게 긴장이 올랐다. 이래서 지하실이 싫어. 밀폐된 공간이라 공기는 한정되어 있는데 단체로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니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자연히 자세도 흐트러지고 목에 긴장이 쌓이게 된다. 그래서 지미는 담이 온다 싶으면 머리를 어깨 쪽으로 잡아당겨 긴장을 풀었다. 성실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약속이었다. 그러고 나면 과거와는 한 발짝 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도 지미는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긴 팔을 들어 올렸다. 머리를 옆으로 당겼을 때 처음으로 그를 봤다. 승모근에서 느껴지는 시원하면서 아픈 복합적인 감각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손에 힘이 빠진 건지 근육이 덜 뭉쳐서인지는 사고가 정지됐기에 알 수 없었다. 지미가 느낀 건 두 가지였다. 아름답다, 눈을 뗄 수 없다. 그도 지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꽤 오랫동안 눈을 맞췄다. 그가 생긋 웃었다. 달빛을 가루로 만들어 뿌린 듯 주변이 빛났다. 그는 더 이상 지미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지미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점심 시간, 한산한 우편실에 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몬드 같은 부드러운 눈매 아래로 긴 속눈썹이 음영을 드리웠다. 지미는 슬쩍 나가서 포장해 온 샐러드를 들고 그의 옆에 어물쩍 섰다. 다시 한 번 그의 눈길이 닿기를 바라며 헛기침을 했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드러나듯, 그림자 아래 숨어 있던 깊이 있는 눈빛이 지미를 마주 보았다. 두뇌 회전과 말발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지미였지만, 이걸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랐다. 지미는 자신의 지난 사냥감들처럼 무방비 상태로 그 앞에 놓였다. 그의 눈빛을 정의할 마땅할 표현을 찾지 못해서. 하려던 말도 잊고 멍청하니 그에게 사로잡힌 채로. 지미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지미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어… 음… 방울토마토 먹을래요? 아니! 샐러드! 샐러드를 말하려고…"
"좋아요."
느낌을 넘어선 확신이 지미의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일방적인 느낌이었다면 이런 확신은 불가능할 거라고 지미는 생각했다. 첫눈에 사냥감을 알아봤고, 한 번도 틀린 적 없을 정도로 지미는 '촉'이 좋았다. 하지만 지미가 자신만만하게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 믿음이란 이름의 도끼가 지미의 발등을 찍었다. 친절하지만 그 이상은 없는 그의 눈빛에 지미는 마구 동요했다. 할 말을 찾다가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의식하지 않는 척 힐끗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봉긋하지는 않지만 단정한 이마와 반듯한 콧대, 그 아래 자리 잡은 도톰한 붉은 입술. 이마부터 시작된 매끄러운 옆선을 타고 내려가다 호두를 머금은 듯 잔뜩 힘이 들어간 턱에서 시선이 멈췄다. 지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 턱에 힘을 줬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턱에 있던 호두가 사라졌다. 도둑질하다 걸린 것마냥 지미의 심장이 발등으로 쿵 떨어졌다. 그가 턱에 힘을 줘 다시 호두를 머금었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지미가 어벙하게 보고만 있자 그가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지미의 턱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겠지만 지미에게는 그 웃음이 일종의 선언이었다. '너는 앞으로 내게서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고.' 느낌을 넘어선 확신? 아니, 그보다 더 명확했다. 마치 신탁 같은 불가항력이었다. 원래의 지미라면 신탁이라는 말에 코웃음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 앞에 작아지듯 거대한 감정 앞에 지미는 무력했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던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미 겪었던 열병이기에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때까지, 지미는 별 의미 없는 그의 눈빛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것이다.